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념,
재개봉작 ‘백산-의령에서 발해까지’ 다큐 영화 관람
역사 속에 숨겨진 영웅 백산 안희제의 생애를 함께 알려주세요!
영화 '백산 – 의령에서 발해까지'는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던 백산 안희제의 생애를 제작진이 직접 발굴해 낸
사료들을 통해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다.
백산 안희제는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 최대 기업이던
‘백산무역’을 운영하며 상해임시정부 자금의 6할을
책임졌던 독립운동가이지만 그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는 한중일 각지에 흩어져있던 백산 안희제와 동지들에
대한 미공개 자료를 샅샅이 찾아내어, 역사 속에 숨겨진
그의 삶을 21세기에 불러온다.
백범 김구, 백야 김좌진과 함께 ‘삼백’으로 불렸지만 역사 속에
숨겨진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백산 – 의령에서 발해까지' 관람을 권장합니다.
ㅇ일시 : 2025. 8. 12.(화) 오후 3시
ㅇ장소 : CGV 서면삼정타워 1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중앙대로 672, 13층 (부전동)
ㅇ제목 : ‘백산 의령에서 발해까지’
ㅇ장르 : 다큐멘터리 / (상영시간) 83분
ㅇ참석 : 보훈가족, 학생 등 보훈청관계자
ㅇ 관람후 촬영감독 대담
대중교통 이용
ㅇ 1, 2호선 서면역 2번 출구 근방 400m
ㅇ 2호선 전포역 5번 출구 근방 500m
백산 안희제 선생님(1885~1943)은 경북 의령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자금을 후원한 사업가이며,
1943년 만주 액하감옥에서 병보석으로 출감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그는 소년 시절 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나라가 망헀는데
선비가 어찌 쓰임이 있겠습니까) 상경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보성전문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3년간 러시아에
머물면서 나라를 잃은 조선 실향민들을 보면서
운동의 방향을 다잡아 나갔다.
동시대의 독립운동가인 이갑 선생님이 안창호 선생님께 쓴 편지에
있었던 구절인 "안희제가 귀국 려비가 없으니 돈이 필요하답니다.
그리고 병이 있어도 치료를 못하는 상황입니다" 를 보면
당시 안희제 선생님은 경제력 없이 독립운동을 하는 일은 더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며, 자신이 배운 경제학을 어떻게 독립운동에 응용해
나갈지 고민하셨던 것 같다.
이후 1914년, 안희제 선생님은 부산으로 돌아가서 대기업
백산상회를 건설하였다.
백산상회는 영남지역 자본가들과 연대하여 사업을 확장하였고,
창출해낸 돈을 독립자금 공급에 활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희제 선생님은 문영빈, 정재완, 윤상은, 허결 등의
영남지역 지주들을 설득했고 특히 경주 최부자댁은 백산상회의
최대 주주로서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어려워도 계속 그를 지원했다.
1919년 파리에 갈 돈(당시 3천원. 현재가치로 약 1억 5천원) 을
김규식에게 보탠 주체가 백산상회였고 도항증명서 강매 논란을
일으켰던 박춘금에 항의했던 것도 백산상회였고
더 나아가서는 김구선생님께 자금을 보탰다는 것
'천석꾼'의 후손도 '가난의 덫'에 걸려 고통받고 있었다.
아무리 부자라도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공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부산을 대표하는 독립지사 백산(白山) 안희제(1885~1943)
선생의 후손도 마찬가지였다.
경남 의령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백산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백산상회를 설립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경제인이었다.
또 항일신문인 중외일보를 인수해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구명학교·의신학교·창남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1943년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아
사망하기 직전까지 만주에 독립운동기지인 '발해농장'을
창건했다.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사용했다.
이 때문에 백산 선생의 후손들에게 남겨진 재산은
고향에 남은 집과 약간의 전답 뿐이었다.
특히 장남 안상록(1905~1982) 선생은 해방후 좌익으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승만 정권이 김구 선생이나 몽양 여운형 선생과
각별했던 백산 선생의 유족을 눈엣가시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안상록 선생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1948년 김구 선생을
수행해 평양에서 열린 남북회담에 참가했다.
백산 선생의 장손이자 안상록 선생의 장자인
안경하(67·부산 해운대구 우동)씨는 "이승만 정권의 핍박으로
인해 부친이 사회활동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연좌제에 걸린 것"이라고 말했다.
안상록 선생은 자녀 2남5녀 가운데 장자인 경하씨만 대학을
보냈다. 넉넉치 못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안씨는 "1958년 한국해양대에서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나머지 동생들은 고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한국해양대 졸업후 15년간 배를 탄 안경하씨는 1978년
컨테이너부두운영공사에 입사해 다소나마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동생들도 '배를 곯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1990년대에는 자식들 공부를 시킬 만한 생활수준이 됐다.
안씨는 "우리 가족은 그나마 독립유공자 후손들 가운데
형편이 괜찮은 경우에 해당한다"며 "일부 유공자 후손들은
학교 등록금이 없어 문맹자로 지내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백산 안희제 너무 몰랐다. 교과서에도 없던 인물
학생들이 감동 국민 누구나 나라는 빼앗겨도 정신이
살아 있으면 기어이 독립을 쟁취 역사의식 국가가
나라가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이영화를 통해서
새삼 알게되었다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꼭 시청을 권장 엣날 우리 선조의 땅 발해 언제
되찾을 수 있을까. 역사정신 진정한 광복은 역사와
살아 있는 정신광복이 되어야 한다.
광복 80주년 이 땅에 살아있는 광복정신이 있는가.
모두의 보훈 살아있는 일상의 보훈이 되어야.
진정한 나라가 굳건하게 우리를 한마음으로
지탱할 수가 있다.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