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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의 구산선문(九山禪門)>
장흥 보림사 대웅전
선종(禪宗)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해, 경전에 의하지 않고 자기 안에 존재하는 불성(佛性)을 깨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밖으로부터의 모든 인연을 끊고[외식제연(外息諸緣)], 깊숙한 산간에 파묻혀 수행하는,
이른바 참선을 행하는 것이다[內心無喘]. 절대적인 불타(佛陀)에 귀의하려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불성을 개발함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선종사상은, 신라 말 지방호족들이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녀, 중앙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지방에 웅거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의식구조와 부합했다. 따라서 신라 말에 선종의 유행은 지방호족이 대두되는 사회상과 깊이 연관돼있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신라 말 부패해가는 귀족중심의 교종(敎宗)에 대항해 일어난 선종 사찰을 의미했다. 이들은 달마 선법(達磨禪法)을 계승해 깊은 산속에 참선(參禪)을 중심으로 수행 도량을 일으켰다.
선사(禪師)들은 주로 중앙의 지배층에서 몰락한 6두품 이하의 하급 귀족 출신이거나 중앙 진출이 불가능한 지방호족 출신이었다. 나말여초의 선종 승려 가운데 30인 정도의 행적을 알 수 있는데, 그 중 절반가량이 김씨(金氏)로 나타난다. 아마 김씨가 아닌 나머지도 6두품 이하의 신분층에 속해 있었고, 김씨라 하더라도 경주 중앙귀족이
아닌, 중앙세력에서 밀려난 6두품 내지 그 이하의 신분이었다.
굴산사(崛山寺) 범일(梵日) 선사의 할아버지인 김술원(金述元)은 명주(溟州)도독을 지냈으며, 실상선문을 개창한 홍천(洪陟) 선사의 법을 이은 수철(秀澈) 선사의 증조부는 소판(蘇判)을 지낸 진골이었다. 이들은 아마 할아버지 때까지만 하더라도 진골이었으나, 낙향해 6두품으로 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성주산문(聖住山門) 낭혜(朗慧) 선사의 가계는 본래 진골이었으나, 그 아버지 김범청(金範淸) 대에 6두품으로 떨어졌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다.
또한 산문을 세운 선승들 대부분 중국에 가서 선을 배워왔고, 장보고(張保皐)가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서해를 지배하며 활동했던 시기(828~841)와도 무관하지 않다.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해서 호남지방에 불교가 매우 성하게 된 것이 아마도 강진이나 완도에서 장보고 선단의 배를 타고 남중국 쪽으로 왕래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불교문화가 주로 남쪽지방을 통해 들어오면서 통일신라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사찰들 일부가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세워졌고, 9산선문 중에서 특히 사세가 드높던 장흥의 가지산문(迦智山門), 곡성의 동리산문(桐裏山門), 남원의 실상산문(實相山門)이 호남지방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선종 사원은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872년(경문왕 12)에 세워진 동리산의 혜철대사비문에 의하면, 당시 동리산문의 태안사(泰安寺)에는 2,939석의 식량을 비축하고 있었으며, 전답이 494결 노(奴)가 10인, 비(婢)가 13인, 복전(福田)이 40인이었다고 한다.
희양산문의 토지는 동리산문의 그것보다 더 많았다. 지증대사비문에 의하면, 지증대사는 희양산문을 개창하기에 앞서, 864년(경문왕 4)에 경문왕의 누이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자신의 수봉지인 토지와 노비를 사원에 기증하는 것을 보고 감격해, 지증대사는 자기 토지 500결을 이 절에 희사했다.
그리고 보령의 성주산문의 토지는 이보다 더 많았고, 다른 산문의 토지도 아마 이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문도들은 적게는 수백 인에서 많으면 2,000인에까지 이르렀고, 선종산문에 소속된 문도들은, 상인이나 유망 농민은 물론, 심지어 군적(群賊)의 무리까지를 포용하고 있었다.
신라 말기의 동란기에는 곳곳에 군적의 무리들이 있었고, 이들이 당시 비교적 부유한 사원을 약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들 군적의 무리가 산문 세력으로 흡수되는 데에는 산문 자체가 무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밀양의 봉성사(奉聖寺) 및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머물고 있던 보양(寶壤)의 전략에 따라, 왕건은 청도지방에서 후백제 세력을 크게 물리치고 있다. 보양은 운문종(雲門宗) 계통의 선승이었는데, 전략을 겸비하고 있는 것은 선종사원 자체의 무력을 통솔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선종 산문들의 경제적 기반이 튼튼했기에 중앙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신라 말, 고려 초에 흥기한 지방 호족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기풍인 선법을 획기적으로 진작시킨 아홉 사찰(구산선문)은 아래와 같다.
