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가 되기 전, 전날 밤 광란의 현장인 삼척 해변으로 나왔다. 폭죽 불꽃 현란한 조명 속의 바다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조용하다. 쓰레기 더미들만 난무한 해변의 모래밭에 환경미화원들의 땀과 한숨이 보인다. 우리는 언제부터 어떤 이는 버리고 어떤 이는 치우게 되었을까? 어떤 이는 누리고 어떤 이는 삭히며 살게 되었을까? 매일매일 이 모든 걸 다 보아왔을 바다는 아무 말이 없다. 여전히 파도만 밀어내고 담담할 뿐이다.
카메라를 들고 바다 수평선을 응시한다. 검푸른 색깔이 점차 벗겨지더니 까치놀 여명이 시작된다. 깜빡깜빡 붉은 기운이 솟아난다. 이내 아득한 수평선 위로 빨갛게 노을이 퍼진다. 손톱만한 노오란 해님이 노을 사이로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 조금씩 조금씩 머리를 들던 해님은 순간 빠른 속도로 얼굴을 쏙 내보인다. 숨을 참고 기다려 셔터 연타로 다다다다 집중 발사한다. 몇 장은 건졌으리라! 아무도 없는 새벽 해변의 일출을 나 혼자 찍었다. 아침 첫 햇살 받은 모래밭과 바다 풍경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 내게로 쏟아져 내리는 저 힘찬 에너지 덩어리를 팔 벌려 온몸으로 받았다. 내 앞을 비추는 나의 삶이 이토록 찬란한 것임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낭만 가도’ 표지판이 보인다. 삼척에 이어 이곳 동해에서도 보이기에 자세히 알아보았다. 강원도에서 고성, 속초, 양양, 강릉, 동해, 삼척에 이르는 동해안의 빼어난 절경을 낭만가도로 정해놓고 추억서린 사진을 공모하며 가족, 친구, 연인들을 부르고 있었다. 예전 사진과정을 수강하던 초보 사진시절 출사로 따라갔던 사진의 명소, 추암 촛대바위, 묵호 등대, 무릉계곡 용추폭포가 여기 동해에 속한다. 삼각대도 빨리 펴지 못해 가슴 졸이던 그 때를 생각하며, 느긋하고 여유자작하게 심혈을 기울여 사진을 찍어보리라. 비록 누구와 함께 하는 낭만가도는 아니어도 내 스스로 가슴에 남는 사진을 남겨보리라.
삼척 솔비치호텔을 지나자 바다 저 멀리 아스라하게 둥근 산 옆으로 바위군들이 보인다. 훌쩍 솟아오른 추암 촛대바위는 설레임과 함께 발길을 재촉한다. 거의 뛰다시피 하여 먼저 도착한 곳은 추암해변이 코 앞에 보이는 수로부인의 ‘해가터’ 이다. 남편인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던 중 바닷가 정자 ‘임해정’ 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갑자기 해룡이 나타나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단다. 놀라서 어쩔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머리 허연 노인이 나타나 ‘해가’ 를 부르며 땅을 쳐보라고 했단다. 사람들을 모아 해가를 부르며 작대기로 두드리니 해룡이 수로부인을 내놓았다고 한다. “해룡아, 나의 부인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 지금은 임해정은 없고, 해가터만 남아 있다.
기대 속의 추암해변은 불도저와 트럭들로 모래밭이 온통 상처투성이이다. 안전끈을 쳐놓고 돌아가도록 해놓았다. 대형 리조트를 건설할 모양이라며 여행객들도 눈살을 찌푸린다. 추암해변에서 바라보는 촛대바위는 도저히 찍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해안 산책로로 올라갔다. 산책로는 좁은데다가 촛대 바위가 잘 보이는 위치에는 사람들로 붐벼서 도저히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기다리면 된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으니 시간도 내 맘대로이다. 촛대 바위가 근사하게 보이는 곳으로 구불구불 산책로를 옮겨다니며 찍어본다. 파도가 하얗게 칠 때를 기다려 찍어보고, 저 멀리 들어오는 배가 촛대 바위와 다른 바위 사이로 지나갈 때를 기다려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을 만큼 찍고 또 찍었다.
조각공원을 돌아보고 묵호역 방향으로 향했다. 해양 발전 연구소 대형 단지 건물들이 서있는 바닷길, 쌍용시멘트 바닷길은 너무나 겁나고 삭막했다. 더욱이 코레일 철도 아래 논밭 사이 난 길, 물웅덩이 속을 빠져가며 건너고, 질퍽거리는 해파랑길은 너무 어거지로 만든 느낌이다. 간신히 동해역에 도착해 커피 한잔을 마셨다. 해파랑길 안내는 동해역에서 바로 묵호항으로 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 저녁까지 시간도 있고 신비경의 무릉계곡을 보고 싶어, 카페주인이 택시를 불러주기에 바로 무릉계곡으로 향했다.
