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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행복한 숲에서 발행한 <대념처경 주석서 3권>을 불교방송 순서대로 연재
붓다께서 45년 동안 설하신 법문은 이렇게 수행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이 대념처경입니다. 붓다께서는 이것은 내가 경험한 유일한 길이니 모두 이 길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왜곡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가르침에 대한 주석서에 의지해서 가르침의 뜻을 지켜왔습니다. 처음에 붓다고사가 쓴 청정도론을 시작으로 많은 주석서가 가르침의 뜻을 계승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가르침의 뜻에 동참하고자 미천한 경험을 살려 대념처경 주석서 1권, 2권, 3권을 출판한 바 있습니다. 출판된 대념처경 주석서 중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이제 대념처경 주석서 3권을 모든 수행자들이 보실 수 있도록 조금씩 옮겨 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수행에 도움이 되시기를 삼가 기원합니다. 묘원합장
▣ 제147회 법문
모든 행위는 하려고 하는 마음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이때의 마음은 그 순간의 마음이지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은 그 순간의 조건에 의해 빠르게 일어나서 사라져 버립니다. 이때 조금 전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과 지금 이후의 마음 중에 어느 마음이 나의 마음일까요?
마음은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지 여기에 나의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에 의해서 일어난 행위도 나의 행위가 아니고 그 순간의 행위일 뿐입니다. 그래서 행위에 의해 일어나는 과보를 받는 자도 없습니다. 마음에 의한 행위와 행위에 의한 과보가 저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갈 뿐이지 내가 굴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과 즐거움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조건에 의해서 한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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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넷째,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수행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최종적 관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선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수행을 충분히 해서 네 번째인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 수행까지 해야 합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앞선 세 가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병행하여 할 수도 있고, 다른 수행을 익힌 뒤에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수행은 다른 수행에 비하여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 수행을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함으로써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으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이 희미해질 때 더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수행이 잘 안 될 때나 수행이 잘 될 때나 언제나 알아차려서 마음이 싫어하거나 좋아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지혜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수행입니다. 수행을 해서 몸이 소멸하면 호흡과 느낌이 사라집니다. 이때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마지막 단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도과를 성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수행을 바르게 익히면 마지막에 별다른 장애 없이 도과를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 단계의 마음은 매우 미세하므로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그 미세한 마음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도과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의 과정을 평소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다른 말로 하면 ‘알아차리는 마음을 지켜보기’라고 하거나 또는 더 줄여서 그냥 ‘앎’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뒤에 일어난 마음이 앞에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에서 처음에 있는 ‘아는 마음’이란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1차 행위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있는 ‘알아차리기’란 대상을 알아차리는 그 마음을 대상으로 새로 알아차리는 2차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현재 일하고 있는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알아차리거나 또는 ‘지금 내 마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일하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알아차리는 통로를 통해서 마음의 영역에 들어가야 합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보이지 않고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러한 문장을 통해서 마음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마음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좌선 중에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알아차렸다면 이때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알 수도 있으며, 망상을 하는 것을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있는 것을 알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졸고 있거나 통증이나 가려움과 싸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상황에 직면해 있을 때 마음을 새로 내서 이런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린 뒤에 만약 수행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있을 때는 즉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 있을 때는 계속해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대상을 면밀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이익이 있으며,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좌선을 할 때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경행을 할 때나 일상생활을 할 때나 모두 적용됩니다. 그래서 항상 일하는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새로 지켜보는 마음이 일하는 마음을 확인하고 감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일하는 마음이 망상을 하거나 다른 일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망상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내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요약하면 두 가지 현상을 알 수 있게 되어 도움을 줍니다. 첫째, 마음이 수행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를 아는 것입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집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청한 상태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대상과 싸우고 있을 수도 있고, 수행이 하기 싫어서 짜증을 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거나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때 망상을 하고 있다면 망상을 문제 삼지 말고 단지 ‘지금 내 마음이 망상을 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둘째는 마음이 대상을 겨냥하는 수행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아는 것입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거나 아니면 느낌을 알아차리고 있거나 어떤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 이렇게 알고 있는 마음을 다시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상이 명확해지고 더 견고한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두 가지 현상 중에 어느 상태가 되었거나 일하는 마음을 다시 한 번 현재로 오게 하여 대상을 알아차리게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지속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수행자는 이런 알아차림을 통해서 차츰 마음의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매 순간 항상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과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서 새로운 대상을 경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첫 번째 상태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새로 알아차림을 일으키게 합니다. 