산문명 개창자 중심 사찰
1. 가지산문(迦智山門) ― 도의(道義) ― 장흥 보림사
2. 실상산문(實相山門) ― 홍척(洪陟) ― 남원 실상사
3. 동리산문(桐裏山門) ― 혜철(慧徹) ― 곡성 태안사
4. 봉림산문(鳳林山門) ― 현욱(玄昱) ― 창원 봉림사
5. 사자산문(獅子山門) ― 도윤(道允) ― 영월 법흥사
6. 성주산문(聖住山門) ― 낭혜(朗慧) ― 보령 성주사
7. 사굴산문(闍崛山門) ― 범일(梵日) ― 강릉 굴산사
8. 희양산문(曦陽山門) ― 도헌(道憲) ― 문경 봉암사
9. 수미산문(須彌山門) ― 이엄(利嚴) ― 해주 광조사
가지산문 건립에는 중앙 귀족으로 병부시랑과 전중대감(殿中大監)을 지낸 김언경(金彦卿) 등이 관여했다.
희양산문은 문경 호족인 심충(沈忠)과 가은현(加恩縣)의 장군인 희필(熙弼)에 의해 건립됐다.
봉림산문 건립에는 진례성군사(進禮城軍事)인 김율희(金律熙)와 김해부 진례성군사인 김인광(金仁匡) 등
가야계 김씨 세력이 관여했다. 수미산문 건립에는 왕건(王建) 및 그 외척인 황보씨(皇甫氏) 세력이 후원했다.
보령은 김인문(金仁問)의 수봉지(受封地)로서, 그 후손인 김흔(金昕)의 세력 근거지였으며, 그가 성주사를
건립하고 낭혜를 머물게끔 했다.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계 세력을 배경으로 실제로 강릉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왕순식(王順式, 혹은 王荀息)은 사굴산문을 후원했다.
9산선문의 선사들은 때때로 왕실의 부름을 받고 이에 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왕실과의 관련보다 지방호족과의 연계에 더 유의했다. 경문왕의 부름에 응한 낭혜(朗慧)나 지증(智證) 등이 왕실에 계속 머물지 않고 산문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그 뒤의 부름에는 아예 응하지도 않았다. 9산 선문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1. 가지산문(迦智山門)
9산 선문 중에서 으뜸사찰은 장흥에 있는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였다. 이 사찰은 중국 남종선의 총본산이었던
소주의 조계산 보림사에서 연유했다.달마 선종의 정맥을 잇는 육조 혜능(慧能) 대사는 불립문자 직지인심
(不立文字 直指人心)을 종지로 내걸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남중국 전역에 전파했다.
신라 하대에 도의(道義, ?-825) 선사는 784년(선덕왕 5)에 중국으로 건너가 혜능(慧能) 대사 계통의 마조(馬祖)
선사의 법사(法嗣) 지장(西堂智藏, 735~814) 선사에게 법을 물어 의혹을 풀고 선법을 배운 후에 지장의 심인
(心印, 일문/一門을 개설해 조사가 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과 함께 법맥을 이어받고,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해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머물렀다.
도의 선사가 귀국했을 때에는 신라에 교학(敎學) 불교가 성행해 세상이 경전의 가르침에 젖어 있었으므로,
무위(無爲)의 선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그는 산림에 은거하고 말았다. 달마 대사가 중국으로 와서
선불교를 펼치려 했으나 당시 중국에서는 양무제(梁武帝)를 비롯해 모두가 유위의 불교에 매몰돼있어서
무위의 선불교는 시절인연이 아니었듯이 비슷한 현상이 신라에서도 빚어졌던 것이다.
도의 선사의 법통은 그의 제자 염거(廉居, ?~844) 화상에게 전하고 입적했고, 염거 화상은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다시 보조선사 체징(普照體澄, 804~880)으로 전해졌으며, 이 체징이 지금의 장흥의 가지산에 보림사를 개창했다.체징은 837년(희강왕 2) 중국에 들어갔다가 840년(문성왕 2)에 귀국했다. 체징이 보림사(寶林寺)에 머물면서 김언경(金彦卿) 등의 후원을 받으면서 사원세력이 커지고, 가지산사(迦智禪寺)로 사액을 받아 가지산문을 형성하게 됐다.
2. 실상산문(實相山門)
실상산문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 산문이다. 9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창한 개조 홍척(洪陟) 선사의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그 역시 마조 계통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2~813) 선사의 법을 이었다.
홍척 선사는 가지산문의 도의 선사보다 몇 년 늦게 귀국했지만, 가지산문보다 앞서서 실상산문을 개산했다.
