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백천은 별도의 장으로 <역사도 추억도 노래로 남기는 불멸의 가수 조용필>을 삽입해놓았다.
평생 노래 속에서 살아왔고 노래 외에는 도통 세상물정을 모르는 조용필,
데뷔 때 팬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조용필은 충분히 그만한 예우를 받을 만하다.
조용필은 중학교 3학년 때까지도 음악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비교적 부유한 집성촌이던 고향마을에서도 음악과 관련된 친척은 없었으며, 가수라면 딴따라라고 오히려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집에서 2km쯤 떨어진 바닷가 방파제에 앉아 하염없이 석양을 바라볼 정도로 어릴 때부터 감성적이었다.
조용필이 음악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형이 사다놓은 기타를 몰래 만지작거리면서였다.
학교를 오가다 귀에 걸리는 음악이 있으면 외워두었다가 집에 돌아와 기타를 치며 채보(採譜)를 하여 연습하곤 했다.
가장 놀란 사람은 기타를 사다둔 형이었다.
음악을 전혀 모르던 동생이 한 번 들은 곡을 외웠다가 채보하고 연주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까마득히 먼 조상으로부터 혈관 속에 전해 내려오던 미미한 유전자 하나가 어느 순간 코드가 맞는 자극에 깜짝 깨어난 것이다.
조용필은 특히 비틀즈와 벤처스의 음악을 좋아했다.
이후 조용필은 누구의 지도도 받지 않고 홀로 음악을 연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집안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딴따라는 무슨, 안 돼! 막돼먹은 놈이나 하는 짓을…”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68년 봄, 조용필은 도저히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겠다 싶어 열여덟의 나이로 집을 나왔다.
그에게 음악은 이미 결별할 수 없는 숙명으로 가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때부터 조용필은 집안과 완전히 연락을 끊고 오직 음악에 몰두했다.
1969년 조용필은 에트킨즈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미8군 무대를 순회하며 주로 컨트리 음악을 연주했다.
낮에는 편곡과 연주 및 청음연습을 하는 등 24시간을 오로지 음악과 함께했다.
청음연습이란 모든 음정을 완벽하게 구분해낼 수 있는 정밀 청각훈련이다.
그룹 리더로 2년 동안 연주를 해오던 1971년 어느날, 갑자기 가수가 그만두면서 조용필은 계획에 없던 보컬 파트를 맡게 됐다.
이때 그룹이름도 ‘킴스 트리오’로 바꾸었다.
들은풍월에다 가수의 기질도 잠재해 있었던지 조용필은 쉽게 적응해갔다.
게다가 모든 곡은 이미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는 하루 평균 다섯 스테이지에서 60~70곡을 소화해냈다.
그 무렵 조용필은 송창식으로부터 ‘그 목소리로는 가수로 대성할 수 없다’는 뼈저린 충고를 듣고
각고의 노력 끝에 훗날 명창 박동진 선생으로부터 ‘최고의 목청’이라는 찬사를 받은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조용필이라는 이름이 비로소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노래는 일본에서만 100명이 넘는 가수가 취입했을 정도로 한국은 물론 동남아시아 전역에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1980년 3월, 조용필은 1집 음반 <창밖의 여자>를 냈다.
이때 ‘조용필과 그림자’란 그룹 이름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으로 바꾸었다.
문을 열기도 전부터 전국의 레코드 가게 앞에는 <창밖의 여자>를 사기 위해 장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함께 수록된 <단발머리><한오백년><대전 블루스><슬픈 미소> 등도 동반 히트했다.
1집 음반은 한국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그 가운데 <한오백년>은 명창 일곱 분의 음반을 구해서 계룡산으로 들어가 몇 달을 두고 분석하고 연습하여 부른 노래였다.
내친 김에 조용필은 민요, 남도창, 서도창 등의 특성도 깊이 분석하여 자신의 노래에 녹여 넣었다.
각종 서양음악은 물론 심지어 동요까지도 분석하여 창작에 활용했다니
그가 반세기 동안 대중의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을 받는 든든한 토대가 아닌가 싶다.

이백천은 어느 술자리에서 본인의 노래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10곡을 꼽아보라고 주문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석에서 메모지에 10곡을 적어서 이백천에게 건네주었다.
<창밖의 여자><돌아와요 부산항에><한오백년><고추잠자리><친구여><허공><생명><킬리만자로의 표범><꿈><추억 속의 재회>
그리고 <슬픈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신곡」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불멸의 사랑을 그린 노래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조용필이 단테(이탈리아. 본명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 1265~1321)의 「신곡」까지?
새벽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까치발로 아내 방에 들어가 서가에서 「신곡」을 찾아다 책상 위에 올려놨다.
몇 년 동안 읽지 않고 처박아둔 게 미안해서라도 조만간 읽기 위해서다.
<못 찾겠다 꾀꼬리>는 1982년 당시 젊은이들에게 상실한 자아를 찾도록 호소한 곡이다.
이 대목에서 각중에 3년 전 인천 문학구장에서 난생 처음 <조용필 콘서트>를 관람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조용필이 막 <못 찾겠다 꾀꼬리>를 열창하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내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면서 힐끗 곁눈질을 했더니, 아내 역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이어 <고추잠자리>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인에게 어린 시절의 감성을 건드리면 바로 누선(淚腺)이 자극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음악과 팬들에 대한 예의로 조용필은 최고의 연주자들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구성하여 최고 수준의 연주를 추구하며,
라이브 공연 때마다 최고의 무대와 음향시설과 조명장치를 구현한다.
1965년 형이 사다놓은 기타를 만지기 시작하면서 음악세계에 입문한 지 올해로 50년,
그는 곁눈 한 번 팔지 않고 반세기 동안 음악 외길을 걸어왔다.
1976년에는 대마초사건에 휘말려 4년 동안 공식활동을 금지 당했는데,
이 시기는 그가 지난 음악인생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음악세계를 숙성시키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조용필은 활동 금지가 풀리자마자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로 기다려준 팬들에게 보답할 수 있었다.
1986년에는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 1집 앨범 <추억의 미아>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함으로써 한류돌풍의 기반을 마련해놓았다.
이때부터 조용필은 한일 양국에서 자연스럽게 가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발매하는 음반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해온 조용필은 2013년, 또 한 번 대형 사고를 쳤다.
19집 앨범 ‘Hello’에 수록된 노래 <Bounce>가 인기절정의 아이돌 그룹을 올 킬하며 각종 음원 차트 1위를 싹쓸이한 것이다.
<Bounce>는 세계 최고 권위의 미국 빌보드 차트가 별도로 운영하는 ‘K-Pop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미발표 곡을 1000곡 이상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 가운데 어떤 곡들이 20집, 21집, 22집으로 뒤를 이을지 모를 일이다.
가정적으로는 불행한 일도 있었지만 팬들에게는 항상 기쁨과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우리 시대의 진정한 가왕 조용필,
오래오래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좋은 음악을 만들기를! (계속)

※ ‘한글날’ 관련 글로 3일 동안 새치기한 뒤 「이백천의 음악여행」을 이어가고자 하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참 애쓴다.
언제나 술을 한 잔 할꼬~~
종로 3가 한 번 가세...
지갑 챙겨준 집 그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