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栗谷의 儒學思想
Ⅰ. 머리말
栗谷은 退溪와 더불어 韓國 性理學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그의 思想은 孔孟으로부터 程朱의 學에 뿌리를 박고 明의 羅欽順(整菴)의 理氣哲學, 徐花潭의 主氣說, 靜庵의 道學思想, 退溪의 理尊說에 淵源하고 있다. 조선전기가 性理學의 섭취단계였다면 栗谷이 살았던 16세기는 性理學의 특성이 형성되고 구체화된 시기였다. 그것은 한국의 유학사상이 본래의 유학보다도 강한 道德意識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완성에 있어서 人間主體의 能動的인 작용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栗谷은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현실을 비판하고 학자로서는 性理學 연구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는 哲學者로서의 삶과 政治家로서의 삶을 병행하였으며, 理중심의 철학과 氣중심의 철학을 조화시킴으로써 한국 性理學의 전성기를 마련하였다. 栗谷은 畿湖儒學의 祖宗으로써 金長生 등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고, 대표적인 著述로는 [聖學輯要], [東湖問答], [經筵日記], [天道策], [易數策], [文式策], [擊蒙要訣], [萬言封事], [學校模範], [六條啓], [時弊七條策], [答成浩原書] 등을 남겼다. 栗谷의 思想은 다양한 시각으로 照明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栗谷이 40세에 저술한 [聖學輯要]를 통하여 栗谷의 理氣論과 人性論에 대하여 考察하고자 한다.
Ⅱ. 栗谷의 時代的 背景과 生涯
1. 時代的 背景
조선왕조는 開國 이래 成宗朝에 이르러서 국가가 안정된 모습을 띄게 되었다. 그러나 燕山君 시대의 포악한 정치가 있은 뒤로는 정치적인 폐해가 극심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栗谷이 태어나던 중종 31년(1536년)에 이르러서는 부패된 정치의 害毒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서 백성의 힘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栗谷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오늘날에는 조상들이 남긴 은혜는 이미 다하고, 세력이 있는 간신들이 남겨놓은 해독이 바햐흐로 나타나고 있다. 훌륭한 논의가 행해진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힘은 바닥이 나버렸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한창 젊었을 때 술에 빠지고 여색을 즐기어 해독이 많았으나 혈기가 강한 덕분에 몸에 손상이 가는 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만년에 이르러서 그 해독이 노쇠함에 따라 갑자기 나타나 비록 삼키며 몸을 보양한다 해도 근본적인 기운이 이미 쇠퇴하여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된 것과 같다. 오늘날의 일이 실로 이와 같으니, 10년이 못가서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고 말 것이다."
라고 말한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런 근거에는 15세기 守成의 과정을 통해 정치적 기득권을 장악하였던 勳舊派와, 成宗朝에서부터 中央官界에서 진출한 新進士林들과의 학문관과 현실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른바 士禍의 시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의 갈등을 栗谷은 이렇게 말한다.
"기묘년 여러 선비들이 뜻 있는 일을 해 보려고 하였으나, 모함의 바늘에 찔려 피와 살이 흩어지는 극형을 받았다. 이어서 발생한 乙巳士禍는 己卯士禍보다 더 참혹하다. 이로부터 선비들은 이리처럼 뒤를 돌아다보며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히 여겨서 감히 나라의 일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당시 士禍를 통해서 士林派는 정치적 실패와 집단의 붕괴를 가져오게 됐다. 거기다가 밖으로는 北胡와 南倭의 跳梁으로 인해 邊境이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으니 內憂外患의 시기였다. 栗谷은 이러한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사회를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보아 현실적으로 대두된 문제에 대하여 수수방관하거나 평안함을 꾀하여 구태의연하게 무사안일만을 일삼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인식과 깊은 憂患意識을 바탕으로 ≪聖學輯要≫를 저술하게 된다. 여기에서 栗谷은 유교의 '修己治人', 곧 內聖外王'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2. 栗谷의 生涯
栗谷의 姓은 李氏 이름은 珥, 字는 叔獻, 諡號는 文成, 栗谷은 號이다. 本貫은 德水, 始祖는 고려때 中郞將을 지낸 敦守이다. 栗谷은 司憲府監察을 지내고 議政府 左贊成에 追贈된 아버지 元秀公과, 詩, 書, 畵, 三絶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어머니 師任堂 申氏에게서 1536年(中宗 31) 12月 26日 江陵 北坪村의 烏竹軒에서 태어났다. 栗谷은 어려서부터 어머니 師任堂의 교도와 감화로 8, 9세에 이미 시문의 명성이 높아 신동이라고 일컬어졌으며, 13세 때(明宗) 進士 初試에 합격하여 명성이 자자해졌다.