홍척 선사는 당시 도의와 쌍벽을 이루었는데,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이라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도의는 하늘을 나는 고니(鵠)에 비유하고, 홍척은 대붕(鵬)에 비유했다. 고니는 한 번에 천리를 날 수 있는데,
대붕은 9만 리를 날 수 있다는 설명까지 첨부돼있다. 이를 통해 홍척이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홍척이 문을 연 실상사는 당시에는 지실사(知實寺)였다. 실상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 초기부터인데, 홍척의 존칭인 ‘실상선정국사(實相禪庭國師)’의 앞머리를 따서 이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홍척이 머물렀던 지실사는 지금의 백장암이었으며,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의 뒤를 이은 2조 수철(秀澈, 817~893) 화상이 지금의 실상사 자리로 옮겼다는 주장이 있다. 이곳에서 홍척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되자 왕실에서도 이를 주목하고 선강태자(宣康太子, ?~822년)나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와 같은 왕실세력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9산선문 중 실상산문이 왕실과 가장 밀착됐던 듯한 인상을 준다.
지증대사비문에 의하면, “정(靜)했을 때는 산이 세워지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응한다.”라고 했듯이, 홍척의
선풍은 무위해서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운찬 것이었다. 이 점은 그가 남종선을
받아 왔다고는 하더라도, 북종선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음을 말해 준다.
실상사는 지리산 주능선에서 뻗어 내려온 너른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당대 최고의
걸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는 사원의 규모가 크게 줄었지만 옛날에는 크고 웅장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았던 큰 절이었다.
3. 동리산문(桐裏山門)
서당(西堂智藏)의 법을 받아 개창한 나머지 하나는 동리산문이었다. 개조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徹, 785~861)은 839년(신무왕 1)에 중국에서 돌아와서 근본 도량(道埸)을 전남 곡성에 있는
태안사(泰安寺)로 했는데, 처음에는 왕실과 연결돼있었다.
문성왕이 그에게 나라를 다스릴 시책을 묻자 봉사(封事) 몇 조를 올렸는데, 그것이 모두 시정의 급무라고 했다.
혜철은 861년(경문왕 원년)에 입적하기 전까지 왕실의 자문에 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혜철의 문하(門下)에 도선(道詵)ㆍ여대사(如大師) 등 수백 명을 배출해 각각 종풍(宗風)을 선양함으로써
동리산파를 형성했다. 문하의 제자 가운데 여선사(如禪師)가 혜철의 선풍을 계승했고,
이어 광자 윤다(廣慈允多, 864~945)가 출현해 신라 효공왕과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산문이 더욱 확산됐다.
한편, 혜철의 문하에는 도선(道詵)을 중심으로 한 계열이 전라남도 광양의 옥룡사(玉龍寺)를 중심으로 존재했다.
도선은 풍수지리에 정통했다고 하나 행적은 신비에 쌓여 있는 면이 많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런데 도선은
개성 중심의 풍수지리설을 제창함으로써,
왕건이 고려를 건설해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이념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것이 사실이나, 당시의 모든 풍수지리설이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것만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히려 그것은 지방을 명당이라 함으로써 지방호족 세력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가졌기 때문에, 지방호족은 저마다의 풍수지리설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왕건이 고려국가를 건설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개성지방의 풍수지리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도선의 문하에는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 868~948)가 대표적인 선승으로 활약했다.
4. 봉림산문(鳳林山門)
봉림산문의 개창자는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 788~869)이다.
현욱은 강릉 출신으로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병부시랑 염균(廉均)의 아들이다.
헌덕왕 때 중국에 들어가 마조(馬祖) 선사의 제자인 장경회휘(長慶懷暉, 754~815)의 법을 받아 837년(희강왕 2)에 귀국한 뒤, 경문왕의 청으로 경기도 여주 혜목산(慧目山)의 고달사(高達寺)에 거주해 혜목산화상(慧目山和尙)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의 제자에 심희(審希, 855~923)가 있다. 심희는 혜목산에서 수선하는 현욱을 찾아 득도하고 그의 법을 계승한 후,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효공왕 때에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산에 봉림사(鳳林寺)를 창건해 종풍을 빛내니 봉림산파의 칭호를 받게 됐다.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의 속성도 김씨(金氏)로, 진성여왕의 청을 거절하고 김해지방의 가야계 김씨 세력인 김율희(金律熙), 김인광(金仁匡) 등과 연결해 봉림사를 열었고, 이 무렵 심희는 경명왕의 귀의를 받았으며, 918년(경명왕 2)에는 왕의 초청으로 경주에 가서 설법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왕건과 연결돼 그 해(918년)에
고려왕실에 나가기도 했다.
