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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주일설교. 내가 간구(축복)하노라 (요한삼서 1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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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독교 용어 중에 잘못사용하고 있거나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나, 000에게 기도 받으러 갑니다”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사람을 통해 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다고 할 때만 사용해야 합니다. 또, 심리적으로 다운 되었거나, 큰일을 앞두고, “영 빨이 딸린다, 기도 빨이 안 선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기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지 개인이 힘을 더해서 좌우할 성격이 아닙니다. 이런 속된 표현은 삼가야 합니다.
이것 말고도 많이 있지만, 실제적으로 기독교인들이 교회 내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쉽게 잘못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할렐루야”와 “축복”일 것입니다.
“할렐루야”는 “주를 찬양하라, Praise the Lord”라는 말로, 시편의 첫머리나 마지막에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사람에게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해 주실 000목사님(강사님, 선교사님)을 할렐루야로 환영합시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회중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따라합니다. “할렐루야”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혹은, “오늘 예배드리는 성도끼리 할렐루야로 인사합시다!”라고 합니다. 할렐루야는 인사를 하기위해 만들어진 말이 아닙니다. 또, 강단에서, “할렐루야!”라고 외치면, 회중들이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일이 많습니다. 할렐루야를 아멘을 얻어내기 위한 추임새나, 분위기 전환을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정말 공경의 마음을 담아 진중하게 사용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그 다음 “축복”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자주 들어서 잘 아실 겁니다. 축복한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빌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참 그 교회는 축복 받았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축복 받으세요” 라는 말들은 다 잘못된 말입니다. “축복”에서 “축(祝)”자를 빼고 말해야 합니다.
축복은, 사람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나님에게 복을 비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축복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허락) 주시는 분입니다. 아직도 헷갈리시는 분이 계시다면, 내가 주어가 되면 “축복”이라는 말을 쓰시고, 하나님(혹은 하늘)이 주어가 되면 “복”이라는 말을 하시면 됩니다.
제가 이렇게 교회 용어를 길게 설명하고, 할렐루야와 축복까지 말씀 드린 것은 오늘 본문 말씀이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복 구절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조사하면,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은 매번 단골로 선택되는 말씀입니다. 아마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과 함께 거의 다 암송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3월의 암송 말씀으로 정했으니, 반복해서 외워 보시고, 많은 사람들을 마음껏 축복하는 기도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서 축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장로하고(1절) 말하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가이오(Gaius)’라는 인물인데, 신약 성경에서는 ‘1.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행19:29), 2. 더베 사람 가이오(행 20:4-요한에 의해 버가모의 초대 감독이 됨), 3. 바울에게서 세례를 받은 고린도 사람 가이오(고전 1:14)가이오’, 이렇게 3명의 가이오가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 사람 ‘가이오’는 로마서 16장 23절에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나(바울)와 온 교회(고린도교회)를 잘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여기에서 ‘돌본다’는 뜻은, 후원자, 특히 식사를 제공했던 사람(개역 한글에서는 식주인으로 번역)이라는 뜻입니다. KJV(킹제임스버전)에서는 ‘집주인(host)’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의 가이오 중 누가 요한 삼서의 주인공일까요? 버가모의 초대 감독이 된 더베 사람 가이오, 고린도교회의 든든한 후원자인 가이오, 이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요한 삼서의 가이오라는 주장이 엇갈립니다. 어떤 학자들은 전혀 다른 새로운 제 3의 인물이 가이오였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것을 결론 내는 것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가이오를 지칭하면서, “사랑하는 자여”라고 불렀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습니다. 왜 그를 사랑하는 자로 불렀겠습니까? 기이오 중 한 사람은 복음 전하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고(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에베소전도 중 은장색 소동), 한 사람은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초대 교회의 지도자(더베사람 가이오-버가모)가 되었고, 한 사람은 바울에게 세례를 받고, 교회를 위해 집과 음식을 성심성의껏 제공(고린도 사람 가이오)해 주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런 표면적인 이유 때문에 가이오를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3절에서 사도 바울은, 가이오라는 인물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만약, 가이오가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았었고, 믿음이 좋았었고, 세례를 받았고, 음식을 대접해 주었던 것만을 기억했다면, 이렇게까지 크게 기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한 일들은 이미 다 지나간 과거 일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의 모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토록 크게 기뻐한 것은, 가이오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더욱더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서, 지금 현재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진리 이신 예수님과 동행 한다는 뜻이며, 진리인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의 많은 자녀들을 보시며 가장 기뻐하실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이 만만하지 않지만, 은혜 받고 구원받은 자녀들이, 예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내 사랑하는 자요, 내 사랑하는 아들딸들 이니라”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주신 사랑을 먹고, 자라고, 그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남도 사랑할 힘이 생깁니다. 바울이 가이오를 향해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자신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구하시고, 채우십시오. 그 충만함으로, 사랑하는 우리 교우들과, 가족과, 이웃들에게, 수시로 “사랑하는 자여”라고 불러 줄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린 후에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서로 인사하라는 주문을 많이 받습니다. 좋은 말이지만 참 쑥스러운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교우들을 많이 사랑하십니까? 옆에 앉아 함께 예배드리시는 분을 사랑 하시는 것 맞으시죠?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말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사랑을 증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상대방을 마음껏, 진심으로 “축복”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원천은 예수님 이십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고 원하면, 우리 가슴에 뜨거운 사랑의 불이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진심으로 사랑하는 힘쓰셔서 사랑의 온도를 높여 가십시오. 그리고 그 뜨거운 사랑의 힘으로 교우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풍성하게 축복하십시오. 축복 잘하는 사람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가이오를 향하여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른 후, 본격적인 축복의 기도(선포)을 들려줍니다.
