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 배달국시대 복희에 의한 서쪽변방의 마지막 오지인 '중원-진(陳)'으로의 진출과 고고학상의 해당 시기 (배달국 건국이후 치우천왕이전까지 배달국 지역별 문화의 고고학적 분류)
1. 유소씨와 수인씨 부족이 일으킨 '묘저구(廟底溝)문화'
최근까지 고고학적 발굴로 앙소문화의 중심이라는 묘저구문화가 위치한 곳 즉 고대로부터 차이나인들이 문명의 발상지이며 중심이라 여겨온 중원(中原)은 실상은 문명이 발생한 곳이 아니라, 고대문명이 최후로 전파된 문명의 마지막 오지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신석기 후기와 동석병용기의 고대 시원문명들은 모두 북방의 초원지대에 접한 몽골 동부지역의 산악지역과 대륙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처음 등장하였고, 점차 현재의 대륙안쪽으로 문화가 전파되어 들어갔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B.C 7,000년경으로 소급되는 선홍산문명인 '소하서문화'로부터 '흥룡와문화'와 '사해문화'와 '부하문화'와 '조보구문화'를 거쳐 '홍산문화'로 이어지는 고대시원문명과 선홍산문화인 '소하서문화'보다 시기는 약간 늦지만 역시 시원문화라 할만큼 연대가 올라가는 산동지역의 후리문화(后李文化), 북신문화(北辛文化),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와 장강하류의 여러문화들이 지금까지의 잘못된 역사인식과는 반대로 B.C 4,000년경에나 등장하는 내륙의 '중원'이라는 지역-묘저구(廟底溝)문화-으로 그 앞선 선진문화를 전파하였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더구나, 묘저구(廟底溝)문화와 그들이 융적이라 하던 이들의 마가요문화와 반파(半坡)문화를 앙소문화라는 개념으로 함께 묶어버려 자신들의 문명등장의 연대를 끌어올리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자 무임승차했던 것과 달리 하남과 산서의 경계인접지역들인 '중원'이라는 지역의 최대로 올라갈수있는 연대의 상한선이 바로 묘저구문화의 등장시기인 BC4000년경인 것이다. 물론, 묘저구(廟底溝)문화의 주인공들도 아직 탄생하지도 않은 화하족이 아니었지만....
지나인들이 무리하여 임의로 묶어버린 앙소문화라는 개념보다 원래대로 나누어 구분하는 것이 각 문화의 성격과 주체 그리고 각 문화들의 후예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홍산문화는 배달국이 세워지기전인 B.C 4,500년경부터 그 문화가 번성하였으며 사서로는 BC3900년경으로 언급하는 북방의 환웅의 세력이 유입된 이후에는 급속히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서 B.C 3,500년경에는 홍산문화후기(B.C 3,500~B.C 3,000)의 우하량유적지에서 보여주듯이 원방각의 거대한 제단과 여신묘와 적석총등을 갖추어 늦어도 이 시기에는 학자들이 초기 국가단계라고도 언급되는 단계로 진입하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최근의 계속적인 홍산문화발굴로 2006년 6월에는 적봉시 오한기 사가자 초모산 유적지에서는 BC5500년경의 적석총군이 발견되어 어디까지 연대가 올라갈지 모를 정도이니, 태백일사등의 사서에서 말하는 환웅이 B.C 3,896년에 신시(=배달국=구리)를 세웠다는 기록에 대해서 강단에서도 이제 긍정의 시각으로 다시 해석해볼 여지가 충분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중원'이라는 지역의 최초의 문화인 '묘저구문화'는 B.C 4,000 ~ B.C 3,000년간 지속된 문화로 그 문화의 출발을 이룬 세력은 삼성기나 태백일사의 기록에 따르면 환웅이 동으로 이동할 때 환웅의 무리에서 나뉘어져 같은 시기 서쪽의 감숙,청해 일대에 정착한 반고-반고가한이라 한다. 이를 따른 제부족들의 후예로 바로 그 부족들 중의 일부인 유소씨와 수인(유수)씨 부족이 동쪽으로 진출하여 마지막 오지인 중원지역의 첫 문화인 '묘저구문화'의 주인이 된 것이라 하였다.