봉림산문은 김해와 창원 지역의 호족 세력이 주요한 단월(檀越-후원자)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후삼국 전쟁
기에 후백제가 경상도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고, 후백제를 견제하고자 하는 고려에게도 전략적 요충지여서 전쟁의 소요돌이에 휘몰리기도 했다. 원감(圓鑑)국사 현욱(玄昱)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름다운 부도탑이 현재 여주 고달사지에 남아 있다(국보 제4호)
5. 사자산문(獅子山門)
사자산문은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 798~868)과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 826~900)에 의해서
형성됐다. 도윤은 825년(헌덕왕 17)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법제자인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4)의 법을
받아 847년(문성왕 9)에 귀국했다. 한때 금강산에 한동안 머물다가 경문왕의 귀의를 받았는데, 이때에 화순의
쌍봉사(雙峯寺)로 옮겨 주석하다가 71세로 입적했다.
그의 제자에 절중(折中)이 있는데, 절중은 15세에 부석사에서 출가해 화엄학을 수학해, 19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절중은 도윤의 명성을 듣고 금강산 장담사(長潭寺)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각지를 유력하다가 사자산의 석운(釋雲)의 청으로 영월의 흥녕선원(興寧禪院-현 법흥사)에 머물게 되면서, 헌강왕과 정강왕의 귀의를 받았다. 사자산문으로 크게 발족히게 되는 것은 이때부터였다.
보령 성주사지
6. 성주산문(聖住山門)
성주산문은 낭혜(朗慧, 800년~888)에 의해 개창됐다. 낭혜는 821년(헌덕왕 13)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마곡 보철(麻谷寶徹)의 법을 받아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해서, 같은 무열왕계의 후손으로서 보령 지역의 호족인 김흔(金昕, 803~849)과 결합해 성주산문을 열었다.
보령은 김인문(金仁問)의 수봉지(受封地: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로서, 그 후손인 김흔(金昕)의 세력
근거지였으며, 그가 성주사를 건립하고 낭혜를 머물게끔 했다.
낭혜(朗慧, 무염/無染)의 속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법명이 무염(無染), 시호가 낭혜(朗慧)이다.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범청(範淸)의 아들이다.
낭혜는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했다. 그 뒤 낭혜는 부석사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했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가서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 보철(麻谷寶徹)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해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845년(문성왕 7년) 귀국해 보령 성주사(聖住寺)를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주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해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했다. 888년 88세로 입적했다. 승탑은 성주산 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渷)이 썼다.
이 승탑은 대한민국의 국보 제8호로 지정돼있다.
낭혜(朗慧)는 말했다.
“교학이 마치 백관이 모두 그 맡은바 직무를 수행해서 일이 처리되는 것에 비유한다면, 선학은 천자가 말없이 묘당(廟堂) 위에 팔짱을 끼고 앉아만 있어도 천하가 안정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며, 교문보다도 선문이 우월하다고 했다.나말여초에 성주산문이 가장 번창해 낭혜의 제자들이 많았다. 대통(大通)⋅자인(慈忍)⋅영원(靈源)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대통(大通, 816~883)은 856년에 중국에 들어가 앙산 혜적(仰山慧寂, 803-887, 징허/澄虛) 선사의 법을 받고
866년(경문왕 1)에 귀국해, 충주 월광사(月光寺)에 거주했다.
7. 사굴산문(闍崛山門)
사굴산문은 범일(梵日, 810∼889)국사가 문성왕 8년(846)에 개산했으며 번창했다. 그 옛 자리는 현재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있다. 범일은 831년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 제안(鹽官齊安, ?~842)의 법을
받아, 846년(문성왕 8)에 귀국했다.
개산조 범일은 품일(品日)이라고도 하며, 속성은 김씨로, 명주(溟州)도독 김술원(金述元)의 손자이다.
그는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라 했는데,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침은 진실한 것이 아니며, 그 뒤 진귀대사(眞歸大師)를 만나 깨친 것이 바로 조사선의 경지라고 해서, 여래선보다 우월한 조사선을 주장했다. 그의 제자에 행적⋅개청⋅신의(信義) 등이 있었다. 사굴산문은 강릉을 중심으로 영동 일대와 오대산 일대에 세력을 미치고 왕건(王建) 세력과 연결돼있었다.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계 세력을 배경으로 실제로 강릉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왕순식(王順式)은 사굴산문을 후원하고 있었다.
8. 희양산문(曦陽山門)
희양산문의 개창자는 도헌(道憲, 824~882) 국사, 곧 지증(智證)대사이다. 지증의 호가 도헌이다.