천년고찰 삼화사를 지나자 무릉계곡은 초입에서부터 피서객들로 계곡마다 바위마다 웃음소리 떠드는 소리 요란하다.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니 점차 사람들이 적다. 비로소 이끼 낀 계곡과 작은 폭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곳곳을 사진 찍으며 올라가는 기분 이렇게 신날 수가 없다. 금강산인 듯 바위 형상이 기묘한 곳에 몇 단인지 모르게 줄줄 내려오는 폭포가 햇살에 반짝인다. 학이 놀고 간다는 ‘학소대’ 이다. 두 줄기가 양쪽에서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쌍폭포’ 에 이르러서는 꺄우꺄우 소리를 질러댔다. 쌍둥언니와 내가 둘이서 열정을 쏟아내는 바로 그 모습의 하얀 쌍둥이 폭포이다. 햇살 받는 각도에 따라 물방울이 튀는 모습에 따라 폭포는 다양한 모습을 연출해준다. 용이 출현했다는 ‘용추폭포’ 를 찍느라 나는 발을 벗고 계곡물 속으로 아예 들어가 폭포의 코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했다. 아, 참말로 시원하다. 바로 이 느낌이야!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사진을 찍다 보니 저녁때가 되었다. 버스 편으로 묵호항에 들어왔다. 불빛 속 항구는 까물까물 아름답다. 묵호 등대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등대오름’ 이란 작은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3마리의 맛이 다르다는 모듬 생선구이를 먹고, 등대오름길로 해서 바람의 언덕에 올라섰다. 뱃머리에서 등에 아기를 업은 채 강아지와 함께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논골댁의 동상이 묵호 등대 월출에 환상적이다. 보름에서 사흘 지난 달은 아주 크고 불빛 조명보다 밝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환호한다. 무수한 찻집들 속에서 ‘그집’ 이라는 아담한 카페에 들러 자스민 차를 마셨다. 잘 생긴 청년 하나가 들어와 김광석의 노랠 부른다. 내가 화음을 넣었더니, 씽어는 자신의 노래가 끝난 후 내게 기타를 넘겨준다. 이런 날은 분위기있는 노래가 어울린다. 고단한 여행 중 우연한 라이브는 내게 샘물이고 오아시스다.
다음날 새벽 묵호등대를 다시 올랐다. 엊저녁 등대 월출도 신비로웠는데, 오늘 또 황홀한 일출까지 난 참 복도 많다. 햇살 가득 내린 해변엔 전설과 설화에 얽힌 바위들이 많다. 까막바위, 문어상의 이야기를 읽고 있을 때, 한 청년을 만났다. 해파랑길 혼자 걷는 사람을 처음 본다며 그리도 반가워할 수가 없다. 울산에 사는 부산 해양대학교 2학년 학생이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부산에서부터 지금 18일째 혼자 걷고 있는 중이란다. 지난해에 산티아고를 다녀온 후 도보여행에 매력을 느끼고 우리나라 전역을 걷고 싶다는 호리호리하게 잘 생긴 청년이다. 함께 걸어가며 대화가 통하니 그 아니 좋을 수가 없다. 어달해변, 망상해변 오토캠핑장까지 동행해 흔들 그네에서 쉬며 캔 맥주로 장도를 건배했다. 24일 예정으로 해파랑길 완주를 하려는 청년은 빠른 길을 택해 자전거도로로, 나는 해파랑길 안내대로 산길로 서로 헤어져갔다.
도직해변, 옥계해변을 지나니 강릉 바우길 안내리본이 해파랑길 리본과 함께 네 꼬리가 바람에 나부낀다. 금빛 햇살 반짝이는 금진항을 거쳐 수로부인의 헌화가 장소인 헌화로 심곡항을 지나며 해안 절벽에 피었을 붉은 꽃을 상상해본다. 어두워지는 길에 고개를 두 개 넘으니 하얀 크루즈 배 모양 호텔이 있는 정동진이다. 횟집 하나를 정해 그 집 민박에 여장을 풀었다. 회덧밥을 먹고 야경을 둘러보는데, 낮의 그 학생이 전화를 했다. 자신은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는데 내일 아침 정동진역에서 함께 출발하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여행지에서 사람을 만나 함께 한다는 것은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삼척 해변 일출
*아침 햇살 받은 삼척 바다
*추암해변 보이는 해가사 터
*추암해변 바위군들
*추암 촛대바위
*무릉계곡 천년고찰 삼화사
*이끼 낀 무릉계곡
*학이 놀고 가는 학소대
*쌍둥이 폭포 두줄기 쌍폭포
*용이 출현했다는 용추폭포
*묵호등대 바람의 언덕
월출 속의 논골댁 동상
*다음날 묵호등대 일출
*일출 직후의 묵호 등대
*묵호등대 오름길 풍경
*묵호 해변의 아침
*까막 바위 전설이 있는 바위
*낚시의 최고 명소 어달항
*피서지 망상해수욕장
*철망으로 가지 못하는 도직해변
*피서지의 옥계해변
*옥계해변 지나면서 강릉바우길과
해파랑길 네 개의 꼬리리본
*금진항 심곡항 가는 솔밭길
*시퍼런 바다 금진항의 안전요원들
*아름다운 금진항
*절벽위 꽃을 꺾었다는 헌화로 심곡항
*정동진 썬 크루즈 야경
첫댓글 내가 찍은 사진
내가 보면서 흐뭇해 하는거
아직도 철부지인가보다.
사임당님. 언제 들어와
글 화답하고 가셨네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