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길목에 들어선 날씨의 변덕이 새삼 느껴진다. 이틀 전부터 오전엔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제법 차갑다. 우리처럼 초로에 들어선 사람들이 더욱 건강에 신경을 써야한다. 집어넣어두려던 겨울용 점파를 다시 챙겨 입고 행사장으로 간다. 10여분 전 2시에 테이블 상태를 점검하러 당구장에 들어선다. 친구 어느 누구도 와 있으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생각과는 달리 권영현과 박재진이가 국제규격의 테이블에서 진지하게 게임에 몰입해 있다. 겨루기보단 오랜 연륜이 쌓인 영현이가 작년부터 바람이 깊게 든 재진을 가르치는 현장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전까진 바둑애호가였던 재진의 당구치는 솜씨가 빠르게 진보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젊은 시절을 빼놓곤 촌로에 접어들어 재진이 만큼 당구에 몰입하고 있는 사람을 거의 본적이 없다. 자나 깨나 공이 아른거려 시간만 나면 당구장을 찾고 있단다. 한편 계속 들어올 친구들 때문에 걱정이 앞선다. 생활화되어 코로나의 위험을 거의 무시하고 있는 탓에 당구장이 붐비고 있다. 특히 토요일이라 빈 테이블이 없어 난감하기 짝이 없다.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기원으로 오른다. 예상과 달리 이미 박병현과 문원표가 거의 한판을 끝내가고 있다. 바둑을 둘지 모르는 소생이 보아도 둘의 차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원표가 계가를 마치고 승리를 선언하며 반상의 돌을 치우자 병현이가 쾌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원표가 3점차의 승리라고 하며 그것도 못 읽느냐며 병현을 구박한다. 곧 이근지가 들어서 병현과 자웅을 겨룬다.
원표와 당구장으로 내려오니 아직도 둘 뿐이다. 하던 게임을 멈추고 셋이서 함께 큐 전투에 빠져든다. 30여분 지나니 김순화, 김영후, 강윤구, 김대련, 박춘식 그리고 이승권이 연이어 들어선다. 인사를 나누고 윤구와 대련은 곧바로 기원으로 가 반상에 마주한다. 남아있는 테이블이 없어 영현이가 고육지책으로 차지하고 있는 테이블에서 두 팀이 번갈아 치는 안을 내놓는다. 어쩔 수 없는 방책이지만 열기가 반감할 수밖에 없다. 당구장도 협소하고 국제규격 테이블도 적어 다음부턴 낙원동 근처의 당구장과 기원을 영현이가 제안해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다. 4시경 일반 테이블이 하나 비어 마침내 둘로 나뉘어 게임에 맘껏 몰두한다. 곧 기우석이가 나타나 인사를 나누고 기원으로 오른다. 후에 대련과 잠시나마 반상에서 집 싸움을 벌인다.
5시에 게임을 접고 근처의 식당에서 푸짐하게 돼지고기를 구워들며 반주와 함께 회연을 갖는다. 고기질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반찬이 무척 맛깔나 모두가 연달아 시켜든다. 김홍주가 여흥이 한참 무르익는 중 나타나 넉살좋게 이곳저곳을 누빈다. 2시간여의 충만한 회식을 마치고 세 팀으로 나뉘어 기원, 당구장, 노래방으로 가 새롭게 시간을 즐긴다. 종로 바닥의 왕초인 영현이가 5명을 안내한 노래방은 완전 노털로 인산인해다. 우리가 영계로 보일 정도다. 춘식이가 분위기에 완전 빠져 플로어에 나가 뒤범벅이 되어 개다리 춤을 춘다.
한 시간여 즐기다 8시20분경 길로 나선다. 행사에 자주 나타나는 친구들은 죽음에 이르는 불행함을 눈에 뜨이게 빗겨간다는 영현의 말이 귓전에 맴돈다. 기력이 있을 때 친구들이 함께 모여 순수하게 즐기는 것도 건강을 유지하는 한편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지하철에 몸을 얹는다.
함께한 친구들: 강윤구, 권영현, 기우석, 김대련, 김순화, 김영후, 김홍주, 문원표, 박병현, 박재진, 박춘식, 서규석, 이근지, 이승권, 최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