16세 되던 해 봄 師任堂의 뜻하지 않은 서거는 栗谷에게 정신적으로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허무감을 안겨주었으며, 고통과 시련이었다. 율곡은 3년의 상을 벗던 19세 되던 해 3월 金剛山에 들어가 1년간 佛敎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20세에 강릉 외가에 돌아와 自警文 11개조를 지어 학문에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22세에 星州牧師 盧慶麟의 따님과 결혼했다. 23세 되던 해 봄에는 경북 禮安 陶山으로 退溪先生을 찾아 뵙고, 이틀 동안 머물면서 평소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히기도 하고, 또 의문점을 질의도 하였다. 그후 집에 돌아와서도 다시 書信을 통하여 儒學工夫의 本領이라 할 수 있는 主一無適의 敬工夫나 格物, 窮理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往復問辨한 내용이 수차에 달하였다 .그해 겨울 別試에 [天道策]으로 장원급제한 것을 포함해 전후 九차례에 걸쳐 장원을 하여 '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9세때 戶曹佐郞에 임명된 이후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병조 및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栗谷은 官界에 종사하는 동안 벼슬을 한낱 個人영달을 위한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었고, 어느 부서 어느 자리에 가든지, 통찰력과 비판력을 발휘하여 문제점을 발견하고 합당한 해결방안을 강구하여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물러났다. 40세 이후 栗谷은 건강이 좋지 못함을 이유로 벼슬 때문에 서울에 머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황해도 해주 石潭에 머물렀다.
사실 不惑 이후의 栗谷에게는 隱居의 뜻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천으로 연결되지는 못했고, 결국 병으로 고생하면서 말년을 맞이했다. 선조 17년(1584年) 정월 16일에 세상을 마치니 그의 나이 불과 49세였다.
Ⅲ. 栗谷의 理氣論과 人性論
栗谷의 철학사상은 性理學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栗谷은 韓國思想史上 누구보다도 독창정신이 강한 학자로서 종래의 理論과 學說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으로 수용한 경우가 많다. 예로 朱子의 "理氣互發 주장이 사실이라면 朱子답지 못하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가진 栗谷의 現實的 관심을 고찰함에는 먼저 그의 理氣論과 人性論을 검토해야 한다.
1. 理氣論
栗谷은 우주만물과 그것의 생성변화는 理와 氣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며, 理와 氣로 구성되어져 있다고 본다.
(1) 理氣의 槪念
栗谷은 理氣槪念에 대해 朱子의 '形而上과 形而下'로 구분된다는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양자는 (동작이 없는 존재 자체든 혹은 동작이 있는 운행 중이든 간에)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견해를 취하는 점에서 朱子와 차이가 있다. 栗谷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理'(理)는 태극이요, '氣'(氣)는 음양이다. 이제 태극과 음양이 상호 발동하여 움직인다(互動)고 하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태극과 음양은 상호 움직일 수 없으니, '理'와 '氣'가 상호 움직인다는 것이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理'는 형이상자(形而上者)요, '氣'는 형이하자(形而下者)이다. 그러나 둘은 서로 떠날 수 없으니, 그 떠날 수 없음으로 해서 그 발동하여 나타나는 작용(發用)은 하나이며, 상호 발동하여 나타나는 작용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理'는 동작이 없으며(無爲), '氣'는 동작함이 있다(有爲).
이와 같이 율곡은 주희의 견해를 일정 부분 따르면서도, 이치와 기운을 그 존재에 있어서건 혹은 그 동작에 있어서건 두 가지로 파악하지 않고 '서로 떠날 수 없음'(不能相離)을 강조한다. 그리고 '理'와 '氣' 상호간의 발용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理'와 '氣'가 서로 각기 동작하는 바가 있다는 퇴계의 이른바 '이기호발설' 理氣互發說에 반대하고 있다).
그는 '理'와 '氣'의 형체, 동정(動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체로 형체가 있고, 동작이 있으며,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는 것은 '氣'이다. 형체가 없고, 동작이 없으며, 움직임과 고요함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은 '理'이다. '理'는 비록 형체가 없고 동작도 없지만, '理'가 아니면 '氣'의 근본을 댈 수 없는 까닭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형체도 동작도 없으면서 형체와 동작이 있는 것의 주인이 되는 것을 '理'라 하고, 형체도 동작도 있으면서 형체 없음과 동작 없음의 그릇(器)이 되는 것을 '氣'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치와 기운은 서로간에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그 상관 관계를 더욱 확실하게 볼 수 있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무릇 '理'는 '氣'를 주재하는 것이요, '氣'는 '理'가 얹혀 타는 바이다. '理'가 아니면 '氣'는 뿌리를 내릴 곳이 없고, '氣'가 아니면 '理'는 의지할 데가 없다.