두 번째 상태에서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일차적 현상이 있는 상태에서 다시 한 번 대상을 알아차리는 이차적 현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에 해당되는 경우에 수행자는 먼저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을 대상으로 다시 한 번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수행을 하는 수행자들은 일반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모릅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알 수 있으나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까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먼저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고,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를 한 뒤에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은 마음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일하는 것을 안 다음에 일하는 그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이것이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약간의 저의 수행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때 미얀마의 마하시 명상원에서 몇 년간 수행을 한 뒤에 쉐우민 명상원으로 옮겨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쉐우민 사야도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지도한다고 해서 몇 년을 벼르다가 어렵게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쉐우민 본원은 너무도 환경이 열악하여 외국인 수행자를 받을 수 없을 정도여서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그처럼 훌륭한 법이, 그처럼 유명하지 않은 분에게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법 앞에 열악한 환경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쉐우민 사야도를 친견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간단한 지도를 받았습니다. 이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말씀하시면서 손으로 가슴을 가리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이 가슴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기 위해서 항상 마음을 가슴에 두고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경행을 할 때도 마음을 가슴에 두고 경행하는 움직임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먹을 때도 마음을 가슴에 두고 알아차리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가슴을 통해서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 며칠 뒤부터 그만 가슴에 단단함이 생기고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계속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2개월을 보낸 뒤에 어느 날 점심공양을 하기 위해 비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양을 기다리는 대열은 법랍 순서로 서서 기다립니다. 이때 제 바로 앞에 서 있는 비구에게 언제 환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느냐고 물으려 하다가 물으려고 하는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이렇게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에 제가 물으려고 하는 저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미얀마에서는 일시출가 제도가 있어서 일정기간 수행을 한 뒤에 집으로 돌아갑니다. 제 앞에 선 비구나 저나 바로 일시출가자로서 비구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할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서 있는 비구에게 언제 집에 돌아가느냐고 물으려 하는 마음을 알아차린 순간 제 자신이 부끄럽고 참혹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물으려고 했던 마음에는 앞에 서 있는 비구가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비구가 집에 가면 제가 법랍이 높은 스님들과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제 뒤에도 많은 비구들이 있었지만 항상 앞에 있는 비구들만 본 것입니다. 일시 출가자가 법랍이 높은 비구들 행세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제 자신의 마음이 추악해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미얀마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한 지 5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어서 제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수행을 포기하고 귀국을 하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점심공양을 할 때 너무 참혹해서 음식이 입에 넘어가지를 않았습니다.
이튿날 면담시간에 사야도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사야도께서는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고 그 순간의 마음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즉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자아의 덫에 걸린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스승께서 하신 이 말을 이론적으로는 저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제 자신이 직접 당하고 보니 이것을 내 마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도 바로 관념과 실재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으로는 아무리 알아도 자신의 문제에서는 실재를 적용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때 공양 대열에서 제가 알아차린 것이란 바로 말을 하려고 하는 제 마음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입니다. 이렇게 2개월 만에 우연하게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순조롭게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가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은 몸과 함께 있지 뇌나 심장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몸의 어느 특정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곳이나 마음이 가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마음이 손을 주시한다면 이때 마음이 손과 함께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손에 보내는 행위가 있어야 마음이 손에 갑니다.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대상과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이란 세 가지가 항상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제148회 법문
모든 것은 마음이 이끕니다. 마음이 있어 행위를 하고, 행위가 과보가 되어 다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속적인 과정이 윤회입니다. 과거의 무명이라는 마음이 있어 업을 형성하여 현재를 있게 한 것입니다. 현재는 재생연결식이라는 마음이 있어 정신과 물질이 생긴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원인이 되는 현재는 갈애라는 마음이 있어 집착을 하여 업을 생성합니다. 미래는 태어나는 마음이 있어 태어남이 생기고, 이로 인해 죽는 결과가 있습니다. 결국 마음이 있어 몸이 생기며, 몸이 생기면 죽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이끄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무아의 지혜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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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스승이신 쉐우민 사야도께서 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신 것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에 의해서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마음을 계속해서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마음이 남긴 느낌을 가슴에서 계속 지켜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마음이 가슴에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그만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마음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전부 실천할 수 있는 수행방법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념처를 모두 실천할 수 있으며, 집중력을 키우는 훌륭한 방법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위에 돌을 던졌을 때 돌은 사라지고 돌로 인해서 생긴 파문이 일어납니다. 이때 물속에 가라앉은 돌은 마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이렇게 일어나는 순간에 돌이 물에 가라앉듯이 즉시 사라집니다.
