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83〉권문세족 미움 한 몸에 받았지만 ‘요승’ 아니다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진 신돈
보우가 선사로서 최선의 길을 걸었다면
신돈은 천민출신 개혁자로서 길 보여줘
태고(太古) 보우(普愚, 1301∼1382)가 원나라에 들어가 석옥 청공을 만나 법을 받을 당시 공민왕도 그곳에 있었다. 왕은 보우와 조우하면서 ‘고려에 돌아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보우를 스승으로 모셔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공민왕은 귀국 후, 왕위에 올라 보우와 스승·제자 인연이 되었다. 보우는 공민왕에게 홍건적 침입 대비, 한양 천도, 인재 천거 등을 건의하였고, 공민왕은 대체로 이를 수용하였다. 자연스럽게 보우는 사찰의 주지 임명권과 불교계를 통괄하는 승권을 갖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왕비 노국공주가 아기를 해산하다 죽자, 공민왕은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정사를 관여치 않았다. 이때 등장한 승려가 편조(遍照)인데, 바로 신돈(?~1371)이다. 이 무렵 보우는 공민왕에게 “신돈은 삿되고 좋지 못한 승려로 불법을 해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며 탄핵을 올렸지만, 공민왕은 이미 신돈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신돈은 김원명의 추천으로 기용되어 정치에 관여하면서 진평후(眞平侯)라는 봉작을 받아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다. 외부로는 공민왕을 도와 반원(反元) 세력을 키워나갔고,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을 타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는 토지개혁 관청을 두어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소유한 토지를 양민에게 돌려주고, 자유를 얻고자 하는 노비를 양인으로 신분 상승시켰다. 또한 신돈은 승권을 가지고 있던 터에 천희(千熙)를 국사로, 선현(禪顯)을 왕사로 책봉하였다. 보우는 왕사의 인장을 반납하였고, 신돈은 자신이 당했던 대로 왕권을 이용해 보우를 속리산에 금고(禁錮)시켰다.
국가재정을 관리하고 민중 편에 섰던 신돈은 노비나 양민들에게는 인심을 얻었지만 권문세족과 사대부로부터 미움을 한 몸에 받았다. 신돈이 정권을 누린지 6년 만에 유학자와 권문세족의 반발로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했다. 신돈이 죽고 3년 후, 공민왕도 죽으면서 자주 국권으로서의 회복이 완전히 좌절되었다.
태고 보우는 속리산에서 풀려나와 다시 국사로 책봉되었으나 거절하였다. 보우가 불교사에 남긴 업적은 결코 적지 않다. 선사는 광명사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해 종단의 화합을 꾀하였고, 최고의 승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권력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소설산(小雪山, 현 경기도 양평군)으로 들어가 많은 제자들을 길렀고, 고려의 간화선을 정립한 대선지식이다.
태고 보우와 신돈을 비교해보자. 보우는 현재 조계종 종헌 종법에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을 만큼 조계종의 큰 선지식으로 남아 있다면, 신돈은 역사에 요승ㆍ괴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보우는 귀족 홍주 홍씨 가문으로, 선사가 원나라에 가서도 황제와 귀족들에게 환대받을 만큼 출신 성분이 높았다. 반면 신돈은 모친이 천민출신이다. 보우가 보수파 권력층과 가까웠다면, 신돈은 양민 편에 서 있었다. 또한 보우는 당시 귀족불교의 대표자였다면 신돈은 서민 입장에 선 민중불교 승려였다.
그런데 소납의 뇌리 속에는 권력승으로서의 보우에 대한 이미지가 있으며, 그 반동으로 상대편에 있던 신돈이 평가 절하되지 않는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신돈의 집권 기간은 매우 짧았지만 개혁을 통해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갈 신진 사대부들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신돈을 요승이라고 할 수 없으며 보우를 최대의 선사라고 볼 수 없다. 즉 선과 악으로 양분해 역사를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이다. 보우가 선사로서의 최선의 길을 걸었다면, 신돈은 천민 출신 개혁자로서의 길을 보여주었다. 다만 이들이 동시대의 인물로서 서로 다른 길에 서 있어 영원히 도반이 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각각 인물 그 자체만으로 평가하자. 그런데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진 신돈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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