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 높은 목적은 성불입니다.
만일에 어느 목사님이나 신부님이 기도하는 목적이
하나님이나 천주님이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 사람은 걷 이단자라고 해서
교회나 성당에서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그분들은 기도를 통해서
오직 신의 은총을 기대 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더 쉽게 얘기한다면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교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 겁니다.
그러나 불교는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목표입니다.
물론 자질구레한 세속적인 소원도 기도 목적이 될 수 있지만,
가장 차원 높은 목적은 성불로 꼽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의 신앙 목적,
기도 목적과는 그 근본부터가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닙니다.
조물주가 만들어 낸 존재가 아닙니다.
완구 공장에서 만들어 낸 것처럼
말하고 웃는 그런 인형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스스로 독립된 존재,
가장 고귀한 생명체들입니다.
비록 지금은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로 타락해서
작은 일에도 성내고,
하찮은 일을 가지고도 양보할 줄 모르는 편협한 인간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범부 중생으로 살고 있지만.
결코 구군가의 손에 만들어진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 가운데 무궁무진한 능력과 지혜를 갖추고 있는
부처님이나 신과 똑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자신 가운데
간직된 지혜와 능력을 개발하기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바랄 것이 없는데 기도는 무엇 때문에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이것,
자신의 무한 능력을 개발하는 일,
성불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처도 아니고,
신도 아니기 때문에
온갖 고통을 감수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제 자신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자시 자신의 정체를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고
고통 받는 우리에게 너 자신을 깨달으라고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소원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정체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오는
욕구불만의 표출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과는 달리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소원들은
알고 보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우리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보살님도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네 마음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 마음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말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너도 나도 자신 가운데 부처를 간직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것을 미처 모르고 자질구레한 것들에 기도를 하는 겁니다.
더 쉽게 얘기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음기도를 하면
우리 스스로가 관음보살이 되어야 하고,
지장기도를 하면
우리 스스로 지장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도하는 동안만이라도
보살노릇을 해야 합니다.
입으로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씀드린다면
말과 뜻과 행동이 보살되어야 하고,
말과 뜻과 행동이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든 지장보살이든
명호를 부리기만 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드리는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2024년 08월 31일 오전 05:51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운월야인雲月野人 진각珍覺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