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화 시집 {체리나무가 있는 풍경} 출간
박수화朴秀華 시인은 경남 김해에서 출생했고, 숙명여자대학교 아동복지학과을 졸업했으며, 2004년 <평화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새에게 길을 묻다』(2005),『물방울의 여행』(2008) 있고, 현재 시와시학회・숙명문인회・한국가톨릭문인회. <육사신보>‘화랑문예전’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수화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인 {체리나무가 있는 풍경}는 아주 소박한 언어를 쓰여져 있다. 유행하는 언어의 유희도 없고 이미지의 현란한 변용도 별로 없다. 하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때묻지 않은 언어 원형의 힘에 기대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그는 삶에서 자연에서 그리고 앞서 이루어진 수많은 예술 작품들 속에 잠재해 있는 정신의 기미를 포착한다. 마치 지문을 채취하여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듯이. 시는 바로 이 정신의 지문을 찾는 일이고 기록하는 일이다. 이 작업이 계속되고 더욱 정밀해져서 박수화 시인의 시구 하나하나가 새로운 정신의 열매로 다시 피어나길 기대해 본다.
알프스 자락의 아름다운 도시로 간다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와 산간도로 길목엔
아직 오월 봄눈이 목화솜 더미더미 쌓여 있다
인스부르크에 가까울수록 숲은 더 푸르러지고
체리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휴식을 취하고
이슬이슬 비에 젖는다, 이 고요한
도시가 우리를 두 팔 벌려 반겨주는가
인스부르크의 화려한 황금지붕을 만나며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를 걸으며
주렁주렁 체리 열매로 어여쁜,
열여섯 자녀를 낳았다는 오월의
풍만한 생기를 가진 그녀,
그녀의 길을 따라 나도 걷고 있다
- 「체리나무가 있는 풍경을 지나」 전문
유럽은 근대 문명의 발상지다. 그들이 만든 기계문명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지금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시인은 바로 거기에 여행을 가서 그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찬란한 도시의 야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를 수놓고 있는 체리나무를 주목한다. 또 다른 삶이 “우리를 두 팔 벌려 반겨주”거나 “풍만한 생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바로 살아있는 자연을 통해서이다. 사실 이 시는 섬세한 묘사나 비유를 통해 예리한 시적 심상을 보여주는 시는 아니다. 여행에서 눈에 띄는 사물을 제시하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소감을 담백하게 노래한 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앞서 설명한 자연의 생기를 날 것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문명 속에서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 문명 속에서 찌들리지 않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자연을 표현하는 생기 있는 언어의 힘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여행이란 도시 안에 존재하는 자연과 그 자연을 다시 일깨우는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사라짐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문명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더 나아가 더 많은 욕망을 계속 추구하기 위해 영원한 생명까지도 얻으려 한다. 영원한 천국을 꿈꾸는 종교나 영원불멸의 생명을 꿈꾸는 현대 과학이 이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에게 사라짐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 시가 이를 아주 잘 말해준다.
-베네치아, 100년 후 물에 잠길 수 있다고
비가 쏟아지면 바닷물이 역류,
장화를 신고 걸어 다녀야 한다고-
물에 잠겨 이끼 낀 집들 사이
저어저어 곤돌라가 풍경으로 사라진다
봄비 내리는 날
괴테가 묵었다는 호텔 앞으로
지나간다, 곤돌라가 비 젖어
그의 우직한 흔적처럼 묶여 있다
선착장 지나 들뜬 사람들 마음을
모아 담아 수상택시가 내달려가고
...(중략)...
너도 나도 언젠가 사라지리라,
지구의 가슴이 자꾸 더워 오르고
하르르 빙하가 봄눈 녹듯 녹아내리고
점점 바닷물이 차올라 이 도시도
작은 섬처럼 흔적들조차 유빙으로 사라지리라
- 「사라진다」 부분
시인은 베네치아 여행을 통해 사라짐의 철학을 깨닫는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고 이 아름다운 베네치아도 조금씩 물에 잠겨 사라질 것을 예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기에 이 사라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직 영원한 것은 이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할 언어일 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에 숨겨져 있는 이 언어의 흔적들을 찾아 나선다.
---박수화 시집 {체리나무가 있는 풍경}, 도서출판 지혜, 양장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