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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눅23:44-49, 사 53:1-6
* 봉서방의 설교를 보충, 재해석한 설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 저의 심금을 울리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바로 141장 찬송 '웬 말인가 날 위하여'입니다.
이 찬송가는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기 전까지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린 찬송으로, 우리에게 구절구절마다 깊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1.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2.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3.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어서 캄캄케 되었네.
4.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립니다.
5.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아멘.
작사자는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벌레 같은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놀라워하며,
2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내가 지은 그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그토록 험한 십자가에 못 박혀 극심하게 고통과 아픔을 당하셨으니,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엄청나게 크다.’고 탄복합니다.
3절에서는 ‘주님께서 우릴 대신하여 죽으신 그 사랑과 그 슬픔이 너무나 크고 놀라워서 한낮의 해도 빛을 잃고, 온 세상이 캄캄하게 되어, 예수님의 죽음에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 ‘주님께서 그렇게 날 위하여 나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니, 우리는 차마 염치가 없어서 눈물 없이는 그 십자가를 대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드디어 5절에서 결론으로 ‘주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여 늘 울어도 갚을 길이 없고, 드릴 것은 몸 밖에 없어 이 몸을 받친다.’고 헌신의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30년 사생활과 3년간의 공생애는 전부 고난의 생애입니다. 더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열린 최후의 만찬회 석상에서부터 무덤에 묻히시기까지의 과정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당하신 고난이 예수님께서 지으신 어떤 죄나 허물 때문이 아니라, 벌레 같은 우리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서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찬송을 부르고 들으면서 어떠한 느낌을 받게 됩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할 일도 대게 없었나 보다. 어떻게 이 보잘 것 없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뿐인 그 귀하신 생명을 십자가에 버리셨다는 말인가?’하며, 하나님을 이상한 분으로 여기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일이라고 여기십니까?
사도 바울은 너무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1:4)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당하실 실제 일이기에 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막10:45)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로 천국에 계시고, 이 땅에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 사실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5-6)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징벌을 받아 하나님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자 로마 병정들에게 채찍을 맞으시고, 옷 벗김과 침 뱉음과 못 박힘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셔야 마땅하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거스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불순종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불순종! 우리들의 어리석음! 그리고 양처럼 제 고집만 부려 각기 자기 길로만 간 우리들의 허물된 자아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속에 아직도 버리지 못한 아집과 고집, 어리석음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 이러한 옛 모습들을 완전히 버려야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들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릴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1장 찬송가 작사자는 2절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예수님의 그 귀한 희생이 너무 놀랍고 고마워서 이렇게 목메어 찬양한 것입니다.
‘내 지은 죄 다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예수님께서 요 15:13에서 말씀하신 것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버리신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우뚝 서있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먼저 예수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종이장처럼 창백한 얼굴과 머리에는 가시관으로 인해 붉은 피가 주룩 주룩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못 박히신 두 손을 보십시오. 손바닥을 꿰뚫은 큰못이 예수님의 부드러운 살을 찢고 뼈를 뚫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육중한 몸이 늘어질수록 살이 점점 찢어지고, 선지빛깔 붉은 피가 철철 쏟아지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못 박히신 두 발을 보십시오.
두 발은 하나로 포개져서 나무에까지 큰못으로 깊이 박혀 선혈이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옆구리를 보시렵니까?
무지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부드러운 가슴도 창으로 찔렀습니다.
예수님의 벌거벗겨진 온 몸을 보십시오.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이 사정없이 휘두른 쇠 채찍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온 몸은 회를 친 듯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했고, 날카로운 채찍 끝 쇠뭉치로 인하여 온 몸이 찢기고 파이고, 살점이 뜯겨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이글거리는 뜨거운 햇빛이 작열하다가 갑자기 온 하늘이 캄캄해지며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장대 같이 쏟아져 내려 예수님의 온 몸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쏟아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고통을 한 시간 동안만 겪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그마치 여섯 시간 동안을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셨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였던지,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절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고, 같은 동족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버림받으셨고, 더욱이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고, 심지어는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셨으니,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절규하시며 당하신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138장 2절)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그 긍휼하심이 바로 은혜 자체인 것입니다.
프랑스 한 성당에 하루도 거르지 아니 하고 찾아오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강대상 쪽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그냥 갑니다. 어느 날 성당 사찰이 물었습니다.
“왜 형제는 하루도 거르지 아니 하고 십자가만 바라보고 갑니까?”
이 물음에 성도는 너무도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만 봐도 은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은혜가 충만하고 기쁨이 넘치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저절로 나도 모르게 눈물 흘리며,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144장 후렴) 입에서 찬양이 흘러나오고, 십자가가 우리의 간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무엇을 보려고 예배당에 나왔습니까?
화려한 옷 입은 자를 보러 왔습니까?
솔로몬의 궁정으로 가십시오.
해박한 지식인입니까?
애굽이나 바벨론으로 가십시오.
우리 성도님들은 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지신 대속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의 십자가를 보시기 위하여 이 예배당에 나와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온 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같이 검은 죄를 씻기 위해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셔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고난당하신 것을 묵상하며,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믿음으로 짊어지고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우리 함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좀 더 가까이, 가까이 가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더러운 죄가 완전하게 씻음 받아 깨끗해 질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때가 제 6시쯤 되었습니다. 제 6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정오 12시입니다. 한 낮이 된 것입니다.