요한이 기도(선포)한 첫 번째는 “영혼이 잘 되기를 축복”했습니다.
영혼이 잘 되기를 축복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육신의 몸으로 살아가는 동안 “성령과 동행하며 거룩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살아가는 것이 거룩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곧 거룩하게 살도록 도와 달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계속 거룩하게 살아가되, 혼자 힘으로는 그러한 삶의 지속이 불가능 하니, 성령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구하라는 축복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축복하자면,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라고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잘되기를 축복하는 둘째 의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잘 지켜 가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1:12),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4;13) 이런 말씀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하지만, 구원의 대상이 되는 우리들은 “믿음”을 지켜내는 치열한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가이오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을 크게 기뻐했지만, 그가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는 시점까지, 영적 전쟁에서 완벽하게 승리 할 수 있기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일생일대의 유일한 한 가지 소원은 오직, 영혼이 잘 되어 구원받는 것입니다. 또, 내 가족, 내 이웃,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입도록 축복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구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를 실족하게 만들려고 발악 할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쳤던 12제자의 일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예수님 믿고 있다고 영혼 구원에 대해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고, 예수님을 떠나 세상에 빠져 살아간다면, 누구라도 실족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영혼이 잘 되기를 축복하는 일은, 그 사람의 인생농사를 완벽하게 성공하게 만드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성령에 의지하여 거룩하게 살아가려는 노력, 그리고 믿음을 지켜가며 구원에 이르도록 치열한 영적전쟁을 해 나가는 것, 이 두 가지를 위해 기도로, 말로, 행동으로 싸워 나가십시오. 또한,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영혼이 잘 되기를 축복”하는 기도를 계속 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영혼이 잘 되어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구원의 감격에 도달하는, 가장 큰 복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한이 기도(선포)한 두 번째는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축복”했습니다.
범사(凡事), 모든 일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는 일이 모두 다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범사에 잘 되라는 말은 그냥 한 번 던져보는 인사치레의 말일까요?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은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범사가 고통이고 근심 덩어리지만,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께 나의 행사를 맡기면, 범사에 형통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이오가 남은 일생의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근심과 고민에서 벗어나 평안의 삶, 형통의 삶을 살아가도록 축복해 주었습니다.
또한 강건하기를 축복 했습니다. 이는 육신적으로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물건도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수명이 다합니다. 점점 기능이 약화됩니다. 그런데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 무려 120세 인데도 눈이 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눈에 대해서 말씀 하시기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도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가이오를 축복했던 것은, 마음의 등불을 항상 밝게 해서, 어둠이 틈타지 못하도록 늘 깨어 있으라고 축복하지 않았을까요? 모세가 120세에도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는 것은 총명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리판단과 분별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늘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준행한 사람입니다. 그가 120세가 되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움직이는 것을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교회나 집안의 어른들을 축복할 때,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맡기고, 더 마음이 밝아지고, 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서, 온전히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하십시오. 또, 우리 자녀들이, 모세와 같이 120세가 되도록 장수하기를 바라시고, 노년이 되어서도, 눈도 여전히 밝고, 기력도 쇠하지 않는, 총명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축복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가이오를 축복 하면서, “내가 간구 하노라”라고 기도(선포)를 마칩니다. ‘간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든 행위들을 말하는데, “빌다(祝), 소원하다, 청하다, 열망하다”라는 뜻들이 담겨 있습니다. 곧 간구 하는 것은 축복하는 기도의 행위를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3월의 이 말씀을 암송 하시면서, 가장 많이 해야 할 것은, 나를 위한 기도 이전에, 사랑하는 교회의 성도들, 가족들, 이웃들, 직장 동료들, 작정한 전도 대상자들을 위해 많이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축복 많이 하는 사람은 그 축복의 내용, 분량들이 풍성한 은혜가 되어 결국 내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축복하실 때 오늘 말씀처럼 축복하십시오.
1. 영혼이 잘 되기를 축복합니다!
- 성령과 동행함으로 거룩하게 살아가시기를,
- 오직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지켜 가시기를
2.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축복합니다!
- 범사가 잘 되시기를 : 모든 행사를 다 맡기시기를,
- 강건하시기를 : 마음의 등불이 항상 밝게 켜지고,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총명함을 읽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뭇 영혼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범사에 형통함과, 육신의 강건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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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변에 사랑하는 자들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들을 많이 축복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구원의 복, 형통의 복, 순종의 복을 받으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축복하도록 입을 열게 하시고, 하늘의 복을 풍성하게 내려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