고고학 발굴에 따른 연대로 보면 반고-반고가한의 제부족들이 이룬 세 문화의 시기중 '묘저구문화'만 유독 늦다. 반파(半坡)문화와 마가요문화는 그 시기가 B.C 4,800 ~ B.C 4,200년인데 반하여 '묘저구(廟底溝)문화'는 B.C 4,000 ~ B.C 3,000년이니 고고학적으로도 묘저구문화는 상당히 뒤늦게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감숙-청해일대와 섬서일대에서 번성하였고 마지막으로 하남-산서접경지역에 진출한 '반고'가 이끈 세력은 후대에는 서융,강융이라 칭해졌지만, 원래는 환웅의 부족으로 환웅의 세력이 동진하여 이동할때 환웅의 무리에서 나뉘어 중도에서 따로 정착한 무리라 보는 것이 맞지 않은가 한다.
또한, 이들도 같은 환웅에게서 갈라져나온 세력으로 환웅이 세운 배달국과 연결되면서 다시 환국의 일원이 되었다고 보이며 연맹하거나 혹은 자립하여 서로 자유롭게 교류하였다고 생각된다
2. 복희씨의 진(陳) 진출과 배달국 용산문화로의 편입 중국의 시조인 3황5제의 첫째로 꼽히는 태호복희는 배달국 5대 태우의환웅의 막내 아들이다. 황제헌원과 염제신농도 그 근본을 따지면 동이의 후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지나족들은 동이에서 갈라져 나간 일개 가지에 불과하다.
B.C 4,000년 경에 동진해 온 유소씨와 수인씨 부족이 일으킨 '묘저구(廟底溝)문화'의 지역 안인 진(陳)은 <태백일사>에서 인용한 <삼한비기>기록에 따르면, 점차로 수인씨가 이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배달국(=구리)의 세력이 점차로 내륙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B.C 3,500년경에 새로운 세력인 '복희'가 청구와 낙랑을 거쳐 이 일대에 봉토를 받고 들어와 관직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하여 무기를 쓰지 않고 감화시켜 수인씨의 수장을 대신하여 진(陳)과 그 인근밖에까지 세를 넓히어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묘저구(廟底溝)문화'는 그 땅인 진(陳)일대가 처음에는 수인씨 중간에는 '복희'로 바뀌었으니 마가요문화나 혹은 반파(半坡)문화와는 묶어서 볼 수 없고 별도로 나누어 보아야 할 것이다.
<삼한비기>의 복희의 기록에 뒤이어 말하길 "뒤에 갈고한웅이 있었는데, 신농의 나라와 구역의 경계를 확정하여 공상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고 하였다. (B.C 3,070년경)
신농의 나라라는 것은 바로 섬서일대의 '반파(半坡)문화'의 이어지는 후속문화로 이 기록은 배달국(=구리)의 '복희'가 직(職)을 충실히 수행해 '묘저구(廟底溝)문화' 일대를 교화하자 세월이 흐르며 자연히 배달국에 하남북변지역인 '묘저구(廟底溝)문명' 일대가 귀속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농의 나라인 섬서일대의 '반파(半坡)문화' 지역과 배달국에 완전히 편입된 하남 북변일대의 '묘저구(廟底溝)문화' 지역 일대가 '공상'을 경계로 삼아 배달국과 염제신농의 나라가 확실히 국계를 정하였다는 것이다.