정오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더니만, 그 어둠이 제 9시 곧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눅23:44, 마27:45)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 휘장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외치실 때 위에서 아래로 한 가운데가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눅23:45)
이 휘장은 성전의 가장 깊은 곳인 지성소에 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볼 수 없는 휘장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는 이 휘장은 두께가 15cm나 되었다고 합니다.
두 마리의 힘이 센 황소가 양쪽에서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휘장입니다.
휘장이 찢어지자 300명의 제사장들이 달려들어서 다시 꿰매었습니다. 그러나 다 꿰매자말자 다시 찢어졌습니다. 그래서 꿰매기를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감히 인간이 정정하려고 했으니, 실패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휘장을 찢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외치시고 운명하시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절규의 기도에 화답하여 우리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찢으신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그 된 일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로 큰사랑의 능력이 터져 나오는 자리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용서의 현장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소망의 실체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감히 우리 벌레 같은 인생들이 상상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는 사랑의 능력이 용서와 생명과 구원으로 폭발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위대한 빛이 비쳐진 곳입니다. 그러기에 그 뜨거운 정오의 햇빛도 이 사랑의 빛 앞에 빛을 잃고 말았던 겁니다.
44절 말씀대로, 하늘의 해가 빛을 잃은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해가 빛을 잃으니, 피조물의 세계는 어두워졌고, 땅은 어두움으로 뒤덮어버렸습니다.
우주공간 천지만물에 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어 달려 죽는 시간이었기에 피조물도 빛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극진하신 사랑이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므로 확증된 순간이었기에 햇빛도 빛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능력이었으면 천지가 요동을 하겠습니까? 이는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의 형틀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회복시키는 축복의 실체요, 사랑의 현장인 것입니다.
마태는 이 우주적인 사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1-53)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로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도의 몸을 무덤에서 일으키는 능력이고, 멸망 받는 영혼을 건져낸 사랑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이 보다 더 큰사랑은 없습니다.
실로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달려죽으심으로 우주적 사건의 중심으로서 능력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기적과 장면을 십자가를 통해 보시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였다’고 여기십니까?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음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길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참 능력을 생명으로 나타내는 도구요, 영생의 나라,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가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순절에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의 길에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참여하며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141장 찬송가 4절에서 작사가는 눈물범벅이 되어 찬양합니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예수님은 내 죄 때문에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셔서 그 수치와 멸시와 고통 중에 죽으셨습니다.
정말 양심이 아직 선한 상태에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할 때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오직 눈물만 흘리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멸시를 하는 것일까요?
더욱이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왜 이 모양입니까?
불신앙 때문입니다.
사 53:1에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증거 했고, 또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사 53:1절에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팔’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없이 때마다 일마다에 역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역사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없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우리의 편견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 53:2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십시오.
아름다운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신 것 아니요,
부의 중심 미국 뉴욕에서 탄생하신 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 작은 고을 베들레헴, 게다가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장하실 때 왕궁에서 모세처럼 성장하신 것도 아니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자란 솔로몬처럼 성장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 요셉의 집안에서 목수라는 천민으로 노동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님은 외모로도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서 준수하였고, 다윗은 얼굴빛이 붉고 눈이 빼어났다’ 했는데,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하신 대로 연약했고, 고운 모양도 없었고, 풍채도 없었고,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매력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말리엘 문하 같은 대학은커녕,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3에서 예수님이 받으실 멸시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이러한 표현은 당시에 있었던 문둥병자들에게 적합한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문둥병자가 나타나면 저마다 얼굴을 가리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문둥병자 취급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멸시를 당하고 있었습니까?
우리의 불신앙 때문이요, 우리의 잘못된 편견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어떤 종교입니까?
물론 연한 순 같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순 없이 큰 나무가 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고난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길길이 날뛰며 고함쳤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유대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 품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마치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싫어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들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삼으신 것과 같습니다.
사울에게서 배척을 당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과도 같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좇으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외형을 봅니다.
옷, 풍채, 재물, 학력, 권세, 출세를 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 외에 다른 것 자랑할 것이 없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순절에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 의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을 위해 꼭 필요한 주님의 죽으심의 자리요, 우리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출발점입니다.
십자가는 은혜의 보좌가 있는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길이기에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중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생명의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시작입니다.
십자가는 죽으심이 아니요,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거기에 나타난 영광을 본 자가 백부장입니다. 무리들과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온 여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와 그 때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의 능력, 속죄의 능력, 소망의 능력을 보았습니까?
고통의 십자가에 담겨진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을 위해 자기를 죄 값을 죽음으로 치르시려고 십자가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고 말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신앙생활은 십자가의 능력을 아는 교인들만 결단할 수 있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기 이하여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죄인처럼 취급된 예수, 그 십자가의 능력을 보며 우리도 마침내 자신을 희생하고 마침내 자기를 죽음에 내어놓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마지막 목표가 돼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 종점이 자기희생의 길입니다. 사도가 그러하였고, 오늘까지의 수많은 순교자가 그러하였고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살아온 많은 성도가 그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임종을 감옥에서 예감하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유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유서가 디모데 후서입니다.
딤후 4:8에 보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했습니다.
의의 면류관은 의인으로 인정된 자에게 주시는 면류관이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면류관입니다.
의의 면류관은 열심과 충성에 대한 상급으로 받는 인격적 영광입니다.
우리 모두 이 귀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그 날까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최우식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