그리고 물위에 돌을 던질 때 생긴 남아 있는 파문이 바로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꼭 가슴이 아니고 머리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때로는 몸의 어느 위치에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곳이나 강하게 나타나는 느낌이 있는 곳에서 마음이 남긴 흔적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만약 이렇게 강한 느낌이 없을 때는 자연스럽게 덤덤한 느낌을 알아차리거나 호흡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나타나는 느낌도 모두 다릅니다.
그리고 빨리 가슴으로 가서 알아차리면 아직 느낌의 영향이 적기 때문에 강한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도 그냥 그 상태의 느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의외로 가슴에 느낌이 없는 수행자가 있을 수가 있으나 이런 경우에는 특별한 느낌을 찾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있는 덤덤한 느낌도 중요한 느낌의 하나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아무런 느낌이 없으면 몸에 있는 다른 강한 대상을 찾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느낌이 없더라도 마음을 그냥 가슴에 머물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미세한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은 강한 망상이 왔을 때는 강하게 일어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가슴의 느낌이 고요할 수 있습니다.
가슴의 느낌이 아니더라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호흡도 거칠거나 미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가슴만 지켜본 것은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관념과 실재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겉으로 드러난 모양과 그 모양이 가지고 있는 실재가 있습니다. 이때 실재는 지혜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슴에 생긴 단단함으로 인해 얼마간 의도적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처럼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이제는 본격적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는 하나이지만 나타나는 상태가 다릅니다. 그리고 나타나는 마음의 종류도 다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상황에서 다양하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하나씩 기록으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수년 동안 정리한 것이지만 이렇게 해서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체계화한 뒤에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까지를 완성시켰습니다.
얼마 동안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니 스승께서는 이제부터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말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마음은 분명하지 않은 것이라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복잡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을 정리하면서 수행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마음이 무엇인지 드러내놓고 설명하기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말해 주어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바로 이것이 정신세계의 현실입니다.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지혜는 아무리 손에 쥐어주어도 무슨 말인지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나 아는 마음이 무엇이고, 어떻게 알아차리느냐고 물어도 사실 명쾌한 대답을 듣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고심을 하면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기 위해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부터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야도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기 어려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는 자부심에 더 열심히 정진을 했습니다.
이렇게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하면서 정진을 하는데 어느 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좌선을 하는 중에 문득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알아차려보았습니다. 이렇게 일하고 있는 마음을 점검해 보니 그 순간에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한다고 했던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바로 알아차린 뒤에 지난번 것이 단지 생각으로 안 것이라고 확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지켜보니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을 뒤에 생긴 마음이 지켜본 것입니다. 바로 이때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새로 낸 것입니다. 사실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이러한 이론은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고, 한참 뒤에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이런 이론 없이 그냥 막연하게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이런 상태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에 대상이 분명해지고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졌습니다.
이때 고요함과 함께 대상을 완전하게 밀착해서 밀밀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호흡의 부드러운 느낌 하나하나를 더욱 면밀하게 알아차리게 되어서 처음에는 깜짝 놀라서 얼른 알아차림을 풀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다시 호흡을 알아차리려고 하면 이런 상태가 거듭 계속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것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기 전에 처음에 아는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했을 때는 사실 제대로 알아차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이처럼 분명하게 알아차린 것이 아니고 생각으로 알아차린 것이었고, 이런 사실을 자세하게 표현할 수가 없어서 분명하게 검증을 받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세계에 대한 표현의 한계입니다.
얼마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다가 귀국을 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다시 미얀마 쉐우민 명상원에 가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중에 이러한 집중의 상태가 한 시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만 이런 집중현상이 잠시 생겼었는데 이제는 한 시간 내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럴 수도 있는가? 이것이 혹시 삿된 길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얼른 이 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상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는데 역시 똑같이 밀밀한 집중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뒤에 한 시간 내내 이런 상태로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확신을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사야도께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야도께서는 이제 한 시간 동안만 그렇게 수행을 할 것이 아니고 앞으로는 하루 종일 그렇게 수행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때서야 이렇게 하는 수행이 삿된 길이 아니고 바른 수행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너무 밀밀하고 너무 분명해서 이것이 혹시나 잘못된 수행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던 것입니다.
