올들어 7번 째이자 연번 91번 째인 답사 길은 부여 홍산에 있는 태봉산성 일명 북촌리에 있다해서 북촌산성이라고도 하는 백제시대 토성으로 보이는 산성이다.
세월에 녹이 나고 스러지고 이제 남은 것은 희미한 흔적과 기억뿐이니, 찾아가는 길은 안개속을 걷는 것 같다.
일단 홍산면사무소를 찾아 자료를 구할 겸 기본적인 점을 확인하고자 들른 결과, 마침 면장님과 자리를 함께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주변 지형이며 특징이며 역사에 관한 속깊은 이야기와 안내를 받았다.
마침 면사무소의 위치가 북촌3리라 뒤의 낮은 산이 태봉산성이다.
부여군지(1987년판)를 뒤져보니 북촌리산성은 표고 90m의 홍산초등학교 뒤 산정을 중심으로 쌓은 테뫼식의 토축산성이며, 성둘레가 약 180m로 성벽은 개간되어 평탄한 농경지로 되었으나 단을 이루고 있어, 이로써 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성내 산정에는 최영장군의 홍산대첩비가 있다고 말해준다.
고려시대 극심한 왜구의 침입에 맞서 싸운 전승지를 기념하는 대첩비가 있다해서, 남원 운봉의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비를 연상하며 찾아 올라간 태봉산성은 기대만큼에는 못미쳤다. 그래도 잊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이 있어 그나마 다행스럽다고나 할까.
개간되어버리고, 울타리쳐진 사유지에 시민체육공원조성으로 망가진 토성의 흔적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안타까웁기만 하고,
왜 태봉산성인지,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고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모른채, 후손들은 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할 뿐인가?
동헌 방안의 소주병 모습이며 객사의 부서진 문짝과 찢어진 문종이들이 700여년이 넘은 은행나무는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지켜온 산 증인인가?
찾아간 날이 홍산 장날이라 그래도 북적거린다.
오그라드는 시골 장들의 모습을 보며 한 때는 제법 유명했던 중국집을 찾아 주인의 사진솜씨를 감상하며 점심을 먹고 계백장군 등 8충신을 모신 사당을 찾아 나선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른데 비홍산 줄기와 천덕산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산들의 등줄기가 홍산의 옛이름이 대산(大山: 백제시)이요 한산(翰山:통일신라)이다 가는 홍산(鴻山: 고려초)으로까지 아름답게 이어져 왔음에 내심 끄덕거리면서 귀로에 오른다.
모두가 크다는 뜻의 한자식, 한글식 표기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성흥산성 밑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옛영화를 누렸던 사비성(부여)은 고요함 속에 망국의 슬픈 사연만 간직한 채 있다.
<홍산면 회의실에 걸려있는 홍산현고지도 복사본>


<이장환 면장님과의 대담>

<홍산면사무소 뒤로 나있는 태봉산성 가는 길>

<여호와 증인 교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계단식으로 된 경사에 개인집 뒤곁에 산성 기단부로 보이는 석축부분들 : 성돌크기와 다듬어서 쌓은 모습이 보통 석축이 아닌 것으로 보여짐>

< 태봉산성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모습 :
맨 뒤 비홍산(飛鴻山)의 앞 급경사면이 마치 옥천 이백리 산성의 경사와 비슷하다.
앞에는 동헌이 있는 북촌1리 쪽 홍산시가지. 옛면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객사 옆으로>
<토성의 회곽도로 보이는 아래쪽으로 토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에는 필수 적으로 샘이나 우물이 있어야 하는데, 혹시 그거와 관계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져본다.
태봉산성 정상 바로 밑에있는 급수시설 :위에 있는 건물은 집수정인 듯하고 그 뒤로 태봉정이 보인다.>

<태봉체육공원 배치도: 하필이면 기구배치도 면을 보면 토성회곽도를 딸아 이뤄진것 같아 매우 씁슬한 기분이다.
이런 사례는 전국적인 현상이다. 1번부터 20번 까지의 길이 토성상층부 회곽도이고 위가 내성으로 추정된다.>

<회곽도 옆으로는 급경사의 토성이 인위적인 원형의 모습을 지니고 있고 왕벚나무가 한창 자라고 있다..
꽃을 피우는 4월이면 장관이겠지>

<최정상에는 태봉정이 있고, 그 옆에는 최영장군의 홍산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장대지였을 곳으로 추정된다. 사방 조망이 뛰어나고 뒤의 천보산 줄기와도 연결된다.>

<남문지였으로 곳으로는 지금은 포장된 진입로로 변했고, 길옆 화단속에서 발견한 옛기와 조각들의 무뉘를 살펴본다.>

<부여 태봉산성 안내판: 부여군지에 소개된 북촌리산성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

<태봉산성이기보다는 공원으로 사용되는 역사의 현장.>

<현재 면사무소 앞에 있는 홍산천과 잇대어 있는 곳에 만덕교(萬德橋)가 있다. 배수갑문 시설이 가로막고 있어 들어가볼 수 없다.
울타리 너머로 어렵사리 찍은 사진들;지나가는 주민아줌마한테 만덕교위치를 물어보니 모른단다.
안내표지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호서읍지:1871)홍산현지에 보면 객사 동쪽에 있다고 한다.>

<돌다리 놓은 솜씨를 직접 볼 수 있어 감격스럽다. 우물마루 놓은 것과 흡사하다.
- 놓인 위치로 봐서 읍성 해자와 관계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홍산천의 냇물 크기와 방향과 비교해서 말이다.>

<객사 건물내에 있는 홍산만덕교 비와 설명문>

<만덕교비에 적힌 내용을 읽기에는 너무 희미하다. 탁본이나 해서 판독해야할 정도로>

<

<홍산 관아 정문 : (현판)이름이 없다.>

<관아 정문을 들어서면 동헌 건물 만이 있다. >

<홍산형방청 : 엣스러움이 잘 남아 있다. 비홍추청(飛鴻秋廳)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비홍은 홍산의 이칭이고 추청은 형방을 가리킨다.)>

<우물마루의 모습과 만덕교의 다리 놓은 모습을 비교해보면 좋을 것이다.>

<ㄷ자형의 안채>

<황산 객사의 모습 : 3채가 이어서 있다. 경내에는 은행나무와 객사문 옆의 노송이 운치가 있다. >


<객사 동쪽에 있는 노거수인 은행나무 ; 720년이 넘은 공손수 : 왼쪽 뒤로 태봉산성의 정상 모습이 건너다 보인다.>

<가던날이 장날이라던가, 홍산장날 풍경은 예전같지 않다고 옛 취영루 주인은 말하고,
이웃 한산과 더불어 보부상(부보상)이 신바람을 날리며 돌아다니던 흥취는 이제 전설속으로만 남아있다.>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 있는 팔충사를 찾아서 >

<부여 부소산성내에 있던 삼충사 건물을 옮겨서 지은 것 : 잠겨서 들어가보지 못하고 밖에서만 서성거리다 오다.>

< 바로 큰길 옆으로 고인돌(支石)이 있다. 그래서 동네이름이 지석리인가보다.>

(*계백장군의 출생지로 추정하는 곳, 이곳에 여덟 충신의 고향이라해서 팔충(八忠)골이요. 그 유적을 기리는 마음 또한 갸륵하다. 천등산과 충화면의 이름이 새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