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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하나
1997년이던가... 제가 조지아대학교(University of Georgia, 약칭 UGA)에 학생이랍시고 들락거리고 있던 시절. 하인즈는 학교의 영웅이었습니다.
당시 '쿼더 백'을 맏고 있던 선수가 보보(Bobo)라는 선수였는데, 그는 볼 배급의 실수가 잦아 제가 늘 '바보'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그 때 UGA 풋볼 팀에는 희안한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풋볼이라는 스포츠는 선수별로 포지션이 매우 정교하게 분업화되어 있습니다. 예컨데, 볼 배급을 하는 선수(쿼터 백)는 볼 배급만하고, 쿼터백이 던져주는 볼을 받아 뛰는 선수(와이드 리시버)는 그 일만 하지요. 또, 필드 골을 넣는 선수(키커)는 공차는 일만 하고, 수비진 역시 수비만 하는 식이지요. 따라서, 한 선수가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UGA팀에는 이런 면에서 별종인 선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와이드 리시버를 하기도 하고 쿼터백을 하기도 하는가 하면, 가끔은 전혀 엉뚱한 포지션에 있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학교의 야구팀의 일원이기도 했으며, 대개의 대학 스포츠 선수들이 등안시하는 학과수업도 충실한 친구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얼마 후 누군가가 제게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그의 이름은 하인즈 워드이고, 한국인 어머니를 둔 한국계 미국인이라구요.
아무튼 그 때부터 저는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기억 둘
IMF로 학비내기가 막막해지자 어짜피 별로 관심도 없었던 대학공부를 때려치우기로 작정하고 식당에 취직을 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학비를 번다는 핑계로 식당 일을 시작했지요.
당시 제가 다니던 직장은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꽤 알려진 식당 중 하나라 동네 출신 유명인사들이 가끔 들락거리는 곳이었습니다. 이 곳 출신의 영화배우 킴 베싱어나 그녀의 남편 알렉 볼드윈, 또 록그룹 R.E.M 멤버들을 만난 곳도 그곳이었습니다. 물론, 요리사와 손님의 관계로 만난 것이라 그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형식적인 인사치례를 포함한 몇 마디가 고작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손님 앞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요리가 대충 끝나고 자리를 뜨려는데 앞자리에 앉아있던 한 흑인 친구가 제게 한국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뜻 밖의 상황이라 그제서야 저는 그 손님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그가 하인즈였습니다.
물론 그가 제게 한 한국말이라고는 '감사합니다.', '나는 하인즈입니다.'가 고작이었지만, 한 동안 그 일은 제게 꽤 이야기거리가 되었습니다.
기억 셋
하인즈가 그림같은 터치 다운으로 수퍼 볼에서 우승한 다음 날.
인터넷에는 그의 소식으로 이른바 도배가 되어있었습니다. 그가 어디에서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성장을 했고, 어느 학교를 거쳐서 스틸러스에 입단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시시콜콜하게 나와있었습니다.
기사를 읽다가 제 머리 속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한국에서는 미식축구가 생소한 스포츠일텐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나 열광을 할까.
기억 넷
오늘 신문에는 하인즈가 한국을 떠나며 가진 인터뷰가 여기 저기 실려있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미국에 있을 때는 백인들이 내게 흑인이라고 말하고, 흑인들은 나를 코리안(Korean) 혹은 외국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곳에 오니 한국인들이 나를 한국인이라 불러줬다."
기사를 읽다가 갑자기 제 머리 속에는 오래전 교과서에 나왔던 시가 하나 떠 올랐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엉뚱한 생각
김춘수님의 시를 읽다가 문득 이런 낙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의 몸짓'이었을 때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그가 꽃이 되자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꽃은 처음부터 꽃이었다. 그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우든, 꽃은 꽃이었다.
그 색이 빨갛든. 하얗든, 노랗든 꽃은 꽃임으로서 이미 충분히 값있고 아름다운 것이다.
빨간 꽃, 하얀 꽃, 노란 꽃... 어떤 색깔의 꽃이라도 그저 꽃으로 불리우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싶다.
(사족)
저는 강아지 두 놈을 자식으로 두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의 앨범 코너에 그 놈들의 사진이 있습니다.)
큰 놈은 이른바 족보까지 가지고 있는 순종 시베리안 허스키이고, 둘째 놈은 진도개의 피가 섞여 있다는 풍문만 들은 잡종입니다.
두 놈은 늘 같이 놀고, 먹고, 자면서 아무 탈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
http://blog.ohmynews.com/guevara49/Home.asp?Artid=8500 |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인종주의의 독버섯이 강하게 자라가는 러시아에도 읽혀 주고 싶은 글입니다. 물론 혼혈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더 천박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후아...이건 4년전 댓글인데...상트페테르부르크 날씨는 어떤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어떤 색깔의 꽃이라도 그저 꽃으로 불리우는 그런 세상"
"두 놈은 늘 같이 놀고, 먹고, 자면서 아무 탈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ㅎㅎ
박교수님 시도 멋져요. *^^*
혼혈 하인즈워드에 대해 열광하는 것....좀 유명하다고 광풍처럼 쏠리는 것
(이런 때는 우리 핏줄이라고 해요)
국내에 있는 혼혈인에 대한 비하 무시 간극이 너무 커서 어느 것이 진짜인 지 모르겠어요.
앞으로 특히 시골의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을 어떻게 감쌀지....혼혈인에 대한 심한 편견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골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앞으로 큰 사회 문제가 될 것 같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