수행자들은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처음에는 그것이 바른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스승에게 점검을 받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좋다고 판단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좋지 않은 것이 바른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경험에 의해서 하는 판단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많은 상태에서 경험한 것이라서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수행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정신세계를 탐험하는 것이라서 어떠한 속단도 금물입니다. 그래서 사야도께서는 항상 “‘수행자가 스스로 판단하지 마라. 판단은 내가 한다. 비구는 그냥 알아차리기만 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법이 요구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법이 요구하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경험이 있는 스승의 가르침이 없으면 수행의 발전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야도의 말씀에 의해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처음에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했지만 오래 지속할 수 없었던 것은 아직 집중력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수행을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약간의 흥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이제는 한 시간 내내 이렇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뿐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하루 종일 이렇게 마음이 ‘아는 마음을 알기’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들은 호흡이나 경행을 할 때 발의 움직임을 몸이 아닌 전면의 마음에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마음이 몸이 있는 곳에 가서 알아차리는 것보다도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시간이 더 길어집니다. 또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망상이 들어오면 얼른 망상하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어서 오랜 동안 망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망상을 하더라도 얼른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하는 마음을 새로 일어난 마음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망상을 하는 순간 빠르게 망상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다시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대상을 알아차리면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다 보면 몸에서 알아차리는 것보다 느낌이 분명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집중이 되면 알아차리는 힘보다 집중의 힘이 강해져서 마음이 점점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면 전면에서 다시 몸으로 와서 알아차려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면 집중의 힘과 알아차리는 힘이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노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노력이 알아차림과 집중의 균형을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항상 전면에만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힘이 약하면 몸으로 와서 실재하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 제149회 법문
믿음은 바른 마음에서 나오는 청정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믿으면 맹신에 빠지므로 위험합니다. 맹신은 눈을 멀게 하는 어리석음이며, 선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이런 믿음은 자신의 복을 기원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복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린 뒤에 충분히 납득했을 때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선한 원인을 만드는 것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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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서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라는 세 가지의 균형이 적절해지면 몸의 느낌이 다시 강해집니다. 그러면 다시 전면의 마음자리로 와서 대상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전면에서 알아차리는 것과 몸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심념처와 수념처와 신념처를 고루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수행을 하는 것이 바로 법념처입니다.
이처럼 전면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힘이 약해지면 다시 몸으로 와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 뒤에 다시 전면으로 가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에 속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대상의 위치를 전환하는 것도 새로운 마음을 갖기에 좋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지루함을 덜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수행이나 항상 문제가 있기 마련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도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다 보면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알아차림이 점점 약해질 수 있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의 힘이 커져서 졸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대상의 느낌을 실재하는 곳에서 알아차리지 않고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면 대상이 점점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것을 집중이라고 하는데 집중이 되면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을 약해지고, 집중의 힘이 커져서 결국에는 졸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가 다음 단계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지켜보아 집중력의 힘이 커져서 졸음에 떨어지지 않고 알아차림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한 뒤에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보완하는 차원의 수행방법이었습니다.
어떤 수행이나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새로운 방편을 마련하는 것이 스승들의 몫입니다. 스승들의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수행자는 보다 안전한 길로 법을 향해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계속하고 있을 때 사야도께서는 이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다음 단계의 주제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 말이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아 헤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니 이런저런 방법을 다 사용해서 수행을 해도 사야도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니 답답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한때는 화두가 되어서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의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여러 곳에서 통역을 해주신 한 지인의 도움을 받아서 뜻으로나마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쉐우민에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하는 말이나 마하시 명상원에서 앎을 하라고 하는 말이 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통역을 해주시는 한 분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분께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 줄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쉐우민에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라고 하는 것과 마하시 명상원에서 ‘앎’이라고 하는 것이 같은 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쉐우민에 오기 전에 마하시 명상원에서 수행할 때도 ‘앎’의 문제에 대하여 의문을 풀 수 없어서 제가 상기까지 와서 고생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말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 뒤에 마하시에서 결국은 상기를 해결했던 터라 뜻밖의 사실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다시 앎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냥 ‘앎’을 하라고 할 때와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라고 할 때 이것이 같은 말이지만 내용이 다른 것인 줄 알고 고생을 했던 것입니다.
