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오도송(悟道頌)
山前一片閑田地산전일편한전지 平平仄仄平平仄
叉手叮嚀問祖翁차수정녕문조옹 平仄平平仄仄平
幾度賣來還自買기도매래환자매 平仄仄仄仄仄仄
爲憐松竹引淸風위련송죽인청풍 仄平平仄仄平平
오조법연<五祖法演>
산자락에 조그만한 밭 뙈기 있기에
두 손을 모으고 어르신께 공손히 물었더니
몇 번이나 되팔았다 다시 사곤 한것인데
저 솔바람 댓잎 소리 못내 그리워서였다네.
이 게송은 오조법연(五祖法演) 선사(禪師)님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오도송(悟道頌)이다. 압운(押韻)은 지(地), 옹(翁), 풍(風)이다. 지(地)는 거성(去聲) 치통(寘統) 운족(韻族)이고 옹(翁), 풍(風)은 상평성(上平聲) 동통(東統) 운족(韻族)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운(平仄韻)은 근체시(近體詩)에는 맞지는 않다. 전구(轉句)은 첫 자만 빼놓고 온통 측성(仄聲)이다. 당체(唐體) 시(詩)나 송체(宋體) 시풍(詩風)은 운자(韻字) 평측(平仄)은 맞춰 작게(作偈)하는 것이 통예(通豫)다. 그런데 선사들의 게송은 언어문자(言語文字)에 전혀 갇혀 있지 않고 자유분망(自由奔忙)이다. 오도(悟道)의 심적(心的) 경지(境地)도 경(景)인데 말이다. 의경(意景)이 무은(無垠)이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인데 말이다. 그저 아쉬움이 남는다. 기구(起句)에서 한전(閑田)은 우리 본성(本性) 불성(佛性)을 이른 말이다. 차수(叉手)는 손을 교차한다는 뜻으로 합장(合掌)을 뜻한다. 팔고 사고했다는 것도 알고 보면 생생(生生) 수도(修道)를 상징(象徵)한 언어(言語)다. 청풍(淸風) 본지풍광(本地風光)을 풍자(諷刺)한 소리다. 평측 운은 맞지 않아도 수행자의 면모가 그대로 들어난 오도송(悟道頌) 게송이다. 법연선사는 송(宋)나라 때 임제종 양기파 선사다. 법연사계(法演四戒)를 보면 세력은 다 부리지 말라. 복도 지나치게 다 받아 쓰지 말라. 좋은 말도, 다 하지 마라. 규율도 다 지키려 마라.<(勢不可使盡 福不可受盡 好語不可說盡 規矩不可行盡) 모든 것이 너무 편중(偏重) 편향(偏向)되는 것을 경계(警)한 말이다. 모든 것은 윤집궐중(允執厥中) 중도(中道), 실상(實相)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요즘 우리나라 사회에도 딱 맞는 말씀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인데 정치(政治)인들의 오만방자(傲慢放恣)함을 본 듯한 말씀이 아닌가? 복이라고 다 받아 쓰지 말라다. 복진타락(福盡墮落)이 되기 때문이다. 내복도 보시(布施) 베풀면 작복(作福)이다. 좋은 말도 다 하지 말라다. 주변에 보면 너무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을 본다, 권력자 앞에서는 좋은 말도 아부(阿附)하는 말로 변하기 때문이다. 잘못하는 정치는 쓴 소리(苦言)이 좋은 말 약(藥)이 된다. 규칙 규율도 너무 얽매이지 말라다. 좀 느슨해야 용신처(容身處)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소소계(小小戒)는 허락(許諾)하셨다고 본다. 법연사계(法演四戒)는 수행하면서 체득(體得)한 소리다.
법연선사(法演禪師)는 수단선사(守端禪師) 법(法)을 이었다. 수단선사 문하에서 방앗간 소임(所任)을 봤다. 그런데 쌀과 보리 찧어 팔아 돈이 들어오면 보시(布施) 돈은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자, 수단선사에게 한 스님이 고자질을 했다. 법연스님이 매일 계집질에 술 먹고 보시 돈도 축적을 한다고 일러받쳤다. 수단선사는 법연 제자를 불러 놓고 꾸짖고 절에서 나가라고 했다. 법연 선사는 스승의 꾸중 명령이라 나가면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3천 냥을 내놓고 훗날 불사에 쓰라고 하면서 수단선사를 떠나 전국 각처로 선지식을 찾아다녔다. 스승선사도 법연 제자가 누명을 쓴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는 선화(禪話)다. 법연선사(法演禪師)는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話頭)로 수행(修行)하였다고 전한다. 후일 원오극근(圓悟克勤)이 법연(法演) 선사의 법을 잇고, 원오극근(圓悟克勤)의 법을 잇는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화두참선(話頭參禪)을 주창(主唱)하게 된 것도 오조법연(五祖法演) 선사의 효시(曉示) 영향이 큰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화두참선(話頭參禪)에 관한 선화(禪話)가 있다. ”법연 선사의 옛 친구 진 씨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쓰촨성으로 가는 도중 태평산(太平山)에 들렀다. 법연은 친구에게 다음의 소염시(小艶詩)를 들려주었다. 한 폭의 아리따운 모습 그려내지 못하는데, 골방 깊은 곳에서 사모의 정에 애가 타네. 소옥을 자주 부르지만, 소옥에게는 일이 없다네, 단지 낭군에게 제 목소리 알리기 위한 소리일 뿐. (一段風光畵不成 洞房深處陳愁情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이 시(詩)는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총애(寵愛)하던 애첩(愛妾) 양귀비(楊貴妃)를 소재로 한 것이다. 양귀비(楊貴妃)는 안록산(安祿山)과 정(情)을 나누는 사이였다. 안녹산이 그리워도 불러올 상황이 아닌지라, 몸종 소옥(小玉)이를 자주 불러 담 밖에 있는 안녹산에게 자기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함이다. 여기서 ‘소옥아! 소옥아’하고 부를 때, 낭군이 알아듣는 것은 ‘소옥’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목소리를 듣는 주인공(主人公)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말을 듣고 그 말의 의미 관념을 따르지 말고, 말의 근원(根源)을 파악(把握)하라는 화두참선(話頭參禪)의 법연선사 가르침이다.“ 선방(禪房)에서 화두참선(話頭參禪)을 할 때 이 법연선사 소염시를 많이 인용한다. 저서(著書)로 오조번연선사어록(五祖法演禪師語錄)이 있다. 오늘은 오조법연선사 오도송 평측 운통을 반무(反芻)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