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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경승(杜景升, ?〜1197)은 고려 무신정권 시기(1170〜1270)의 무장으로, 3기 무인정권의 수장인 이의민(李義旼, 집권 시기: 1083〜1196)의 유일한 경쟁자였다. 무신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가 어떻게 문하시중 중서령이라는 최고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으며, 권력이 자주 바뀌던 무신정권기에 어떻게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일까?
두경승은 전주 만경현(현재의 김제시 만경읍) 출신으로, 후덕하고 겉으로 꾸미는 일도 적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두경승의 출신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장인이 상장군(上將軍, 정3품) 문유보(文儒寶)인 것으로 볼 때 평민 출신은 아닌 듯하다. 그는 타고난 장사에다가 무예인 수박(手搏)에도 능통했지만 학문적 능력(文才)은 적었다.
두경승은 두릉 두씨(杜陵杜氏)의 중시조(中始祖: 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로, [두릉두씨세보(杜陵杜氏世譜)]에는 그가 1122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정2품)를 지낸 두방(杜邦)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세보에 기록된 두방은 다른 사서(史書)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두방이 고위 관리였다면, 그의 무덤은 개성에 있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그의 무덤이 특별한 이유 없이 개경이 아닌 만경현에 있다는 세보의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다. 따라서 두경승은 고위 관리의 자식이 아니라, 만경현의 지역 향리 출신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두경승은 왕의 경호와 의장을 맡은 공학군(控鶴軍)에 들어갔다가, 의종의 어머니인 공혜태후(恭睿太后)의 거처인 후덕전(厚德殿)을 지키는 견룡(牽龍: 궁궐을 지키는 군인)으로 일했다.
이때 무신정변이 일어나 무인들이 남의 재산을 많이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두경승은 홀로 대궐문을 떠나지 않고, 남의 재물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다. 이처럼 성격이 곧고 강직한 두경승은 비록 무신정변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권력자인 이의방(李義方, ?~1174)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산원(散員, 정8품)을 거쳐 내순검군지유(內巡檢軍指諭), 낭장(郎將, 정6품)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1173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 ?~1173)이 난을 일으키자, 이의방은 그의 종형인 이춘부(李椿夫)와 두경승을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삼아 반란에 동조한 자들을 회유하고 민심을 무마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포악한 성품의 이춘부가 김보당에 동조한 고을의 수령들을 많이 죽이자, 두경승이 그를 타일렀다.
“적을 관대하게 처분하고, 비록 반역의 정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실상이 명백히 드러난 이후에 처형하는 것이 옳다.”
이춘부가 두경승의 말에 따르자, 백성들이 기뻐하여 복속해왔다. 선유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춘부는 두경승의 관대함과 신중함을 높이 칭찬했다. 이를 계기로 두경승과 이춘부는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두경승은 김보당의 난을 제압한 공으로 장군이 되었고, 서북면병마부사(兵馬副使, 4품)가 되어 창주(昌州: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군)를 수비하게 되었다.
그가 서북면병마부사로 있던 1174년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 ?~1176)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두경승은 자신이 거느린 병사들과 함께 개경으로 돌아오고자 했다. 그는 군사들과 개경으로 오는 길에 조위총의 반군과 두 번 마주쳤고, 두 번 다 이들을 물리쳤다. 특히 객관에서 점심 식사 도중 반란군이 들이닥치자, 그는 객관의 문을 열고 활을 쏘아 적을 그 자리에서 거꾸러뜨리는 용기를 보여 이들을 물러나게 했다.
