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타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립현충원 묘역에서 커다란 돌덩어리가 일곱개 나온 것을 두고 ‘봉황알’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김 전 대통령측에서는 그분이 영면할 자리가 현충원에서도 명당이라는 증거라고 하지만 다른 말도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로, 그는 “봉황알이 일곱개나 나오면 봉황의 항문이 파열된다”고 비판했습니다. 김두규씨 같은 풍수가들 사이에서도 돌 무더기가 나오는 땅은 좋은 곳이 아니라는 말이 조선일보 Why 지면에 보도된 바 있지요.
논란을 보며 사도세자를 떠올렸습니다. 조선 후기는 사도(思悼)세자 후손들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극적인 삶을 마친 사도의 삶이 최근 영화를 통해 조명됐는데 역사는 조선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부자 갈등에서 비롯됐음을 보여줍니다. 사도의 가계도를 살펴볼까요? 사도세자는 다섯 아들을 뒀습니다. 첫째 의소세손(世孫)은 세살 때 사망했지요. 둘째 아들이 22대 임금 정조(正祖)입니다. 정조와 사도의 관계는 수원 화성(華城)과 융건릉을 다룬 ‘문갑식의 기인이사’ 27회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서얼을 등용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책을 폈습니다. 실학이 융성하고 나라의 힘도 회복돼 가히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시기를 맞았지만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혹자들은 암살당했다는 주장을 접지않습니다. 정조 치하에서 사도가 낳은 정조의 세 이복동생들은 불운한 삶을 살았습니다. 맨먼저 사도의 셋째 아들인 은언군 이신은 천주교와 연루돼 사약을 받았습니다. 사사(賜死)된 것입니다.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 담도 강화도로 유배된 뒤 아버지처럼 사사됐습니다.
은언군 집안의 화(禍)는 여기서 그치지않았습니다.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상계군 담의 처이자 은언군의 며느리였던 신씨도 사사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집안이 쑥대밭이 된 것입니다. “권력은 결코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은 이토록 비정합니다. 사도의 넷째아들이자 정조의 또다른 이복동생인 은신군 이인도 역모에 연루돼 제주도로 위리안치됐다가 병사(病死)합니다. 사도의 다섯째 아들이자 정조의 막내 이복동생인 은전군 이찬 역시 역모죄로 사사됩니다. 왕가의 피(血)는 이렇게 무섭지요.
이러고보면 우리가 조선 초기 세종대왕과 버금가는 치세를 이뤘다고 칭송하는 정조의 화려한 개혁 정치의 이면에는 동생들의 비참한 말로(末路)가 가려져있는 것입니다. 정조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조선처럼 절대왕조시대에는 왕의 동생들이 잠재적 경쟁자로 감시받는게 당연했습니다. 또 사색당파가 워낙 심했기에 정조에게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당한 세력들이 정조의 이복동생들을 부추겨 권력을 되찾으려고 시도했다가 떼죽음을 당한 일도 많았습니다.
여하간 사도의 다섯아들은 모두 이런 삶을 살았는데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정조가 죽자 왕위는 아들 순조가 계승합니다. 어린 순조 대신에 정조에게 앙심을 품었던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의 개혁정책을 모두 되돌리는 반동의 시대를 엽니다. 그런데 순조(23대) 이후 문제가 생깁니다. 순조에게는 큰아들 효명세자가 있었는데 스물한살에 사망합니다. 둘째아들 헌종(24대)이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아들이 없이 사망하자 문제가 생깁니다. 정조의 혈손(血孫)이 모조리 끊어진거지요.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후계자로 삼아야할 것인가? 여기서 조선 후기를 뒤덮은 사도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지요. 다시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봅니다. 정조의 바로 밑 이복동생이자 사도의 셋째아들인 은언군에게는 다섯아들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큰아들 상계군 담은 죽고 둘째-셋째 아들은 비교적 평온하게 살았지만 넷째아들 풍계군은 은언군의 동생이자 역시 사사당한 은전군의 양자로 입적되며, 다섯째 아들 전계군은 벽지인 강화도에서 종친으로서 명분만 유지한 채 숨을 죽이며 삽니다. 그 전계군의 세 아들가운데 막내가 바로 ‘강화도령’ 철종으로 25대 임금이 되지요. 철종이 들어온 궁궐은 안동 김씨가 장악했으며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철종 대에 조선은 지금 국사시험문제에 자주 등장하는 ‘삼정(三政)의 문란’을 겪습니다.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사도의 넷째아들인 은신군은 아들없이 제주에서 병사한 뒤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세번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南延君)을 양자로 받습니다. 이 남연군이 흥녕군-흥완군-흥인군-흥선군 등 네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복잡한 계보를 잘 이해하셨나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남연군 사후(死後) 시작됩니다. 종친이라는 명분만 유지한 채 안동 김씨 집안의 전횡에 시달리던 남연군의 네 아들 가운데 흥선군은 이를 갑니다. 조금이라도 안동 김씨들에게 잘못 보이면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지요.
하지만 이 희대의 풍운아는 겉으로는 파락호처럼, 광인(狂人)처럼 행세하면서 집안의 부흥을 꾀했습니다. 그러면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사귑니다. 왕실 집안의 인물에게는 비록 먹을 것이 없어도 천하의 술사(術士)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듭니다. 당대의 명풍수 정만인이라는 설도 있고 이름없는 풍수쟁이라는 설도 있지만 1822년 흥선군에게 한 지관이 찾아와 이장할 것을 권합니다. 그러면서 이 지관은 안동 김씨에게 설움을 당하고 있던 흥선군의 귀가 번쩍 뜨일만한 이야기를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충청도 덕산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흥선군은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2대 천자가 나오는 가야산을 택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만 하면 또 제대로 읽지도 않고 ‘선임기자라는 녀석이 풍수얘기만 한다’고 흥분하는 분들이 있는데 끝까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내용은 황현(黃玹)선생이 쓴 ‘매천야록’을 비롯해 충청도 향토 사학자들은 상식처럼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대원군이 현장이 가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관이 말한 그 땅에는 이미 가야사가 있었으며 명당이라는 자리에는 금탑(金塔)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쓰기 위해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흥선군은 계략을 꾸밉니다. 먼저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금탑 뒤 기슭으로 옮기지요. 그 땅은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소유로, 흥선군은 그 후손들에게 “묫자리를 완전히 이장할 때까지 잠시 빌려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아버지 시신을 옮겼으니 두번째는 가야사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숭유억불정책이 강한 조선시대였지만 유서깊은 절을 없애는게 쉽지는 않은 일일텐데 흥선군은 아예 막무가내식 방법을 동원하고 말았습니다. 그 방법에 대해선 설(說)이 엇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