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海美)
바다 해(海) 아름다울 미(美) 얼마나 아름다운 고을 이름인가!!
필자가 태어난 고장의 이름이다. 서해바다 인근의 내포고을,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인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칭한다고 했다. 내포란 가야산을 중심으로 서쪽은 큰 바다가 북쪽은 큰 만이 동쪽은 큰 평야가 남쪽을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하면서 내포의 비옥한 평야 중심에 가야산이 위치해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곳에서 제일 해당되는 지역이 해미라고 생각한다.^^
시(서산) 소재지로부터 동쪽 12km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예산군 덕산면, 남으로는 고북면, 북으로는 운산면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광활한 서해바다가 위치해 있다. 서산과 태안의 관문인 서해안 고속도로 해미IC와 국도 29(보성~서산)번과 45(해미~가평)번이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옛 지명은 백제의 여촌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여읍으로 고쳐 혜성군(지금의 면천군)의 영현(하나의 관청)이였으며 그 뒤 940년(고려 태조 23)에 여미로 고쳤고 현종 때 홍주(지금의 홍성)의 영현으로 옮겼다. 조선 태종 때 정해현과 여미현을 합쳐서 해미(海美)라 부르게 되었는데 여미현의 위치는 오늘날 어느 곳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1407년(태종7년)의 기록에 의하면 정해현의 위치는 오늘날의 해미면사무소에서 서북으로 1㎞ 지점인 구해미라고 부르는 곳에 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필자가 태어난 동네인 반양리라고 한다. 반양초등학교 뒷산을 우리는 당산이라고 하며 정상에 오르면 산성이 있는데 이곳이 해당된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도 10개월간 군관으로 있을 때 당산 망루에서 해미읍성까지 말을 달였다고 어릴 적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해미는 북에서 남으로 길게 이어진 가야산을 중심으로 황락, 산수계곡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일락산에 위치한 천년 고찰 일락사와 조선 초기에 건립한 오학리 향교, 해미읍성을 지킨다는 동서남북 4개의 미륵불, 1866년(병인)년 천주교 순교지인 해미읍성과 순교성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6월 초 해미읍성 역사체험 축제가 열리고 있다. 또 하나 요즘 유행하는 수평으로의 등산길인 서산 아라메길(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메”를 합친 이름) 1구간이 2010년7월에 개통되어 많은 등산객들이 찾고 있다. 수많은 문화유산과 더불어 서해바다와 내포평야에서 나오는 풍부한 자원 등이 있는 내 고향 해미!! 자 이제 해미 속으로 들어가보자.
당산:오학산(해발182.9m: 해미면 반양리, 오학리, 동암리에 위치)
답사일 : 2012년01월23일
당산은 우리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이다. 가야산에서 서북방향으로 가지 쳐 내려온 산세가 해미읍성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봉우리를 하나 세우고 우리동네 품에 안착이 된 산으로서 정상에는 타원형으로 조성된 성터(동서 210m, 남북 120m, 성 둘레 650m)가 남아 있고 그 위를 돌아보면 동쪽으로 가야산의 웅장한 산세가 올려다 보이며 서쪽으로는 내포의 기름진 평야에 이어 서해바다가 평화롭게 내려다보인다. 초등학교를 5년간 해미로 다니다 반양초등학교가 생기며 일년 동안 학교뒷산인 당산의 정기를 받으며 많이도 오르내림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친밀감이 생기며 중학교 때에도 겨울이면 선생님들과 토끼몰이도 많이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연유로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당산 초입에 있는 선산에 들려 성묘를 한 후 오랜만에 당산에 올라보니 예전의 모습에서 많이도 변해 있다. 산 정상에는 팔각정이 들어 서 있고 중앙에는 습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더크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 이제는 해미읍에서도 등산객(?)이 많이 올라온다고 한다. 반양 초등학교 쪽에서 시작하여 능선으로 산행이 가능하며 관유리 방향으로 하산하는 아기자기한 2시간 코스의 등산로가 있다. 성터는 예전 그대로이며 발길 가는 방향에서 내려다보는 재미가 솔솔 하다. 서쪽 기지리 쪽을 내려다 보노라면 늦가을 밤 또는 이른 아침 물안개 피어나는 드넓은 들녘이 아스라하게 기억 속에서 떠오른다. 몇 년 전 알고 지내던 지인도 해미의 물안개가 그렇게 멋지다며 힘들 때 찾던 곳인데 요즘은 가본지 오래라고 하기에 지금은 비행장이 들어서서 그 멋진 풍경을 볼 수 없다고 하니까 아쉬운 모습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동쪽 방향으로 자리를 이동, 가야산 아래 질주하는 고속도로의 차량들을 내려다 본다. 굉음을 내며 설날 아침을 달리고 있는 모습은 이순신 장군이 당산 산성에서 말에 올라 읍성으로 달리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눈 싸인 읍성을 바라보며 지난해 5월 어머님을 모시고 와이프와 풍물놀이패 구경도 하고 미장원에 같이 가 고부간에 파마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해미읍성(사적 제 26호 : 충남 서산군 해미면 읍내리 위치)
답사일 : 2011년 05월 08일
