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34. 동대사와 국분사-국가불교 시대
배불파의 쿠데타…천황, 불교를 장악하다
소가씨 100년 세도 막 내리고 천황중심 대개혁
1. 소가일족의 멸망과 율령체제의 확립
동대사대불. 현재 좌대 부분은 창건 당시의 것이지만 나머지는 후대에 보수된 것이다. 사진제공=김춘호
645년 6월12일, 삼국(三國, 백제.신라.고구려)에서 보내온 사신들을 영접하기 위한 연회가 태극전(太極殿) 앞에서 성대히 행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일본 고대사의 흐름을 결정짓는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잇시노헨(乙巳の)이라고 불리는 쿠테타가 그것이다.
이 쿠테타를 주도하였던 인물은 나카토미노가마타리(中臣鎌足)와 나카노오오에노미코(中大兄皇子)였다.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배불파로서 모노노베씨와 함께 참전하였던 나카토미씨족의 수장이기도 하였던 가마타리는 조정의 실권은 물론 천황승계까지도 마음대로 일삼는 소가일가의 전횡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카노오오에노미코에게 접근하였고 모든 실권은 천황가에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설득 당하였던 것이다. 사건현장에서 나카노오오에노미코가 휘두른 장창에 소가노이루카(蘇我入鹿)는 즉사하였고, 이튿날 아들의 처참한 주검을 확인한 소가노에미시(蘇我蝦夷)는 스스로 저택에 불을 지르고 자결함으로써 4대 100년을 이어왔던 소가씨의 시대가 막을 내린다.
쿠테타 직후 쿄코쿠텐노(皇極天皇)가 퇴위되고 나카노오오에노미코의 아버지 쿄우토쿠텐노(孝德天皇)가 즉위하였다. 황태자 나카노오오에노미코, 권력의 중추인 우찌츠오미(內臣)에는 나카토미노가마타리가 임명되었고, 그 밖에 주요 보직들도 모두 그들의 측근들이 장악한다. 6월19일, 아스카테라(飛鳥寺, 당시는 法興寺)에 소집된 관료들과 유력호족들 앞에서 코우토쿠천황은 “군신의 도리를 어지럽힌 역도는 죽었다.
이제 임금의 도(道)는 오직 하나이며, 임금에 대해 신하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새로이 대화(大化)라는 연호를 정하고 새 정권의 출발을 공표하였다. 소가씨 정권의 정신적 성지나 다름없었던 아스카테라에서 소가씨의 멸망을 알리고 새 정권에 대한 충성을 서약 받았던 것이다.
656년 1월, 이윽고 다이카노카이신(大化の改新)이라고 일컬어지는 대 개혁이 단행된다. 그 주된 내용은 호족들의 소유였던 사유지와 사민(私民)들을 모두 천황에게 복속시키며(公地公民制), 호적을 만들어 공민(公民)들에게 공전을 분할하고 대신 공민들은 세와 노역을 부담하며, 호족들의 정치.경제적 기반이었던 구니(國).코오리(郡).아가타(縣) 등을 정리하여 영제국(令制國, 율령제에 근거한 지방행정구역)과 그에 복속된 코오리(郡)로 개편시키는 등이었다.
또한 종래의 특정 씨족이 특정 관직을 세습하는 시나베(品部)를 폐지하고 관료조직을 개편하였으며, 순장 등을 엄히 금하는 박장령(薄葬令)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일본 고대사에 있어서 율령국가로서의 기틀이 마련된 셈이었다.
나라에서 사찰 지원 관리…스님들도 순응
2. 씨족불교에서 국가불교로
개혁의 요구는 불교계도 예외일 수 없었다. 645년 8월, 다이카노카이신이 공표되기 넉 달 전에 이미 불교계의 변화는 시작되었다. 코우토쿠정권은 아스카테라에 전국의 스님들을 집결시킨다. 이 자리에서 코우토쿠텐노의 불교흥륭에 대한 신념과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시키기 위한 방안들이 공표된 것이다.
그것은 십사(十師)를 임명하여 스님들의 지도를 담당케 하고, 전국의 각 사찰마다 사무(寺務)를 총괄하는 사주(寺主)와 사찰의 조영과 수리, 자재의 관리를 위해 사사(寺司)를 임명.배치시키며, 이들 사원들을 돌며 스님과 노비, 재산 등을 감독하는 법두(法頭)를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소가씨와 그 지지호족들에 의한 불교의 지원과 관리를 국가가 담당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사원세력들로서도 일단 새로운 정권이 배불이 아닌 숭불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안도하였으며, 단순히 불교흥륭의 주도권이 소가씨에서 천황가로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반발은 없었다. 십사로 임명된 인물들 중에는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혜관(惠灌)과 도등(道登)이 포함되었으며, 나머지도 대부분 이들의 제자나 도래인 출신의 스님들이었다.
645년 12월 코우토쿠정부는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사카)로 옮긴다. 647년 십사를 비롯한 승니들을 초청하여 궁중에서 관불회(灌佛會)와 우란분회(盂蘭盆會)가 행해졌으며, 이는 곧 정례화 되었다.