발동하는 것은 '氣'요, 발동하게 하는 까닭은 '理'이다. '氣'가 아니면 발동할 수 없고, '理'가 아니면 발동하게 하는 근거가 없다. 이 두 가지는 앞뒤가 없고, 떠나고 합해지는 것이 없으며, 서로 발동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상과 같은 내용에 비추어 보건대 율곡은 '理'와 '氣'의 관계를 말하면서 '理'를 스스로 밝은(自明) 원리로 파악하고, '氣'를 원리를 실현하는 능동적인 힘으로 파악하고 있다.
(2) 理氣之妙
'理'와 '氣'를 이해함에 있어서 율곡은 주자나 화담 또는 퇴계 등에 비하여 절충적인 묘합(妙合)의 논리를 주장한다. 그것이 이른바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불리는 것으로 율곡 이기설의 특징이다. 율곡은 "천하에 '理' 밖의 '氣'가 있겠는가? 이기지묘는 보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理'와 '氣'는 두 가지 물건이 아니요, 또한 한 가지 물건도 아니다. 한 가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둘이요, 두가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둘이면서 하나이다.
'理'와 '氣'는 한가지 물건인가, 아니면 두 가지 물건인가 하고 묻는 질문이 있었다. 내가 답하였다. 앞선 교훈을 고찰하건대 '理'와 '氣'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다. '理'와 '氣'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어서 원래 떨어지지 않은 까닭에 두 가지 물건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자는 말하기를 "그릇은 또한 도이고, 도는 또한 그릇이다."(器亦道, 道亦器)라고 하였다. 또한 양자는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실제로는 섞이지 않아서 한 가지 물건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氣'(理自理, 氣自氣)이기 때문에 서로 섞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두 말을 합하여 생각하면 이기지묘(理氣之妙)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에 '理'와 '氣'는 서로 떠나지 않는(不相離) 관계와 서로 섞이지 않는(不相離) 관계를 지속한다. 이것이 이른바 이기의 묘합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논리 체계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인 까닭에 율곡이 '理氣之妙'라고 이름한 것이다.
(3) 氣發理乘一途
退溪는 四端을 理發而氣隨之, 七情을 氣發而理乘之라하여 두 개의 존재구조를 설정하고 있지만, 栗谷은 理發而氣隨之는 그릇된 것으로 보아 오로지 氣發理乘 하나의 길밖에 없다고 본다. 栗谷은
"天地의 변화에 理化, 氣化가 없듯이, 내 마음 또한 理發, 氣發의 두 길이 없다고 하여 退溪의 互發을 반대한다"
氣發理乘이란 發하는 氣 위에 理가 올라탄 상하의 존재구조이다. 栗谷은 자연세계나 인간세계를 막론하고 일체 존재의 존재구조를 氣發理乘으로 일관되게 설명한다. 그 논거로
"理는 作爲가 없고 氣는 作爲가 있기 때문에 氣는 發動하고 理는 타는 것이다"
라는 개념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그는 '理'의 發을 부정하기 때문에 氣發理乘으로서 존재 구조의 형식을 삼는다. 氣가 發함에 '理'가 탄다고 할 때 氣發과 理乘은 동시적인 것이다. 또 공간적으로도 離合이 없는 것이다. 본래부터 하나로 있는 妙合 구조를 氣發理乘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理乘의 乘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그의 動靜을 주재하는 '理'의 근저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氣發理乘은 존재 자체의 표현으로 理氣之妙의 다른 표현이며 理通氣局의 다른 표현이다.
(4) 理通氣局
栗谷은 理의 차원에서는 하나인데, 氣의 세계에서는 나누어지게 되는 것은 理氣의 屬性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설의 출발은 "理는 無形, 氣는 有形"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다. 곧 理는 시간,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보편성을 가졌다는 말이고, 氣는 시간, 공간에 제약을 받는 국한성을 가졌다는 말이다. 따라서 理는 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고, 氣는 언제 어디서든지 한계지워지고 局限된다는 의미이다.
