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인간의 역사 이전의 저 수천 년을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바로 형벌에 의해서만 죄책감의 발달이 가장 강력하게 억제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적어도 형벌의 강권强勸 발동을 받은 희생자에 관한 한 그렇다. 범죄자가 재판절차나 집행수속을 실제로 목격함으로써, 얼마나 자기 행위와 행실을 그 자체로서 비난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데 방해받게 되는가 하는 점을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범죄자는 자기와 똑같은 행실이 정의를 위해서 행해지고 시인될 뿐만 아니라 양심의 가책없이 행해지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즉 간첩행위, 사기, 매수, 모함, 경찰과 검찰이 수작하는 교활하고 은밀한 책략의 전체, 게다가 또한 각양각색의 형벌의 특이한 점을 감정상으론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원칙적으로는 허용되는 강탈, 폭력, 중상, 감금, 고문, 살해 등----이 모든 것은 결코 재판관들이 그 자체로서 비난하거나 처벌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그 행동들이 어떤 특수한 목적에서 이용되고 고려될 뿐이라는 것을 범죄자들이 보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이라고 하는 지상의 식물 중에서도 가장 괴기스럽고 흥미로운 이 식물은 결코 이와 같은 형벌의 토양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다. 사실 극히 오랫동안 재판관과 형집행자들 자신도 자기들이 ‘죄인’을 다루고 있다고는 결코 의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이 다룬 대상은 손해를 야기시킨 자, 책임이 없는 하나의 숙명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후에 형벌이 또다시 하나의 숙명처럼 희생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 그로서는 아무런 ‘내적인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다만 예측치 못했던 사건, 어떤 무서운 자연현상이 돌발했을 때와 같은 느낌, 바위덩이가 무너져 내려 어쩔 수 없이 짓눌리게 되는 것 같은 느낌밖에는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에서
언제, 어느 때나 교활하고 음흉하며 이성의 간계로써 불법과 탈법을 일삼으며, 사회적-문화적 영웅의 탈을 쓰고 있는 자들이야말로 소위 성공한 자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정의는 강자의 편이고, 강자가 하는 일은 그 무엇이든지 다 옳기만 한 것이다. 상속세와 증여세를 탈세하고, 위장계열사를 통해서 자금세탁을 해도 무죄가 되고, 내부거래를 하거나 주가조작을 통하여 그토록 엄청난 부를 축적해도 무죄가 된다. 국회청문회나 국정감사현장에서 위증을 하거나 불참을 해도 무죄가 되고, 사사건건 지역구 민원을 빙자하여 수많은 뇌물을 챙겨 먹어도 무죄가 된다.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 빠졌다가 돌아와 허위보고서를 제출해도 무죄가 되고,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하여 표절을 해도 무죄가 된다. 대형교회 목사의 성추행이나 사기 사건도 무죄가 되고, 전관예우를 받는 자가 전화변론을 통해서 수백 억원씩 벌어 먹어도 무죄가 된다. 언제, 어느 때나 탈법과 불법을 일 삼을 권리는 강자에게 있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사회적 약자의 죄는 반사회적인 파렴치범의 죄가 되고, 사회적 강자의 죄는 어쩌다가 우연히 실수로 저지른 죄가 된다. 사회적 약자의 죄는 일벌백계로 다스려지고, 사회적 강자의 죄는 무한한 관용의 미덕----기소유예나 사면복권 등----으로 다스려진다. 한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불의이며, 죄를 짓지 않는다면 약육강식의 체계가 무너져버리게 될는지도 모른다. 죄를 짓고 또 죄를 짓지 않으면 우리 공무원들, 우리 경찰들, 우리 검찰들, 우리 판사들, 우리 국회의원들, 우리 장관들의 밥벌이가 보장되지를 않으며, 그들의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될는지도 모른다. 경찰과 검찰은 범죄의 피의자들보다도 더욱더 교활하고 파렴치한 사기꾼들이며, 지옥이 만원이라고 해도 지옥에 가게 될 대악당들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범죄자는 자기와 똑같은 행실이 정의를 위해서 행해지고 시인될 뿐만 아니라 양심의 가책없이 행해지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즉 간첩행위, 사기, 매수, 모함, 경찰과 검찰이 수작하는 교활하고 은밀한 책략의 전체, 게다가 또한 각양각색의 형벌의 특이한 점을 감정상으론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원칙적으로는 허용되는 강탈, 폭력, 중상, 감금, 고문, 살해 등----이 모든 것은 결코 재판관들이 그 자체로서 비난하거나 처벌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그 행동들이 어떤 특수한 목적에서 이용되고 고려될 뿐이라는 것을 범죄자들이 보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의와 불의, 법과 불법, 선과 악, 위선과 양심 따위는 도덕이나 법률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며, 그것에 대한 정의는 매우 자의적이고, 불명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타인의 빵을 빼앗아 먹을 수도 있고, 반드시, 꼭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이웃 집 담장을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정부와 정부간의 이해와 그 갈등을 조정하기 위하여 법률을 제정했던 것이고, 그 모든 권력을 국가에게 일임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이 권력의 힘으로 죄책감, 즉, ‘양심의 가책’이라는 이념을 그토록 끈질기고 집요하게 주입시켜왔던 것이다. 비록, 굶어 죽게 되었을지라도 타인의 빵을 빼앗아서는 안 되고, 제 아무리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 타인의 빵을 빼앗은 것도 너의 잘못이고, 타인의 물건을 훔친 것도 너의 잘못이다. 따라서 공동체 사회가 너에게 형벌을 부과하기 이전에, 네 스스로 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면 결코 용서를 하지 않게 된다. 바로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며, 이 양심의 가책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물어뜯어야만 하는 반생물학적인 고문(형벌)이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