일본 나라시에 있는 동대사는 일본불교 화엄종의 대본산이다. 노사나불을 모시고 있는 대불전은 세계최대의 목조건물로 꼽힌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648년에는 삼국(고구려.백제.신라)에 유학승을 파견하였으며, 650년에는 장육불과 협시.팔부중 등의 36상과 천불을 조성할 것을 명한다. 651년에는 스님 2700여 명을 궁중에 불러 일체경 독경이 행해졌고, 이듬해 12월에도 전국의 스님들을 궁중에 불러 대규모 공양과 희사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코우토쿠정권의 불교정책은 이른바 ‘씨족불교(氏族佛敎)’에서 ‘궁중불교(宮中佛敎)’로의 전환이었으며, 불교흥륭의 주도권을 천황이 가지고, 불교는 천황의 왕권옹호와 진호국가(鎭護國家)를 기원하는 수단으로서 정착하게 되는 ‘국가불교(國家佛敎)’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후 100년이 넘게 일본불교는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국가의 불교가 된다.
쇼무텐노 전국 각지에 국분사 건립 대불사…국가불교 ‘절정’
3. 국분사의 건립과 대불 건조
쇼무텐노(聖武天皇, 재위: 724-749)기에 이르러 국가불교의 양상은 그 절정을 이룬다. 일본 전국에 7층 목탑을 갖춘 국분사(國分寺, 정식명칭은 ‘金光明四天王護國之寺’)와 국분니사(國分尼寺, 정식명칭은 ‘法華滅罪之寺’)가 각각 건립되었고, 수도 야마토노구니(大和)의 토다이지(東大寺)와 홋케지(法華寺)는 총국분사, 총국분니사로서 전국의 국분사와 국분니사의 총본산이 된다. 당시 토다이지를 비롯한 이들 국분사는 그 지역에 있어서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로서 천황의 권위와 일본불교의 위상을 만천하에 자랑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739년 일본 전역에 천연두가 크게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이에 쇼무텐노는 각 구니(, 당시 일본의 지방행정단위)마다 석가불상 협시보살불상 1구씩을 조성케 하고, 아울러 <대반야경(大般若經)>을 한부씩 사경하게 하였다. 이듬해 쇼무텐노는 다시 한 번 전국의 구니마다 <법화경> 10부씩을 사경케 하고 7층 목탑을 건립하여 이를 봉안하게 한다.
그러나 천연두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741년 전국의 국분사 건립으로 이어진다. 불보살의 힘을 빌어 천연두의 유행을 막고자 하는 것이 당면목표였지만, 690년 당나라의 측천무후에 의해 각 주마다 대운광명사(大雲光明寺)를 두게 한 것을 쇼쿠텐노가 모방한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국분사에는 스님 20명을 두게 하고 매월 8일에 <최승왕경(最勝王經)>을 전독하게 하였으며, 승사(僧寺)에는 수전 십정(水田 十町)과 식봉(食封) 50호를 니사(尼寺)에는 수전 십정을 주어 그 수입이 국분사의 조영과 운영의 비용으로 충당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본 전국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국분사는 각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나라시대(奈良時代) 말미에는 거의가 완성된다.
한편, 국분사 건립이라는 전국적인 대 불사와 아울러 수도에서도 동대사의 건립과 높이 약 16m, 무게 약 500여 톤에 이르는 노사나좌불(동대사대불)의 조영이 시작된다. 743년 쇼무텐노의 발원으로 시작된 대불의 조영은 엄청난 재정적 부담에 가로막혀 좀처럼 진행되지 못하다가, 당시 민중구제 사업 등으로 전국적 지지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던 행기집단(行基集團)을 끌어들임으로서 성사될 수 있었다.
행기는 승니령(僧尼令)에 의해 엄하게 금지하고 있었던 이른바 사도승(私度僧)이었지만, 막대한 자금과 노동력이 필수조건이었던 대불조영에는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던 것이다. 쇼무텐노는 그를 스님의 최고 지위인 대승정(大僧正)으로 임명하고 대불조영 사업을 그에게 위임한다.
당시 행기는 77세의 병든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대불조영의 참가를 부르짖었고, 대불의 주조를 무사히 마쳤던 749년 입적한다. 752년 4월9일, 이미 보위를 코우켄텐노(孝謙天皇)에게 양위한 쇼무텐노와 천황 내외, 각국의 축하 사절, 귀족, 관료, 스님 등 1만 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인도출신의 스님 보다이센나(菩提僊那)의 주례로 대불개안법회가 성대하게 이루어 졌다.
총국분사로서의 동대사에 노사나불과 전국 각지의 국분사의 건립을 통해 일본국토를 화엄장의 이상세계로 만들고자 하였던 쇼무텐노의 꿈이 일단의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일본은 화엄장의 낙원세계가 되지는 않았지만, 지방의 일반 민중들까지도 불교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하였던 중요한 계기였으며, 불교전래로부터 2세기만에 일본사회에서 불교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그 중심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 춘 호 / 원광대학교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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