栗谷의 理通氣局은 理一分殊, 氣一分殊의 사고를 거쳐 창출된 이론이다. 理一分殊는 理氣之妙하에서 理를 중심으로 본체와 현상을 아울러 본 것이라면, 氣一分殊는 理氣之妙하에서 氣를 중심으로 본체와 현상을 아울러 본 것이다. 따라서 栗谷은 理·氣 어느 한 면으로 치우쳐보는 관점을 지양하고, 理氣之妙의 관점에서 理一과 氣一, 理分殊와 氣分殊를 아울러 본 것이 理通氣局이다. 栗谷은 理通氣局을 설명하기를
"人生이 物性이 아닌 것 이것이 氣局이고, 사람의 理가 곧 物의 理인 것. 이것이 理通이다" 한다. 또한 모나고 둥근 그릇이 같지 아니하나 그릇 가운데의 물은 마찬가지이며, 크고 작은 병이 같지 아니하나 병 속의 공기는 마찬가지라 비유한다. 따라서 氣가 만가지로 다른데도 根本이 하나일 수 있는 것은 理의 通 때문이며, 理가 하나인데도 만가지로 다를 수 있는 것은 氣의 局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栗谷의 理通氣局은 理無形, 氣有形의 개념을 통해 理氣之妙의 관계성 속에서 理의 體用과 氣의 體用을 유기적으로 통찰한 표현이다.
요컨대, 율곡의 理通氣局은 "理'만도 아니고 '氣'만도 아니며, '理'의 通과 氣의 局이 하나로 묘융된 理氣之妙의 세계, 理氣之妙의 가치를 표현한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 人性論
栗谷은 인간의 존재와 본질문제를 天人合一의 관점에서 인성론을 전개하였다. 그의 人性論을 氣質之性과 本然之性, 四端과 七情, 人心과 道心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本然之性과 氣質之性
性理學에 있어서 性은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구별하여 설명된다. 율곡이 인간의 性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理와 性의 개념 구별에서부터 시작된다. 율곡에 의하면 性은 理氣의 合이다. 대개 "理'가 '氣'가운데 있은 연후에 性'이 된다. 만약 형질 가운데 있지 않으면 마땅히 '理'라 해야지 '性'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다. 다만 형질 가운데 나아가 단지 그 '理'만을 가리켜서 말한다면 本然之性인 것이다. 본연지성은 '氣'와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곡은 性을 理氣之合 내지 理氣之妙로 보기 때문에 형질 중에서 性을 파악하는 관점에 선다. 따라서,
"氣質之性과 本然之性은 결코 두 개의 性이 아니라, 氣質上에 나아가 단지 그 理만을 가리켜 本然之性이라 하고 理와 氣質이 妙合된 것을 氣質之性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本然之性은 氣質을 겸해 말할 수 없으나 氣質之性은 오히려 本然之性을 겸할 수 있다"
이러한 栗谷의 氣質之性 중심의 性論은 人間을 天地之理와 天地之氣의 묘합체로 이해하는 그의 입장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이것은 현실적인 인간을 중심으로 性을 말하는 것이지 관념적인 性이나 槪念的인 性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2) 四端과 七情
중국 性理學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四端七情의 문제가 韓國 性理學에서는 중요한 논제로 대두되었다. 栗谷은 退溪와 高峰의 四端論辯에 대해 高峰의 견해에 동의한다. 栗谷에 의하면 四端七情의 구조를 氣發理乘으로 본다. 그러면서 退溪의 四端七情論에 대해 비판하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退溪는 四端과 七情을 두가지로 보는데 栗谷은 七情을 四端 속에 포함시켜 본다.
둘째, 退溪는 四端의 구조를 理發而氣隨之, 七情의 구조를 氣發而理乘之라고 하여 이중의 존재구조로서 설명하는데 栗谷은 사단, 칠정을 모두 氣發理乘의 존재구조로 본다.
셋째, 退溪는 四端을 理發而氣隨之라고 표현하는데 栗谷은 理發을 부정하고, 또 理發而氣隨之의 표현형식이 시간적 理先氣後를 면치 못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넷째, 退溪는 四端을 主理, 七情을 主氣라고 말한다. 하지만 栗谷은 사단을 主理라고 하는 것은 옳지만 七情을 主氣라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栗谷은 사단이 칠정이외에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고 칠정가운데 포용되는 七情 中의 善한 부분으로 생각하였다.
