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이다. 남편의 수박밭을 드나드는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가진 남자처럼 그쪽으로만 눈길을 보내기 시작이다. 자꾸 뒤돌아보기 시작이다. 그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함흥차사이기 시작이다. 그래서다. 수박이 맺히기 시작이다. 하나 둘 셋 넷 이십 개가 이미 열렸다고 침을 튀겨가며 흥분해서 자랑하기 시작이다. 자식 자랑도 이만 못하였다.
택배가 왔다. 수박 받침이란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동그스름한 초록색 받침대로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내가 어렸을 때 수박의 의자는 풀줄기로 만든 똬리였다. 똬리든 플라스틱 받침대든 수박이 편안하게 앉게 해줘야 보기 좋게 잘 크는 것은 맞는 일이니 사실 탓할 것은 없다. 그래도 나는 뭔가 불편하다. 잘 사셨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흥 두고 봐야지 수박 댓 포기 심어놓고 뭘 받침대까지. 마뜩잖은 마음이 내게 고여들었다.
종자골에 갔고, 밤새 비가 내렸다. 잎사귀마다 물방울이 매달린 단풍나무들은 땅에 닿을 듯 늘어졌다. 화장실 쪽 길에는 햇볕 한 줌 들어갈 수 없는 그늘이 되었다. 바닥은 물이 고였고 마른 잎사귀들이 깔려있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중에 어둡고 축축한 길 때문에 기분이 언짢은데, 그가 또 수박밭으로 들어간다. 비료를 줘야 한단다. 서너 번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화가 돋는다. 여보 저쪽 단풍나무좀 잘라내요 그늘이 심해 어둡고 축축하고. 요즈음 건강이 좋아지면서 목소리가 제법 카랑카랑해진 나다. 저쪽 단풍나무는 또 왜 죽었대. 수돗가 단풍나무는 왜 시들고 있는지 당신은 이유를 알아요? 수박밭 좀 그만 들어가고 다른데 신경 좀 써봐요. 큰소리를 냈다.
그렇게 말하는 나는 사실 수박보다는 꽃을 일 순위로 사랑한다. 종자골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텃밭으로 들어가고 나는 꽃을 보러 간다. 비가 내렸으니 모종을 심기에 적기다. 사월에 씨를 뿌려놓은 백일홍이 싹이 돋아 수북하게 자라나 있다. 밭 둘레 가득 피어 싱그럽던 시절을 보내고 씨앗 주머니에 씨앗을 품은 금계국들을 잘라냈다. 그 자리에 솎아낸 백일홍들을 실컷 옮겨심었다. 채송화도 밭 여기저기에서 뿌리를 내려 자라나 있다. 볕이 좋고 바람이 잘 통하는 장소로 옮겨심었다. 여섯 개의 화분에도 옮겨심었다. 수돗가 옆 텃밭 울타리에도 심었다. 나의 그런 행동에 대해 그는 불만을 말한 적이 있던가. 없다. 먼저 꽃이 핀 것을 보는 날에는 내게 사진을 보내준다. 꽃에 대한 아내의 사랑에 편들어 줄 줄 안다는 것.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여 종자골에 다녀온 지 이틀 만에 다시 종자골로 간다. 그는 수박밭으로 들어가고 나는 지난번에 모종한 꽃모종들을 살펴본다. 고개를 바짝 들고 싱싱하다. 내 고개도 빳빳해진다. 잘 자라라. 쓰다듬어주고 다정하게 말도 건네준다. 수박밭에 들어간 그가 하도 오래도록 쭈그려 앉아있어 무엇을 하는가 살펴봤다. 뭐하셔. 그가 고개를 들더니 수박 받침대 20개중 16개를 사용했다고 소리친다. 그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궁금하여 수박밭으로 갔다.
제법 큰 것은 점잖게 받침대 위에 앉아있다. 작은 수박들은 앙증맞게 올라 앉아있다. 그 중 아직 꽃도 떨어지지 않은 새끼손톱만한 수박이 떡하니 받침대 위에 올라 앉아있다. 그가 수박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가 보인다. 감동이다. 여보여보 어떻게 저렇게 안성맞춤으로 해 놓았대 잘했네 잘했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나도 그의 편이 된 셈. 내 말에 그가 잘 익은 수박처럼 크고 둥근 웃음을 짓는다. 내 편이 있다는 것, 누구의 편이 되어준다는 것,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세상이 모나지 않고 수박처럼 둥글게 돌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