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女眞族)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족의 후손이자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들이 쓰던 언어. 여진어라고도 한다. 여진족들이 쓰던 여진어는 만주어 또는 만주어의 조상 언어와 매우 가까운 언어였다고 추정된다.
왼쪽 사진은 만한합벽체로 되어 있는 자금성의 건청문 판액(板額). 만주 문자로 '키얀칭먼'이라고 되어 있다. 문자는 위구르 문자에서 유래한 몽골 문자를 만주어에 맞게 개량한 만주 문자를 사용하며, 위에서 아래로 글을 쓰고 한문과는 달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줄바꿈을 한다.
후금이 청으로 국명을 바꿈과 동시에 한어(漢語)와 함께 국어(國語)의 지위에 있었다. 청 정부는 관학을 세워 만주어를 가르치고 관리등용 시험 때도 만주어를 장려했다. 특히 만주인이 문관이 되려면 반드시 만주어와 몽골어의 번역 시험을 보도록 했다. 공식 문서는 만주어로 원본이 작성되고 그것에 중국어를 덧붙였다. 이러한 형식의 문서를 만한합벽(滿漢合璧)이라 한다. 그래서 한자와 만주 문자가 함께 적혀 있는 현판을 현재도 자금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강희제 대에 강희제가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청 황실 내에서 중국어의 사용을 허가하였고, 더 큰 문제는 서태후 시대에 궁정 내 문서에 만주어-중국어를 함께 쓰는 제도를 중국어만 쓸 수 있도록 해버렸다.
그 후 압도적인 한족 문화의 영향을 받은 만주족들은 점차 만주어를 잊고 중국어에 능숙해져버렸다. 이 때문에 청 조정에서는 만주어를 하는 관리를 따로 둬야 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청 멸망 이후에 만주어는 일상 언어로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청년기를 보낸 김일성과 박정희를 비롯한 이들이 모두 만주어에 능통했다고 하지만, 만주국 당시에는 만주국에 사는 중국인을 '만주인', 그들이 쓰는 중국어를 '만주어'라고 불렀다. 즉 이들이 배운 건 중국어다.
현재 만주어는 사멸 위기에 있다. 2007년 기준 만주어는 중국 동북지방의 헤이룽장성에 있는 마을의 80세 이상의 노인들 약 18명 정도만이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 보통 언어가 이 정도 갔으면 멸종은 시간 문제. 현대 만주어의 현황은 外이 기사를 참조. 그토록 날리던 민족이 바로 지금 사라져 가는 왠지 모르게 묘한 모습을 보여준다. 만주족들은 그래도 청조가 세워진 후 귀족이었기 때문에 사실 현재 중국인 중에서는 교육수준이 높다고 한다. 학계나 예술계에도 만주족이 많다고. 그런데 이미 한족에 흡수된지라...
만주족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신분증에 표시된 민족 표시뿐이고, 가끔씩 아이신기오로씨 같은 만주족 성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그것도 한족 성인 진(金)씨로 치환되어서 이름보고는 구별하기 힘들다.[3] 현재 중국의 만주족 중에 만주어를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청나라 시기 준가르부를 토벌했던 원정군들이 정착한 마을에서 만주어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있다. 이들은 시버(Sibe, 錫伯, 병음 Xībó, 영어 Xibe)족이라고 불리며 만주족과 혈통적으로는 대단히 가깝지만[4] 정치적으로는 후금/청 형성기에 만주족과 대립하던 종족이었는데 결국은 국경 지키라고 부족의 일부가 일괄적으로 지금의 위구르로 이주당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시버어라 한다. 어느정도 말이 통하기 때문에 현대 만주어를 이해하기 위해 시버어가 이용되기도 한다.
2007년 헤이룽장성 싼자쯔(三家子) 마을에서 행해졌던 실제 만주어 구사자와의 인터뷰. 노인과 인터뷰하는 사람은 시버족.