마하시 명상원에서 수행을 할 때는 앎을 하라고 합니다. 이때의 앎은 아는 마음입니다. 이때의 앎은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합니다. 첫째, 대상을 아는 앎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이 잘 안 될 때는 잘 안 되는 것을 아는 앎입니다. 수행이 잘 될 때는 잘 되는 것을 아는 앎을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미워하는 것은 아는 앎을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났을 때는 화가 난 것을 아는 앎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거나 일하고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둘째, 호흡의 느낌과 몸의 느낌과 그리고 몸에 있는 호흡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을 때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아는 앎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몸의 느낌이 완전하게 사라져서 더 이상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남아 있는 것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방법이 바로 ‘앎’입니다. 이 앎이 아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앎이라고 할 때는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의 준말인 것입니다.
마하시 명상원에서도 이상의 두 가지 수행을 지도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하시라고 해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만 하는 곳이 아니고 신수심법 사념처를 모두 수행하는 곳입니다. 다만 쉐우민처럼 집중적으로 마음을 말하지 않을 뿐이지 어느 명상원에서나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면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통역을 해주시는 지인에게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와 ‘앎’이 어떻게 다른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명상원에서 사용하는 표현이 다를 뿐이지 같은 말이라는 것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인께서는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란 ‘노팅noting하는 것을 위칭watching’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영어로 노트note는 주의하다, 주목하다는 뜻이고, 워치watch는 지켜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알아차리는 것을 다시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와 ‘앎’의 분명한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불분명했던 말의 뜻이 한순간에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영어가 의미 전달을 하는 데 간결하게 뜻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알아차리는 것을 다시 지켜보기 위해서는 알아차리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는 대상을 붙잡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쉐우민에서도 일정기간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 뒤에 다음 단계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단계적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수행을 시작한 뒤에 지금 여기에 있는 몸을 대상으로 하나하나 알아차려서 집중의 힘을 키우면 차츰 그 단계의 지혜가 성숙합니다. 그러면 다시 다음 단계의 지혜를 위해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의 바른 과정입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에 대한 보다 명쾌한 이해는 그 뒤에 쉐우민 사야도를 친견하고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쉐우민에서 몇 년 동안 수행을 한 뒤에 마지막으로 쉐우민 사야도를 친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쉐우민 사야도께 말씀드린 질문 내용과 사야도의 답변입니다.
제가 사야도께 말씀드렸습니다. “호흡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사야도께서는 “아니다. 호흡이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몸의 느낌도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져서 아무것도 알아차릴 것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저를 쳐다보신 뒤에 “그런가, 그러면 이제 아는 아음을 알아차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가 “아는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야도께서는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즉시 제가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그랬더니 사야도께서는 “마음을 새로 내라.”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사야도의 말씀은 마음에 대한 가장 간결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음이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표현밖에 몰랐는데, 이 말은 마음을 한눈에 꿰뚫어볼 수 있는 매우 간결하고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사야도의 이 말씀을 들은 뒤에 비로소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것과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로 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하여 마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생겼던 것입니다. 마치 구름이 걷히고 달을 보듯이, 마음에 대한 뚜렷한 대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 이 두 가지 마음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과정에서 입체적 현상이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유체이탈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이 몸을 떠날 수 없지만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입체적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평소에 집중이 될 때는 위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입체적인 인식이 가능한 것이 매 순간 마음이 새로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여기에 있는 마음은 앞에 있는 마음이고, 뒤에서 지켜보는 마음은 나중에 생긴 마음입니다. 그래서 시간적․공간적 형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죽기 전에는 절대 마음이 몸 밖으로 나갈 수는 없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위에서나 또는 뒤에서나 또는 옆에서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 우리가 이것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집중의 힘이 생긴 상태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이런 현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만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이미 경험한 것들입니다.
부처님께서 펴신 법문은 이미 우리가 경험한 것들이거나 앞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했던 것이나 앞으로 모르고 행할 여러 가지의 현상을 이제 알아차림을 가지고 확실하게 해서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마음에 대해서 말씀드린 내용이 모두 스승님들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정리한 것들입니다.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2003년 90세에 열반을 하셨는데 제게 마음을 새로 내라고 하신 이 말씀이 마지막 면담이 되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언제나 한두 마디로 저의 막힌 것을 뚫어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 이래서 큰 스승님이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