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걸쳐 ‘효’ 행한 김종직 선생 후손…기와집 빼곡한 ‘효자마을’ 구경 가보세
<4> 시공간 넘나드는 개실마을 체험여행
By 김창원 기자 2015.01.27
개실마을 사무실에 마련된 민속품들. 전통문화를 후손에 물려주기 위해 마련됐다.
몸서리쳐지게 가난했다. 양반이라는 자부심만으로 수백 년 숙명처럼 지고 오던 가난을 떨치고 지금은 번듯한 기와집들을
세운 마을에는 주말이나 휴일이면 전국 각지에서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선비의 기를 받겠다고, 전통문화를 체험하겠다고
몰려들고 있다. 지역민들은 “조상 덕으로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젠 우리도 베풀며 살 겁니다”하고
웃는다. 고령 개실마을 이야기다.
88고속도로 고령 나들목에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 선산김씨 문충공파 점필재 김종직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잘 다듬어진 마을길과 집집마다 새로 기와를 올리고 잘 다듬어진 한옥들이
여느 집성촌과는 다르다. 고색창연보다는 개량과 신축으로 정비되고 꾸며졌다. 집집마다 문패가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다는
표지를 붙여놓았다.
높지 않은 앞산이 지척이다. 나지막한 뒷산이 꽃이 만발하는 화개산이니 나비가 날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앞산을 한사코
문필봉 아닌 접무봉이라 부른다고 김종수 이장은 강조한다. 왼쪽의 좌랑봉(벼슬)과 오른쪽의 증봉(떡시루봉)을 두르니 고루
갖추었다. 아름다운 마을이지만 그러나 풍요하진 않았다고 한다. 나지막한 앞산이 사악하고 음험한 기운을 막아주고 뒷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도적의 외침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마을. 그러니 세상 풍파로부터 조용히 묻혀 살기로는 이만한 곳이 없어
보였다.
선조 점필재가 화를 당한 이래 150년 동안 전국을 떠돌던 점필재의 후손들은 6세손 김수휘가 이곳 개실마을에 터를 잡고는
고단한 등짐을 풀었다. 풍수에도 밝았던 김수휘는 큰 인물이 나고 풍족하게 잘 살려면 이웃 대량으로 옮겨야 했지만 끝내
실천하지 않았다고 길 안내를 맡은 이용호 고령군 문화해설사는 설명한다.
마을 한쪽에 자리한 점필재 종택에 들어서서 사랑채를 지나 본채 대청에 앉으면 시야를 가리던 눈앞의 접무봉을 사랑채
지붕이 가려준다. 이 자리가 화심, 꽃의 중앙이 되니 개실마을의 모든 기가 모여드는 중심이 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개실마을을 찾는 많은 체험객들이 점필재와 그 후손들의 정기를 받으려 이곳을 찾는다.
점필재의 17세손 김종수 이장(72)은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났고 지금은 58가구에서 98명이 거주하고 있다. 어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그나마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인근 작은 동네까지 합치면 합가1리는 67가구다” 고 말했다.
70대가 젊은이 축에 드는 이 마을의 노인들은 모두 얼굴이 밝았다. 바쁘고 보람차게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얼굴에 그려져 있다.
여성들은 조를 나누어 마을을 찾는 도시의 체험객들을 맞아 체험 교육도 해주고 식사 심부름도 한다. 시즌이면 하루 1,200명씩
찾기도 하는 전국적인 전통문화 체험 명소가 됐다. 설 명절을 앞둔 요즘은 유과 만드는데 아주 일손이 바쁘다. 전국 제일의 딸기
농사도 돌보아야 하니 남녀 모두 쉴 틈이 없다.
김병만 대표(73)는 “모두 조상의 음덕”이라며 사람 좋게 웃는다. 마을 앞 넓은 체험마당 한켠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체험교실
벽에 붙여놓은 각종 행사와 표창, 수상 사진들이 개실마을의 명성과 위상을 증명한다.
◆점필재와 개실마을의 인연
개실마을은 350여년 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들이 자리를 잡은 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이곳은 도시민에게 여가선용과 농촌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개실마을 중앙에 위치한 점필재 종택. 종택은 마을 뒷산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 개실마을의 선조는 바로 조선 사림의 종주로 추앙받는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다. 점필재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고 밀양에서 사망했다. 생가도 묘소도 밀양에 있다. 그런데도 찾는 이들이 몰려드는 것은 종택이 있고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점필재의 학덕과 문재를 전해받고 이 가문의 충절과 효도를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잉어배미에는 김종직 선생의 10세손인 김문정의 효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개실마을 입구의 비석 중에는 ‘김씨오세효행사적비’가 있다. 점필재의 효행도 본받을만하거니와 그의 8세손부터 12세손까지
5대 후손의 효행이 사연을 들어보면 소설 수준이어서 그 비를 세워 뜻을 기렸다. 한 명의 효자도 장하거니와 내리 5대에 걸쳐
효자가 나온 것은 이 집안의 내력을 보여주는 객관적 증빙자료다. 효행비가 자랑스러운 이유다.
그 중 10세손 죽헌 김문정은 어머니가 병이 나서 꿩고기 산적을 바라니 꿩이 스스로 주방에 날아들었고 잉어회를 바라니
갑자기 연못에서 잉어가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에서 400m 가면 이출지라는 잉어가 뛰어 오른 연못이 낡은
표지판을 이마에 꼽고 있다. 점필재 자신은 어머니의 병환을 들어 지방 외직을 자청했고 선산부사로 재직 중 모친상을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3년을 묘 옆에서 띠집을 짓고 지내 주위 모두 탄복하며 효성을 칭송했다고 후손들은 말한다.
