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신령
박 순 태
땅이 마력을 보일 태세다. 겨우내 응결되었던 흙덩이가 풀어져 비비적거린다. 흙이 꼬무락대니 체취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강토의 춘기가 뭇 생명체를 들깨운다. 강산의 구성원이 하나둘 박자 맞추면서 겨우내 축적한 기를 발산한다. 몸짓이나 진동으로 주변을 동요시키면서 종족보존을 위해 서로서로 더듬고 끌어안는다. 더 깊고, 더 넓고, 더 높이 몸부림친다. 춘기를 맞아 음양은 조화롭기만 하다.
지난밤 내내 비가 내렸다. 바람에 갈잎 날리자 촉촉한 땅이 햇볕과 밀어를 나눈다. 땅은 앳된 소녀의 수줍음만큼이나 당황한 기색이다. 다가올 미래를 다잡지 말고 그냥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는 듯하다. 햇볕을 받아들이는 흙의 순애보를 염탐하려 산객은 긴장하여 숨소리마저 낮춘다. 무딘 마음마저 대지의 입김에 사르르 녹아든다. 연연 세세 지켜보며 익혔다만 밤새 달라진 상향식 희열이 유난히 낯설다.
햇살 받아 지면이 데워지자 흙의 호흡이 가빠진다. 점층적으로 솟아오르는 땅의 기가 약동을 알린다. 운명의 씨앗을 품은 땅, 산달을 앞둔 배불뚝이로 산고를 알린다. 땅속 씨앗이 자궁 속의 태아인 양 발길질하며 본성을 드러내는가 보다. 싹을 틔우려 씨앗이 발버둥질할 때마다 땅은 콩나물 촉을 내는 시루같이 비릿한 입김을 분출한다. 이런 씨앗, 저런 씨앗, 차별 없이 품은 궁, 거짓 없이 실수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쏟는다. 햇볕과 정담 나눠 산고를 맞은 땅, 연신 진통의 묘수를 부린다. 말 없는 말로서 새 생명 탄생이 바로 오늘 내일임을 전한다.
단단한 껍질을 벗긴 새싹이 머리를 살그머니 내민다. 바람에 순종하는 파도가 험한 바위를 만나면 비켜나가듯 흙 속 씨앗이 돌이나 나무뿌리 같은 장애물에 부대끼면 몸을 돌려 싹을 낸다. 자성(雌性)인 땅이 숙성하여 웅성(雄性)인 태양의 양기를 받아 품었던 씨앗을 발아시켜 세상 밖으로 내보낸다. 새싹은 천상의 에너지를 튼실한 열매로 승화시킬 게다. 생물인 씨앗이 무생물인 흙과 햇빛의 만남은 혈통적 관계성이 아니라, 혼의 조합이리라. 그들의 친화력은 영원 무진하다.
나뭇가지 끝에 기가 몰렸다. 우듬지 꽃눈도 잠재된 감정을 풀어내느라 속살댄다. 물기 젖은 꽃봉오리는 이제껏 지켜온 동정(童貞)을 가슴 두근거리며 송골송골 본색을 드러낸다. 차고 넘쳐 오르는 생리적 진실을 저항할 수 없어 들숨 날숨이다. 바람의 시샘에 어설퍼 보이면서도 안정성만은 보장된 듯하다. 꽃망울 터뜨리려 압력을 가하는 열기에 향춘객 감정이 그네를 뛴다.
흙을 뚫고 오르는 새싹에서 세상의 으뜸인 차력을 보았고, 인고의 시간을 시나브로 넘기며 만발한 꽃송이에서 청춘의 격정적 흡인력을 보았다.
불어난 계곡물은 무지근한 변성기로 존재감을 알린다. 쉼 없이 가락을 뿜어대니 물속 가지 끝의 버들강아지가 온몸을 흔들면서 추임새를 넣는다. 갯버들 가지 끝에 잔털 달린 꽃대가 자기 세상인 양 겨우내 감쌌던 외투를 벗어 나부낀다. 자손만대를 위한 준비 과정이다. 세상 풍파를 이겨낼 혈족임을 깃털을 펼치며 알린다.
겨울잠에서 개구리가 깨어났다. 대지의 맥박에 동요된 수컷이 묵음 정진의 암컷을 교란하려 개골개골 소리 지른다. 원초적 본능을 풀어내려 수놈이 냅다 지르는 소리, 안방 문을 열어달라고 애걸복걸 두드리는 노크이리라. 녀석의 향락적인 곡조엔 욕망을 채우려는 쾌락이 한껏 숨어있는 것일까. 종족 번식을 위한 원초적 본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인가.
개구리 암수의 행위를 본다. 생식(生殖)의 업적을 남기려 신기하고 묘한 동작을 자아낸다. 몸에 정전기가 일어날 만큼 격렬한 몸동작이건만 진정 교접만은 아니었다. 수컷은 몸집 큰 암컷 등위에서 돌기 난 발로 알집을 조여 산란을 돕는 게 모두였다. 바위틈에 암컷이 산란하면 수컷은 뒤따라 생식 세포를 쏟아내어 수정시킨다. 땅이 식물의 씨앗을 품는 자궁이라면 웅덩이는 양서류나 어류가 산란한 알을 품는 포궁이다.
곳곳이 춘정에 어우러진다. 고체 덩어리 얼음이 녹아내려 액체가 되고, 땅에 묻혔던 씨앗이 시나브로 새싹을 틔워 올리고, 꽃눈이 부풀어 올라 독자적 색상으로 폭죽을 터뜨리고, 알에서 변태 과정을 거친 곤충이 날개를 펴고, 스치기만 해도 포근해지는 훈기. 운율로, 추임새로, 향기로, 몸짓으로 봄 신령을 맞았다. 초자연적이자 초이성적인 번식의 신령스러움.
대지의 성장통에 오감의 버튼이 차례로 작동된다. 땅의 온기로 몸이 녹아들고, 살랑바람에 얼굴이 황홀에 빠진다. 만발한 꽃송이에 코가 장구를 치니 덩달아 눈이 춤춘다. 어느새 달짝지근 물오른 고목 가지 끝에 눈길이 고정됐다. 흘러간 세월에도 용해되지 않은 침전물이 마음속에서 꼼지락대며 숨바꼭질한다. 여드름 불꽃 피워냈던 그때로 염치없이 되돌아간다.
자연이 다스리는 영역은 순수한 이성異性의 놀이터이다. 각자 획일적인 주제로 규칙을 지켜나간다. 가는 길이 각각 다를뿐더러 주고받는 사랑놀이 또한 무한대다. 앞뒤 가리지 않는 열정은 자연스러움을 넘어 극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계의 순환과정은 성스럽고 거룩하며 고결하다. 형상은 파도와 같고 본질은 대양과도 같다. 변화무상한 자연의 규칙에는 단순하면서도 오묘한 비의(秘義)가 숨어있다.
봄 신령, 하늘의 기를 안고 뭇 생명체에 신비한 진언(眞言)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