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2] 이명희(李名熙) - 부활의 체험을 맛보며 2. 잘못된 신학 입학 - 2
11 그때 마침 같은 교회에 나가던 나의 친구 오영환이라고 하는 학생이 있었는데(지금은 서울 정릉정인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고 있음) 그는 국민학교, 중•고등학교를 줄곧 같이 다녔고 교회까지 같이 다니던 막역한 친구였다. 그 친구가 또 신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같이 가자고 끈질기게 권유해 왔다.
12 그러고 보니 할머니, 어머니, 목사님, 친구 네 분의 권유가 나의 신학교 입학의 동기가 되었다. 물론 장로님이셨던 아버지도 그렇게 희망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해서 입학한 학교가 장로회 신학교였다.
13 지금 서울시 성동구 광장동 워커힐 입구 언덕에 위치한 학교로서 교단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축에 속하는 신학교로서 한국에서는 학문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가장 진실하고 제일 많은 교세의 배경을 가진 신학대학이다.
14 당시는 피난시절 대구에서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에 의해서 입학한 신학교 주변에서 일어나는 목사들의 생활은 너무나도 위선적이었고, 목회자로서의 목사님들이 아니고 교권 쟁탈을 위한 전투적이고 모사꾼들로서의 목사들이었다.
15 그 당시의 교단은 보수니 혁신이니, 정통 신학이니 신신학이니 하고 싸우는가 하면 에큐메니칼이니 NAE니 하고 양분되어 국제적으로도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때였으며, 학생들도 그런 와중에서 영향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다분히 정치성 있는 학교 분위기였다.
16 결국 나도 졸업하고 목사가 되면 저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할 때 목사에 대한 환멸과 혐오감이 생기는 것이었다. 따라서 재학 시절부터 목사 되기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사상적인 측면의 신학은 그런대로 흥미가 있어 조직신학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17 58년 2월,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들은 모두 목회자로서 지방에 나가는데 나는 57년 10월부터 벌써 당시 서울에 있는 모 외국인 기관에 근무하기 시작하였으며, 신학교에 입학할 때의 순수한 신앙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고 기독교 신앙과 교회 자체에 대해 여러 가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18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등진다든지 교회 출석을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신앙 생활 그것은 우리 가정의 하나의 전통이요 습관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리적인 신념 같은 것은 없어도 형식적인 신앙 생활에 전혀 갈등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19 어쩌면 교단의 지도자라고 하는 목사들의 생활상이 눈에 거슬렸던 것이지 크리스천으로서의 신앙생활 그것에 싫증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아이러니 속에서 자신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 외국상사에서 샐러리맨의 생활을 하여 왔던 것이다. 이러한, 나의 확고한 신념이 없는 신앙생활이 어쩌면 통일교회로의 전향의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