지증은 9산선문 중 유일하게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산문을 성립시켰다.
일찍이 신라의 법랑(法郎)은 중국에 건너가 선종의 법맥을 받아 와서 신행(信行)에게 전했고,
그는 다시 준범(遵範)에게, 준범은 다시 혜은(惠隱)에게 전했다. 지증은 혜은의 법을 이어받았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碑)는 국보 제315호이다.
문경 호족인 심충(沈忠)의 청으로 희양산에 거주하면서, 그의 제자에 양부(楊孚)가 있으나 행적이 자세하지 않고, 양부의 제자에 긍양(兢讓, 878-956)이 있다. 정진국사(靜眞國師) 긍양(競讓)의 속성은 왕(王)씨이며, 900년에
중국에 들어가 도연 곡산(道緣谷山)의 법을 받아 924년(태조 7)에 귀국했으며, 왕건의 귀의를 받았다.
신라 말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회양산문은 적당의 침입을 받아 폐허가 됐는데, 긍양이 이를 재건했다.
긍양은 희양산에 들어가 봉암사를 일으켜 문풍(門風)을 선양함으로써 희양산파가 이루어졌던 것이므로
그가 사실 상의 희양산의 개산조인 셈이다.
9. 수미산문(須彌山門)
황해도 해주 수미산 광조사(廣照寺)가 수미산문의 본산이었다. 9산 중에서 최후에 개산됐으며,
고려 태조 15년(932)에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 870~936)이 개산했다. 이엄(利嚴)은 896년 중국에 들어가, 석두 희천(石頭希遷)의 계열인 운거 도응(雲居道膺, ?-902)의 법을 이어받아 911년(효공왕 15)에 귀국했다.
그는 처음 호족 소율희(蘇律熙)의 후원을 받으며 김해 지역에 머물렀으나 뒤에 왕건의 소청으로 태조 왕건의 왕사로서 해주의 광조사(廣照寺)에 거주했다.
따라서 광조사는 왕건 및 그의 외척 세력인 황보씨 세력의 후원으로 성립됐다. 이엄의 재가 제자로
황보제공(皇甫悌恭)과 왕유(王儒)⋅이척량(李陟良) 등 전직과 현직 고관과 박수문(朴守文)을 비롯한
개국공신 세력의 후원을 받았다.
광조사에 딸린 토지는 관장(官莊)을 이루었고, 규모가 거대해 세 곳에 장원을 설치하여 경영했다.
이엄과 더불어 대경 여엄(大鏡麗嚴), 선각 형미(先覺逈微), 법경 경유(法鏡慶猶)는 사무외사(四無畏士)로 불리며, 공통적으로 운거 도응의 법맥을 계승했는데, 이들 모두 태조의 후원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당시 고려의 왕정을 보익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리하여 이엄은 “왕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아 무고한 무리를 죽이지 말라.”고 했다.
위와 같이 산문(山門)은 아홉군 데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모두 조계(曹溪) 혜능(慧能)을 조(祖)로 삼고
그 선법인 조계선(曹溪禪)을 참구했으므로,
고려 초에 확립된 조계(曹溪)를 조(祖)로 하는 해동(海東)의 선종(禪宗)이라 했다.
신라 하대에 선종의 등장은 단순히 중국의 선불교를 옮긴 차원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정치적 격변 시기에 우리 민족과 한국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선종은 고려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며, 오교양종(五敎兩宗)으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 기타 산문
9산선문 외에 혜소(慧昭, 774~850)는 전주 출신이며 시호는 진감(眞鑑)국사, 속성은 최씨이다. 도의(道義)나
홍척(洪陟)과 비슷한 시기에, 하동의 쌍계사(雙磎寺)에서 산문을 이루어 번창하고 있었다. 혜소는 804년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 신감(神鑑) 선사의 법을 받아 830년(흥덕왕 5)에 귀국했으며,
불교 음악인 범패(梵唄)를 배워 우리나라에 최초로 범패를 전하기도 했다.
특히, 쌍계사에는 6조의 영당(影堂)이 있는데, 혜능의 머리를 취해 오는 연기설화와 연고가 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는 국보 제47호이다.
고려 왕건의 선대 세력과 연결을 가진 순지(順之)는 개경에서 가까운(30리)
오관산(五冠山) 서운사(瑞雲寺)에서 위앙선풍을 펴고 있었다.
왕건과 연결된 보양(寶壤, ?~?)은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전해 받고
청도의 운문사(雲門寺)에서 산문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의 선풍은 운문종 계통이었다.
이들 외에도 9산선문 중에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산문을 이루고 있었던 자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