개경에 돌아온 그는 5천여 명을 지휘하는 병마부사로 임명되어 반란군을 진압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의주(宜州: 현재 함경남도 문천군) 전투에서 조위총의 장수 김박승의 목을 베고 성을 함락시키는 등, 동북면 일대를 반군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두경승은 서북면으로 건너가 맹주(孟州: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 등의 여러 주들을 함락하고, 대동강에서 서경의 군사들과 20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이러한 전공으로 그는 명종(明宗, 1131~1202, 재위: 1170~1197)으로부터 직접 칭찬을 받았다. 두경승은 다시 후군총관사(後軍惣管使)로 임명되어 전장에 나가 연주(漣州: 평안남도 개천시) 성을 함락시켰다. 그는 병사들이 성에 들어가 재화와 보물을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유독 가마솥을 가져가는 것만은 허락했다. 그의 약탈 금지 정책은 서북 지역의 여러 성들이 조위총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관군에게 항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서경 사람들은 굳건한 성을 믿고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두경승은 연주에서 가져온 가마솥으로 취사도구를 삼아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그의 관용과 신망이 널리 알려지자, 차츰 서경 사람들 가운데 그에게 투항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그해 6월 총사령관 윤인첨(尹鱗瞻)이 서경의 통양문을 공격하고, 동시에 두경승이 대동문을 공격해 깨뜨리자 마침내 서경성이 함락되었다. 아울러 조위총을 사로잡아 베어 반란을 평정했다. 하지만 반란군의 우두머리 조위총의 사망에도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자 명종은 두경승을 서북면병마사로 임명했다. 두경승은 조위총의 남은 무리들을 소탕하는 일을 맡아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두경승은 반란 진압의 공으로, 1177년 상장군에 올랐다. 1179년 경대승(慶大升, 1154~1183)이 집권한 후에도 그는 승진을 거듭해, 1180년에는 공부상서(工部尙書, 정3품) 등을 역임했다. 1183년 경대승이 죽고, 이의민이 집권한 이후에도 그는 승진을 거듭했다.
1183년 12월 두경승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정3품)에 임명된 이후, 1185년 참지정사(叅知政事,종2품), 1189년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 종1품)로 승진했다. 1190년에는 수태위(守太尉)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된 이의민보다 서열상 앞서는 것이었다. 1191년에는 판리부사(判吏部事) 수국사(修國史)도 겸해 관리의 인사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두경승의 거듭된 승진에는 명종이 무신정권의 권력자인 이의민 세력을 견철(牽掣)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자 이의민은 두경승을 몹시 견제했다. 특히 두경승이 서열상 이의민보다 위에 서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중서성(中書省) 회의 중에 그를 향해 “네가 무슨 공으로 나보다 지위가 높은 거냐?”며 욕을 했다. 하지만 두경승은 웃기만 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이의민은 두경승과 만난 자리에서 힘자랑을 하기도 했다. 이의민은 “어떤 사람이 힘자랑을 하기에 내가 이렇게 때려눕혔지”라고 말하며 손으로 기둥을 내리쳤는데, 그의 괴력에 서까래가 내려앉아버렸다. 그러자 두경승도 “어느 때 내가 빈주먹질을 했더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더라” 하면서 벽을 내리쳤는데 그만 벽이 무너져버렸다.
이처럼 두경승은 힘에서는 이의민에 못지않은 장사였고, 특히 수박의 고수였다. 관직 서열에서는 도리어 이의민보다 앞섰다. 게다가 그는 명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명종은 1193년 두경승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봉하고,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명종은 두경승에 의지해 왕의 권력을 일부 회복할 정도였다. 반면 두경승은 왕권의 지지를 바탕으로 승진을 한 탓에 무신들 사이에서의 권력은 이의민에 비해 약세였고, 이것이 그의 약점이었다.
그가 공신에 책봉되자 여러 장군들이 그를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무르익어 장군들이 술에 취하자 각자 악기를 잡고 연주를 시작했다. 두경승은 노래를 했고, 수사공(守司空, 종1품) 정존실(鄭存實)이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이의민이 화를 내며 “재상이란 사람들이 어찌 스스로 광대처럼 노래하고 피리를 부는가?”하며 꾸짖었다. 그러자 잔치가 끝나고 말았다.
두경승을 위해 마련된 잔치가 이의민의 진노로 끝났다는 것은, 이의민 세력이 두경승보다 앞섰음을 보여준다. 두경승은 이의민에게 세력에서 점차 밀려 그를 제대로 견제할 수 없었다. 물론 이의민도 두경승으로 인해 다른 무인정권의 집권자들과 달리 인사권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행사하지는 못했다.
두경승은 이의민과 경쟁하기는 했지만, 그를 제거할 의지와 힘이 없었다. 또한 권력을 이용해 남의 재물을 탐하는 일도 없어, 이의민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런데 1196년 4월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가 바뀌는 순간에도 두경승은 여전히 그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할 때, 두경승은 동조 내지는 묵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충헌은 두경승의 사돈인 유득의(柳得義)를 권지이부상서(權知吏部尙書)로 삼았다. 이는 집권 당시 정4품 섭장군(攝將軍)에 불과했던 최충헌이 재상인 두경승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두경승은 그해 11월 중서령(中書令, 종1품)에 올라 여전히 건재를 과시했다.