(3) 人心과 道心
栗谷에 의하면 만약 人心, 道心에 투철하지 못하면 理氣에도 투철할 수 없다. 理氣之妙를 이미 밝게 通見했다면 人心, 道心에 두 근원이 없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했듯이 栗谷은 人心, 道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栗谷에 의하면
"人心과 道心이 비록 두 가지 이름이나 그 근원은 단지 한 마음인데, 발함에 있어 理義를 위한 것과, 食色을 위한 것이 있기 때문에 발함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道義를 위해 發한 마음이 道心이고, 食色을 위해 발한 마음이 人心이다."
이처럼 그 근원에 있어서는 한마음이지만, 마음이 어떠한 의지적 定向을 갖고 작용하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이러한 栗谷의 견해는 退溪가 道心과 人心을 각기 內出과 外感으로 보아 理發, 氣發의 이원으로 보지만, 栗谷은 人心이나 道心을 모두 氣發理乘一途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栗谷은 人心과 道心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이 처음에는 道心이던 것이 사사로운 意에 의해서 人心으로 끝마치게 되거나 그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人心과 道心은 고정된 게 아니라 人心의 道心化와 道心의 人心化가 가능하다.
栗谷에 의하면 道心은 순전히 天理이므로 純善하지만 人心은 天理와 人欲의 양면을 겸하므로 善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人心은 人欲에 흐르기 쉬우므로 반드시 精察하여 道心으로 절제하여 항상 人心이 道心의 명령에 쫓도록 해야 人心의 道心化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栗谷은 天人一貫의 입장에서 人心, 道心을 理氣說과 일체화시키며 그 논리를 전개함은 물론 本然之性과 氣質之性, 四端과 七情, 나아가 意에까지 연관시켜 정밀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栗谷에 있어서 原理와 現實의 調和
栗谷 철학사상에 있어서 추상적 性理論이 구체적 人間과 社會的 諸問題에 如何히 관계되느냐의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栗谷은 人間의 內面的 德性으로서의 性理와 역사적 상황 및 사회적 현실로서의 實事를 아울러 중시하면서 兩者의 모순을 止揚하는 가운데 本과 末, 內와 外가 合一된 조화 속의 論理를 전개했을 뿐 아니라 현실을 理想化하고 原理를 현실사회에 具現하려 하였다. 그는 性理를 說함이 知的 만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바르게 함에 있다고 하여 학문의 本意를 명백히 하였다.그러므로 道學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道學이란 格致로서 善을 밝히고 誠正으로서 그 몸을 닦아 그것이 自己化했을 때 天德이 되고, 이것을 정치 현실에 반영했을 때 王道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 道學의 창시자로서 靜庵을 일컫고 眞儒란 나아가서는 一時에 道를 행하여 이 백성을 구제하고, 물러가서는 萬世에 敎를 드리워 그 말씀을 세우는 이라 하여 理想的 인간상으로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栗谷은 道學的 입장에서 자기가 딛고 선 현실을 外面할 수 없었고, 孟子와 같이 時代救援의 사명을 自任하였으며, 그 시대의 현실과 상황 속에 괴로워하는 민중의 困苦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그의 性理哲學은 自己에서 他人에게, 家庭에서 社會國家에로 발전적 志向을 하였던 것이다.
Ⅴ. 맺음말
조선사회에서 性理學은 단순히 宋代의 철학을 되새김질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사회의 요구 속에서 추구되었고, 대답되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栗谷은 韓國性理學史에서 退溪와는 입장 차이를 뚜렷이 하며 두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율곡의 理氣說은 程朱에 충실하면서도 모방이 아니라, 그의 독창이 돋보인다. 理氣개념의 명료화, 理氣之妙의 사유체계, 氣發理乘의 존재구조 설정, 理通氣局의 사유 등은 율곡의 창의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理氣之妙는 晦齋, 退溪로 이어오는 '理' 중심의 철학과, 花潭의 氣哲學을 조화함으로써 조선조 성리학의 전성기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 참고문헌
1. ≪국역율곡전서≫ 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2. ≪국역율곡전서≫ 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3. ≪국역율곡전서≫ Ⅲ,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4. ≪국역율곡전서≫ Ⅳ,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5. 금장태, ≪유교와 한국사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0.
6. 황의동, ≪한국의 유학사상≫, 서광사, 1995.
7. 류정동, ≪동양철학의 기초적연구≫,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86.
8. 황준연, ≪율곡철학의 이해≫, 서광사, 1995.
9. ,≪한국인물유학사≫, 한길사, 1996.
10. 주홍성외 2인, ≪한국철학사상사≫, 예문서원, 1994.
11. 황의동, ≪율곡사상에 관한 연구≫, 1981.
12. 박동규, ≪율곡의 교육사상≫,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