점필재의 아버지 강호 김숙자는 고령 현감을 지냈다. 그는 포은 정몽주의 학맥을 이어받은 야은 길재의 직계 제자다.
그러니 점필재는 학맥으로는 포은의 맥을 잇고 그의 제자가 정여창, 김굉필 등 신진사림을 거쳐 조광조 등에 이르면서
조선 사림을 총망라하니 그를 성리학을 일으키고 곧추세운 사림의 대표로 추앙하는 것이다.
선산김씨 가문을 망하게 하고 온 나라 조선을 피로 물들인 무오사화의 단초로 역사에서는 점필재가 27살 젊은 시절 쓴
조의제문을 든다.
조의제문에서 그는 “땅이 서로 만리나 떨어져 있고 세대의 선후 또한 천여년이나 되었는데도 꿈자리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상서로운 일인가” 했다. 초패왕 항우가 초 회왕을 살해한 것은 시간적으로 1,500여년 전, 공간적으로도
천리 밖 중국땅이었는데 왜 자신에게 ‘필’이 꽂혔을까 의문을 제기하며 그 인연을 강조한다.
점필재가 이 글을 쓴 때가 세조 3년이었고 2년 뒤 점필재는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나선다. 그 글이 41년 뒤인 1498년
문제가 돼 이미 죽은 지 6년이 지난 점필재는 부관참시 당한다. 정경부인 남평문씨는 전라도 남원으로 쫓겨 가고 하나 남은
아들 김숭년은 어린 나이(당시 13세)여서 화를 면해 합천 야로에 안치된다. 야로는 고령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지만
쇠(金=쇠)를 녹이는 대장간 풀무여서 점필재의 씨를 말리려 한 것이라고 후손들은 글자를 풀어 해석했다.
김종직 선생 가문에 내려오는 국가로부터 받은 교지.
중종반정으로 점필재는 복권되고 아들 숭년도 벼슬길에 나섰지만 한 번 기울어진 가세는 일어서지 못했다. 집단 트라우마일
것이다. 잇달아 사화가 일어나고 임진란까지 겪게 되면서 후손들은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다가 점필재의 6세손
김수휘가 이곳 개실에 자리를 잡는다.
◆가난한 양반가문, 도적굴 이야기
마을기업 뒷산에 위치한 ‘도적굴’. 도적굴은 개실마을 뒷산인 화개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됐지만 이 마을의 가난은 업보였다. 사화로 멸문의 화를 당한 뒤 후손들은 높은 벼슬도 많은 재물도
오히려 불안했던 것일까. 이 마을에서 터를 잡고는 양반으로서 선비로서 체신을 지키면서 오순도순 굶지 않고 효도하고
우애있게 살아가는 것으로 자족했던 모양이다. 이런 안타까움이 도적굴의 설화가 뒷받침한다. 마을 뒷산, 나지막한 화개산을
30분쯤 오르면 만나는 정상에 대여섯평쯤 되는 ‘도적굴’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도적굴의 내용은 이렇다.
/개실 마을에 터를 잡은 남계 김수휘에게 어느 날 밤 꿈에 의적을 자처하는 자가 찾아 와 절을 하고는 말한다.
“나으리, 선대에 사화를 당한 뒤 임진란을 겪으면서 가세 몰락하여 인고의 세월이 얼마이십니까? 저희들이 수탈하여
감추어놓은 금화가 뒷산 서쪽 굴 속에 있으니 나으리 가문에 요긴하게 써주시면 저희들은 개과천선하여 양민으로 돌아가
살겠습니다.” 놀라 잠에서 깬 남계공이 하인을 시켜 살펴보라 하니 과연 뒷산에 굴이 있고 금화가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설화는 여기까지. 남계공이 관아에 금화가 있다는 사실을 고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만 그 금화를 가지고 부를 일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사화로 가문이 몰락했고 비록 신원이 되고 복권이 되었다고는 하나 쓰러진 가문을 일으키기에는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이다. 오죽 살기 힘들었으면, 또 얼마나 금화에 대한 소원이 간절했으면 이런 도적굴 설화가 생겼을까. 그러나
그 도적굴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자손들이 지금도 떳떳이 살아가고 있음은 모두 조상의 음덕이라고 후손들은 말한다.

이경우 언론인
전국의 학생들, 점필재 학덕 배우기 위해 줄이어 방문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은 인연
1500년 전의 항우를 비난한 조의제문은 천리밖 조선에 피바람을 몰고 왔고 그 후손들에게 질곡의 삶을 안겼지만 다시 500여년
뒤인 지금에 와서는 그 후손들에게 조상의 이름으로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생각하니 우연 치고는
묘한 인연이다.
글로써 망한 가문 후손들의 트라우마. “그러니 벼슬길에 함부로 나서지 말아라.” “그냥 적당히 먹고 살아라. 큰 욕심을 부리지
말아라.” 그렇게 350년을 살아왔다고 후손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이제 점필재와 조상들의 정신을 어어 받아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앞서가는 마을로 탈바꿈했다. 경제적으로도 자리를 잡았다. 24일엔 마을에 큰 잔치가 벌어진다. 이 마을 점필재 후손
2명이 이번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고령군이 들썩이도록 한 판 동네잔치를 열 것이라고 후손들은 자랑한다.
전국에서 수많은 선남선녀들, 점필재의 학덕과 문재를 흠모하고 그 기개와 절의를 숭상하는 어린 학생들은 선산김씨 가문의
충효를 본받고자 줄지어 개실마을을 찾는다. 그리고 점필재와 시공을 뛰어 넘는 또 다른 인연을 만들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