그런데 최충헌과 그의 아우 최충수(崔忠粹, ?~1197)는 이미 66세에 달한 명종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1196년 8월 왕의 행차가 광화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최충수가 사람을 보내 구경꾼들을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행차를 보려던 사람들이 물러나 피하다가 태자의 의장에 부딪혔고, 이를 오해한 사람들이 왕의 수레에 변고가 났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왕의 수레를 호종하던 백관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길가의 구경꾼들도 서로 짓밟히는 혼란이 벌어졌다. 이때 유독 시중인 두경승만이 고삐를 쥐고 여느 때와 같이 행동하며 왕의 수레를 지키고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왕의 행차 주변에 군대를 배치하고 지휘했던 최충수가 왕을 시해하기 위해 시도한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두경승은 왕과 태자를 보호하려는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명종의 폐위를 노린 최충헌 세력의 입장에서는 두경승은 부담스럽고 제거해야 할 존재였다.
최충헌은 이의민 세력을 제거한 이후에도 자신의 정권 유지에 위협이 될 무인들을 꾸준히 척결했다. 그는 두경승의 사위 유삼백(柳森柏)과 조카 두응룡(杜應龍)을 먼저 제거했다. [고려사절요] 1197년 9월의 기록에는 최충헌이 흥왕사(興王寺)에 가려할 때, 흥왕사의 승통(僧統: 승군(僧軍)을 통솔하는 일을 맡아 하던 승려)인 요일(寥一)이 두경승과 더불어 그를 해치려 한다는 내용이 담긴 익명서가 그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다분히 무고이거나, 최충헌 측의 조작일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자신의 인척이 척결되는 과정에서 두경승이 실제로 친왕 세력인 사원 세력과 연합해 최충헌을 먼저 제거하려고 기획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세는 최충헌에게로 이미 기울고 있었다. 그는 개경 시내에 군대를 주둔시킨 후, 두경승을 불러 그를 연자도에 귀양 보냈다. 또한 유득의를 비롯한 친왕 세력의 장군과 대신, 대선사(大禪師) 연담(淵湛)을 비롯한 10여 명의 승려 등을 귀양 보내고, 이어서 명종마저 폐위시켰다.
최충헌은 두경승과 명종을 제거함으로써 그의 쿠테타를 완성하고 최씨 무인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해 11월 연자도에서 두경승은 울분으로 인해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았다.
두경승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발휘하며, 우직하게 무인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그는 이의방에 의해 출세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1174년 이의방이 정중부(鄭仲夫, 1106~1179)에 의해 제거되었지만, 그는 전장에 나가 반란을 제압한 순수 군인이었기 때문에 이의방과 함께 몰락하지 않았다. 또한 경대승이 권력을 잡은 후, 용력이 없고 학식이 없는 자들을 제거하고자 할 때에도 그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권력이 자주 바뀌는 무신정권 격변기에도 두경승이 꾸준히 승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무인으로서의 능력과 성품 덕분이었다.
그는 대단히 솔직한 인물이었다. 그가 중서령에 임명되었을 때, 당시 풍조로는 일단 거짓으로 사양을 거듭하다가 마지못해 취임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그는 “속마음으로는 사양하고 싶지 않으면서, 남의 붓을 빌려 겉으로만 예문(禮文)을 하니 나는 차마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무신정권 시기, 다른 무인들과는 다른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고려의 무인이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이승한, [고려 무인 이야기 1], 푸른역사, 2003
정성희, [인물로 읽는 고려사], 청아출판사, 2000
이정신, <고려시대 명종 연구>, [한국인물사연구] 6집, 2006
김재명, <고려 명종대의 정치와 내시>, [사학연구] 99집, 2010
두윤경, <고려 무인정권기 두경승의 정치활동>, 교원대 석사논문, 2013
장상규, <고려 명종대 정치세력과 정국운영연구>, 경북대 박사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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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전에도 그러시기는 했지만 고려사까지 외연을 넓히시는군요. 하기야 고대와 중세 역사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감안하면 당연하다 생각됩니다. 덕분에 잘 일고 갑니다. 무디어진 감각이 좀 살아날 듯도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