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수정과를 참 좋아하였다.
요즘이야 마실 수 있는 것들이 많지만
1981년도 무렵에는 그리 마실 수 있는 것이 그리 흔하지 않았다.
더구나 첫애를 가지면서 난 물만 꼴각꼴깍 넘길 뿐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먹는 것이 없으니 헛구역질 같은 것은 없었다,
살은 점점 빠져서 160이 넘는 키에 50키로도 안 나가는, 그야말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그런 나에게 감은 참 고마운 먹거리였다.
그렇다고 감이 5,6월 되어서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제일 늦게 까지 본 감이 4월 5일 식목일 무렵이었다.
뒷뜰 큰 시루에 담아 놓았던 감이 무를대로 물러서 들면 주르르 흘러내릴 정도였다.
그런 감이라도 그것은 먹을 수 있었다.
광주에서야 없는 것이지만 시골에 갈 때면 그리 있는 것도 마지막 털어먹고 나면 더 이상 감은 없었다.
하긴 감꽃이 필 무렵인데 어느 세월에 감이 나올 것인가?
날은 서서히 더워지고 물만 마시며 견디는데 제사가 돌아왔다,
큰며느리의 제사 참례는 당연한 것이었다.
버스에 시달리며 두시간을 달려 복내에 내리면 발이 땅에 닿는 것인지 귀신처럼 발이 없는 것인지 그 느낌도 알 수 없게
다리를 건너 사립문도 없는 문을 들어서면 할아버지가 문을 빼꼼이 열고 기다리셨다.
할아버지에게는 들어오는 형상만으로 반가운 존재, 손부였다.
더구나 아이를 가졌다는 그 반가움에 할아버지는
손부의 존재가 한없이 귀하고 예쁜 사람이었다.
비칠거리며 인사를 하여도 눈이 어두우니 보일리 없다.
"요리 앉아라. 여기가 따듯하다."
당신이 앉아 계시던 요를 제끼고 자리를 내 주신다.
그리고 전날부터 요 아래 넣고 데우던 광동쌍화탕 한병을 내 주신다.
"멀미 했을 것이니 이것 먹고 여기서 좀 누워 쉬어 안에 들어 가거라."
그리곤 아예 자리를 비켜 주신다.
"안에 들어가 봐야지요."
"아니다 너 여기 있으면 니 시모가 불러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마지못해 일너나 안에 들어가며 어머니의 표정부터 살핀다.
뭐 편할리가 없다.
"하이고 여기 불 좀 넣어라."
"네."
옷 갈아 입을 새도 없이 불을 지피다가 한복 소매를 태워 먹었던 적도 있다.
칠칠맞게 옷 소매를 태웠다고 할까봐 난 말도 못했다.
솥에서는 계피와 생강, 대추가 어우러지며 나는 김에 속이 좀 편안해진다.
수정과를 만들 물을 끓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수정과를 참 잘 만드셨다.
그렇게 가마솥에서 푸욱 우러난 물을 항아리에 퍼 담고
단맛과 간을 약간하여 입에 맞게 농도를 맞추고 곶감을 물에 잠시 담갔다가 항아리에 넣는다.
식으면 시원한 수정과가 되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작은댁식구까지 합치면 30여명이 모여서 먹어야 하기 때문에 적은 양은 할 수가 없다.
제사를 모시고 다음날 보면 항아리 아래 곶감이 푸욱 퍼져서 시루에서 들어올리던 홍시처럼 되어 있다.
아! 그 맛
감맛이다.
밥 한술도 못 먹던 내가 그곶감 퍼진 것을 떠 먹으니 다른 사람 눈에는 이상했을 것이다.
"저 가볼게요."
겨우 몸을 추스리고 나오면 어머니는 서운한 기색을 내비친다.
"너는 떡 한입도 안 먹고 가냐?"
"아니요 먹을게요"
떡 한조각 입에 넣었다가 그게 체했던 것일까?
오는 도중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겨우 참고 왔다가
유산되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곶감퍼진 것과 떡이 서로 안 맞았던 것인지
억지로 넣은 떡 한조각이 문제였던 것이지는 알 수 없다.
이후 난 사흘을 일어나지 못하고 앓았고 제사 한번 모시고 와서 유난스럽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유산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했다.
40여년이 지났지만 떡은 지금도 달갑게 입에 넣는 일은 없고
수정과는 가끔 만들어 먹긴 한다.
그제 제사모시고 남은 대추와 계피 한조각 넣고 압력 솥에 다려 두었다.
저걸 그냥 걸러서 마시면 대추차고 생강을 좀 넣고 농도 잘 맞추어 곶감을 썰어 넣으면 수정과가 된다.
대추차는 탑탑하게 마시면 되지만 수정과는 맑은 물만 따라내서 만들면 된다.
감기기도 약간 덜 떨어지고 있는데
재로는 다 있는 것이고 맑은 물 따라서 수정과 한그릇 해 두고 대추차로도 마셔야 겠다.
재료가 어우러져서 알싸하고 시원한 음료가 되듯이 우리도 잘 어우러지며 알싸하고 시원한 날 만들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