사서에서 말하는 신농이 등장하는 B.C 3,070년은 고고학적으로 대문구(大汶口) 문화[B.C 4,300 ~ B.C 2,600]의 후기에 함께 공존하며 등장한 용산문화(龍山文化) [B.C 3,000 ~ B.C 2,000]가 출발한 시기이다. 그 문화지역은 용산(龍山) 흑도(黑陶)가 분포하는 하남성[河南省]북부, 안휘성[安徽省], 동북부의 산동[山東]지역까지 분포되어 이전의 '묘저구(廟底溝)문화'지역까지 아우르고 있어, B.C 3,000년이후에는 묘저구문화지역이 용산문화(龍山文化)에 흡수되므로 복희가 교화하여 진(陳)의 안팎과 묘저구문화지역을 B.C 3,070년 이후에는 완전히 배달국의 영토로 귀속시켜 공상을 국경으로 하였다는 태백일사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추가로, 용산문화(龍山文化) 유적이 발굴된 산동성내 위치는 제남시(濟南市) 용산진(龍山鎮) 성자애(城子崖) 유적지로 태산의 남쪽 태안산맥의 남쪽인 태안이 중심인 대문구문화와 달리 태안산맥 북쪽 평원지대라는 점도 두 문화가 공존한 시기를 감안할 때 참조할 만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용산문화(龍山文化)는 전기(B.C 3,000 ~ B.C 2,600)와 후기(B.C 2,600 ~ 2,000)로 구분되며, 이 용산문화(龍山文化)는 섬서성 지역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해당문화지역은 크게 아래와 같이 하남, 섬서, 산동으로 구분한다. “龍山文化は、중원中原 龍山文化(하남河南 龍山文化と섬서陝西 龍山文化)および 산동山東 龍山文化に分かれている。 (위키피디아, 일본어)”
시기적으로 중간쯤인 B.C 2,600년 무렵에 섬서(陝西)지역까지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지역이 확장되었음을 아래책에서 알 수 있으며, 이는 B.C 2,706년에 즉위한 치우천왕이 섬서(陝西)일대의 '반파(半坡)문명'의 후신인 염제신농의 나라의 ‘유망’의 정권이 쇠약해지자 그 땅(섬서(陝西) 용산문화지역)을 정복하고 서쪽의 ‘헌원’과 마가요문명‘의 후신을 굴복시켰다는 <태백일사>의 <신시본기>기록과도 고고학적 년대측정의 편차를 감안하고 새로운 문화의 정착시간을 고려할때 시기가 일치하여 일맥상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For example middle reaches of the Jing River and Wei River(渭河) evince settlement known as the Shaanxi Longshan(陝西龍山).” (Kwang-chih Chang, "The Formation of Chinese Civilization: An Archaeological Perspective", 2005, Yale University Press, 384 pages ISBN 0300093829: 위키피디아 영어)
3. 치우천왕의 패권전쟁과 배달국 편입
이와같이, 공상을 경계로 한 무렵인 BC 3,000년경부터는 남쪽의 산동일대로 배달국(=구리)의 백성들이 많이 내려와 정착하여 용산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배달국의 중심을 완전히 청구로 옮긴 용산문화의 본격적인 주인공 치우천왕의 치세까지도 차이나가 말하는 '화하족'은 등장은 커녕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BC 2,700년경 이후에 등장하여 동이(東夷)의 치우천왕과 대립한 헌원세력도 옛 대이동시에 한웅에게서 갈라져 나온 반고세력의 후예가 세운 마가요문화의 후속문화중 한 세력으로 굳이 구분하자면 후대에 서융이나 융적으로 칭해지는 세력으로 흡수되었다고 분류하여야 하며 후대의 '화하족'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된다.
치우천왕과의 유망세력의 땅인 섬서지역을 둘러싼 패권전쟁에서 마가요문화측의 헌원측이 패전하면서 섬서지역은 반고세력의 후예가 아닌 배달국(=구리)으로 편입됨에 따라 섬서지역도 용산문화가 전파되어 B.C 2,600년경이후로는 용산문화지역으로 귀속되어 '섬서용산문화' 지역으로 불리게 된다.
'화하족'은 용산문화 만기(B.C 2,600 ~ 2,000)의 후반에 이르러서 단군조선의 치세에 옛 묘저구(廟底溝)문화 지역에서 인근의 수장이던 ‘요’가 등장하여 ‘오교’를 제창하여 단군의 ‘신교’와 대립하면서 동이(東夷)의 백성중 ‘오교’를 따르는 이들이 생겨나 그들이 ‘요’를 임금으로 받들어 분립하면서 종교적 정체성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갈라져나오는 동이(東夷)의 방계로 옛 묘저구(廟底溝)문화의 후예들에 포함된다 보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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