5월8일 일요일 아침 어머니를 뵙기 위하여 새벽부터 분주하다. 해미에 도착, 다친 팔이 완쾌가 안되어 온수찜질이 좋다고 하여 인근에 있는 덕산온천에 모셔다 드리고 짬을 내어 해미읍성으로 답사를 간다. 어렸을 때 기억은 성 안 여기저기 탱자나무로 담을 대신한 주택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탱자성으로 불리던 해미읍성은 평지에 축성한 성이다. 해안방비를 목적으로 조선 성종 22년(1491년)에 축성되었으며, 그 당시 850여명이 넘는 대 병력이 주둔 충청도의 병권 지휘소 역할을 하다 효종2년(1651년) 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호서좌영을 설치하고 무장이 현감으로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병권을 겸하여 관장하였으며 이순신 장군도 이 성에서 선조 12년(1578)에 훈련원봉사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다. 읍지의 기록에는 성의 둘레가 6,630척, 높이 13척, 치성이 380첩, 옹성이 두 곳, 남문(진남문)은 3칸이며 홍예(문 윗부분이 무지개 형)문 형식이며 2층의 다락을 지었으며 동문(잠양루), 서문(지성루)도 3칸이나 북문은 없고 우물이 여섯 군데이며 성밖에 호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0년 초 성내에 위치해 있는 면사무소와 우체국 그리고 국민학교(초등학교)등 관공서와 주택들을 이주, 철거하고 1973년부터 1981년까지 복원사업을 실시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복원하게 된 동기는 이순신 장군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해미읍성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진남문에 도착, 파수꾼 복장을 한 두 분을 발견한다. 면 민들이 도우미 형식으로 번갈아 가며 근무를 한다고…… 읍성의 남쪽에 위치한 이문은 화강암으로 만든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의 단층(내부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음) 문루이다. 읍성에 있는 세 개의 문들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 등하교길에 지나다니던 추억을 더듬어 보며 성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이 변해 있는 내부는 햇살이 작열하지만 우측으로 노란색의 유채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떼지어 움직이는 모습이 활기차 보인다. 성문 바로 앞 그러니까 우체국자리에 안내사무실이 있어 관광도우미를 신청하면 읍성에 대하여 설명해주는 관광해설 도우미가 대기하고 있다. 입구에 비치해 놓은 안내 책자만 한 권 들고 초등학교 시절 본교사와 동(東)교사로 구분되었던 곳까지 걸음을 옮긴다. 우측으로는 역사의 증인이 된 호야(회화나무의 충청도 사투리)나무가 한 많은 세월과 풍파에 야위어진 모습으로 세상을 내려다 본다. 조선 말 천주교 탄압 당시에 이 나무에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채를 철사 줄로 묶어서 달아놓고 고문을 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나무에 자세히 보면 고정해 놓았던 못도 있었으며 초등학교 당시까지 핏자국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의 답사자료는 뒤에 천주교 순교지 답사기록에 자세히 기록할 것이고 아직도 그 고통의 흔적과 역사가 배어 있는 나무는 사시사철 그때의 슬픈 역사를 말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호야나무를 끼고 세워져 있는 감옥 터의 살벌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관광객들만 무심코 기웃거린다. 공허한 마음으로 민속놀이터를 지나 조선시대 살아가는 모습을 재현한 초가집에 도착, 돗자리며 초롱이 등을 제작하여 공예품으로 전시 및 판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웃동네 어르신들이다. 잠시 휴식 겸 마루에 앉아 안부며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면사무소가 위치해있던 동헌이 바라보이는 곳으로 이동한다. 정문 우측으로는 1977년도 최규하국무총리가 방문하여 성 내부 복원 정리작업 중 경외로 반출되는 것을 보고 매입하여 그 자리에 있게 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다. 지금도 변함없이 건강한 이 나무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정문에서 면사무소까지 50메타 정도 되는 도로 가에 가을이면 노란 잎으로 가득 채웠던 그 많던 나무들을 회상하며 동헌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뒷산으로 길을 잡는다. 우측으로 돌계단을 올라서서 전망이 좋은 사각정자(청허정)가 세워 진 곳에 도착, 잠시 휴식을 하며 어릴 적 이곳에서 방과 후 전쟁놀이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뛰어 놀던 추억들을 회상해 본다. 보고 싶다 사무치도록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객지 생활에 고향친구들은 온데간데 없고 오십이 잔득 넘은 중년에서야 고향을 느끼겠다고 덤벙대는 한 필부를 생각하니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제라도 찾아봐야겠다는 마음을 뒤로 성곽을 걷기 위하여 자연생태공원으로 조성된 금강송 숲으로 진행 한다. 먼발치에 부부가 정답게 걸어오는 모습은 한편의 영화처럼 느껴지며 성곽에 도착하여 봄기운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전원풍경을 바라보고 좌측 서문 방향으로 돌아 유채꽃 만발한 서문에 내려선다. 새로이 단장해 놓은 이곳은 문루가 없이 무너진 돌담처럼 넘어다니던 곳인데 1974년에 동문과 같이 서문도 복원되어 있다. 넓은 성안에는 문화행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뒤로 시간이 되어 온천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다시 성으로 들어 와 농악 패의 흥겨운 공연을 관람 후 며느리와 둘만의 데이트 시간을 주고 필자는 해미성지순교 기념관으로 차를 달린다.
※교통 및 숙식
대중교통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 06:30분부터 19:10분까지 9회 배차가 되어 있으며 서산으로 출발하는 시외버스는 06:30분부터 20:00분까지 수시로 있음. 해미행 승차시간이 맞지 않으면 서산행 이용, 서산버스터미널에서 수시로 출발하는 해미행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더 편리하다.
자가교통
서해안고속도로 이용 해미 톨게이트로 나오면 됨.
숙식
금강여관(041-688-2023), 자연산장(011-356-0272)
진영여인숙(688-2100), 미르장(688-1819), 그린파크(688-6633)
시장순대(668-4370), 영성각(688-2047), 설악가든(688-7766)
서울설렁탕(688-1817), 산수매운탕(688-2231), 가야가든(688-6891)
신선대(688-1341), 향수가든(688-3757), 한일장(688-4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