위의 동영상에 나오는 시버족은 만주어를 따로 배워서 이야기가 가능한 것이다. 시버어의 단어와 만주어의 단어는 비슷하긴 하나 완전히 같은 언어는 아니며, 조사면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또한 문자도 만주문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특유 발음에 맞추어 약간 개량한 시버문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이랑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었던 만주족인 만큼, 만주어의 흔적은 아직도 함경도 지명이나 사투리에 꽤 남아있다. 두만(豆滿)은 여진어로 숫자 만을 가리키는 투먼(tumen)을 한자로 옮겨쓴 것. 만주어에는 한국어와 상당히 비슷한 단어들이 몇몇 보이는데, 대표적인 예는 alin(알린, 오름·산), fulehe(풀러허, 뿌리) 등등. 정치범들을 유배하는 탄광으로 유명한 아오지도 만주어로 "타는 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아마 석탄이 나왔던듯. 만주의 지명인 치치하얼(치치하르), 하얼빈(하르빈) 모두 만주어 지명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한국인이 흔히 생각하는 중국인의 말투 ~해체는 중국어가 아니라 청나라 상인들의 만주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서는 알타이어학 연구를 위하여 만주어 수업을 전공선택 과목으로 개설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5]에서는 일반인(실제론 중국 근세사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가끔씩 강좌를 열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배워보기 바란다. 최종병기 활 때문에 만주어 강좌의 인기가 오르기도 했다.
여진족(女眞, 중국어 간체: 女真, 정체: 女眞, 병음: nǚzhēn) 여진족, 주르첸, 주르첸족은 만주 일부와 한반도 북부에서 거주했던 퉁구스 계통 민족으로, 17세기에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부 만주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여진은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여진족은 크게 숙여진과 생여진으로 나누었다.
여진족은 만주에 살던 민족으로, 이들을 부르는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수·당 때에는 말갈족으로 불리다가 송대에 이르러 여진으로 바뀌었다.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여진의 여가 고구려의 여이고, 진족의 진이 대진국의 진이다.
문종(文宗) 22년 6월(1068년 6월 2일 음력) 6월 2일에 동여진 귀덕장군 안구(安矩) 등이 내조하였다.
고려는 여진족의 침입을 받게 되자 예종 2년(1107)에 윤관이 별무반 17만 대군을 이끌고 1108년 함흥 평야의 여진족을 정벌한 뒤에 함경도 지역에 쌓은 아홉 개의 성인 동북 9성을 설치하였다.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嶮鎭), 숭녕진 등이다.
만주에는 퉁구스계의 여진족이 널리 분포되어 반농반목의 부족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찍이 발해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 무렵에는 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하였고 여진족 추장 우꼬네(오고네)의 야망은 오직 요나라를 정벌하는데 있다. 왕성이 함락되고 왕이 자결함으로써 여진족이 대승한다. 그후 우꼬네는 옥화 공주를 왕후로 삼고자 했으나 북송의 멸망은 1127년이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일찍이 맹장으로도 이름난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여진족과의 싸움이 있었다. 이성계가 여진족 많은 지역에서 컸고 여진족 의형제도 있고 그런건 사실인데 어째서 요즘에는 이성계도 여진족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며 선대에 여진족 피가 섞였을지는 몰라도 세종은 1차 토벌 때와 달리 제2차 토벌은 전과도 크지 않았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전투의 목적이었던 여진족 추장 이만주를 놓치고 말았다.
누루하치는 여진족을 통합하였는데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 보다는 상당히 늦었지만 그 여진족의 일부는 후금을 건국하여 명을 폐하고 청을 세운다. 같은 여진족이지만 여진족이 세운 조선과 후금과의 갈등도 많았다. 조선 또한 청을 내내 오랑캐라 멸시한다.
약 300년 간 중국을 지배하면서 여진족은 자연스럽게 중국인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중국어를 생활화하게 되었다. 19세기 청이 멸망할 무렵에는 몇 가지 여진족의 문화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