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게 스포츠는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사춘기와 성년기에 접어들면서 남성 호르몬이 많이 배출되는 저희 아들의 경우, 무엇인가에 집중할 만한 것이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으니 좋고, 건강해서 좋고, 나중에 평생 취미로 삼아서 좋습니다.
그렇다고 축구나 야구와 같은 복잡한 룰이 적용되는 스포츠는 이해를 못하니 혼자 할 수 있는 게임이 좋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볼링"입니다. 볼링공만 던지고 되돌아 섰던 아들이 어느새 볼링공이 핀을 쓰러뜨리는 것을 끝까지 보는 모습을 보니, "이런 것이 자식 가르친 보람이구나" 라고 자족했습니다.
근속 연수가 많고 코로나 이후 굳이 직장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로 한달간 체류 목적으로 한국 출장을 신청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집안의 조카를 포함 남자를 끼리는 한번 다 같이 모이자는 가족들의 취지였습니다.
비행기표를 사고 나니 전미 장애인 협회에서 공교롭게 공지로 제43회 전국 장애인 체전(전남대회)가 열리니 참가할 사람은 연락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단, 항공료는 선수에게만 반만 지급하고 기타 보호자의 항공료및 체제비등은 각자 부담......바쁜 이민자의 일상에서 아무리 스포츠가 좋다지만 냉큼 응할 부모가 없었는지, 실력도 개뿔 없는 아들이지만 자리만 채워도 고맙겠다는 말에 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의 첫날 밤
4-5년 마다 가지만 한국에서 가을을 맞이한 것은 33년 만이었습니다. 시차도 있고 해서 두 남자는 오피스텔에서 눈만 멀뚱멀뚱.. 결국 큰형이 두고간 승용차로 한강뷰가 좋다는 행주산성에 갔습니다. 행주산성 입구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새벽 2시. 아들이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에 화장실에 들어가자 저는 어마무시한 한국의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바로 수도꼭지에 점자로 냉온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의 행동반경이 그렇게 좁지 않은데 미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수도꼭지에까지 시각 장애인을 위해 배려하는 모습에 30여년 전 서울의 전철 안을 돌며 구걸했던 시각 장애인들의 아픈 모습들을 되내게 했습니다. 당연히 이제 그런 사람들은 전철안에 구경 못 합니다.
행주산성 남자 화장실 수돗꼭지
선진국의 반열, 헬조선, 부모들의 학교 갑질, 학교 폭력, 최단 시간내의 한국 경제 성장.....
많은 자화자찬이 난무하고, 비난과 탄성이 넘쳐나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이지만, 이 손톱 크기의 표시 하나에 한국은 그래도 살만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남도의 도청 소재지는 목포.
하지만 작은 도시인 관계로 아들은 광양에 있는 볼링장에서 시합을 했고, 수영을 온 미국 교포팀들을 응원 가는데, 팔과 다리가 한쪽이 없는 장애인들이 입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Turning을 하며 수영을 완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울컥했습니다. 비록 사회에서는 병신이라 조롱받는 선수들이지만, 그들이 삶을 헌신짝처럼 버리지 않고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는 대견한 모습이었습니다.
광양 수영장에서 열린 장애인 자유형 입수 장면
미국에 있는 지인이 이런 경기는 한국의 KBS에서 방송해 줄 것 같으니 알려달라는 카톡이 왔습니다. 현지 사정을 모르는 어르신의 희망고문이었습니다. 일반 체전도 어디서 열리는지도 모르는데, 이런 인기 없는 장애인 체전이 공중파를 탈리가 없습니다. 속된 말로 병신들의 축제에 어느 누가 관심을 가질까라는 세상적인 가치관이 이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차라리 상업적으로 돈이 되는 예능프로그램을 더 많이 보여주고 광고 수입 더 얻겠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어른들이면 취학연령의 학생들에게 이런 전혀 재미없는, 하지만, 삶의 찐한 애착을 느끼는 이런 장애스포츠 방송이 결국에는 그들의 인성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저런 애들도 열심히 사는데 그 정도 괴롭힘(이지매)쯤이야.... 하지만, 인간이 머릿속에서의 생각이 뜨거운 가슴을 타고 발로 내려와 행동하기까지 채 2미터도 안 되지만 그런 짧은 거리를 평생 동안 극복 못하고 죽는 사람이 비일비재합니다.
행주산성서 한강변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강남 끝에서 강북 끝까지 차 없는 밤길을 달려봤습니다. 채 25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사막이 푸른 강산으로 변할 정도의 다른 지형이 아닌 그냥 비슷한 하늘 아래 땅들임에도 이 한강 이남과 이북을 경계로 인간의 탐욕이 아수라장이 되어 있으니 집값이 몇 배나 차이가 납니다. 수도권의 가장들이 평생을 그 사는 아파트 평수 몇 평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서 저를 환영해 준다고 모인 고교 동창들에게 울분을 토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장애인 체전 볼링장의 미국 볼링 선수팀.
저는 이민자입니다.
좋게 말해 해외 개척자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제 살려고 나라 떠난 사람입니다.
지난 4월 맨하탄에서는 젊은 나이에 미국 전역을 돌며 독립군의 군자금을 모아 왔던 이병헌 주연의 "미스터 썬샤인"의 주인공인 황기환 애국지사의 서거 100년 만의 유해 봉송식이 있어 그분의 미국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더 좋은 집과 더 나은 은퇴를 설계해 왔던 저에게 이민자로서의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케 했습니다.
이 황열사의 피 묻은 군자금에 비하면 지금 역이민 카페의 금전 문제는 껌값입니다. 나라 위해 목숨 걸고 모은 돈이 아니라, 조국에 돌아간 역이민자들의 친목으로 모인데서의 돈 문제가 오랜 기간 조성된 내제적 갈등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지난 4월 맨하탄에서 열린 황기환 열사의 한국 유해 봉송식
우리 귀여운 손주들이 보면 참 웃을 일입니다. 그러니, 정신 차려야 합니다. 팔다리 없는데 안간힘을 다해 수영하는 그 체전의 장애 선수들이나, 영어 잘 모르고 가지고 온 돈 없이 안간힘을 다해 이민자의 삶을 사는 우리나 삶에 처한 환경은 별반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썩어 뭉그러질 육신의 영욕을 위해 힘씨지 말고, 이 황기환 열사의 그림자라도 밟을 수 있는 그 누군가를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운 곳이 이 역이민 카페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제주아톰님, David님, 길동무님, Andrew님, CA Yoon님, 추조님, 나무늘보님, 빙세기님, 로변철님, 피치트리님, 돌산도님 등등, 기타 많은 인생 선배들이 모인 이 역이민 카페는 그야말로 보석상자입니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가 우리 다운 족적을 자연스레 남기고 서로 격려하고 더불어 살아야 할 또 다른 우리입니다. 지성이 감성을 이기면 성인의 반열에 듭니다. 이성이 본능을 이기면 군자의 반열에 듭니다. 저는 그런 성인도 군자도 아닙니다. 그냥 또 다른 우리입니다. 키 두 배 되는 사람 없고, IQ 2배 차이 나는 우리 없고, 생존 기간 두 배 되는 사람 없고, 죽을 때 그 많은 보화 두고 떠나는 것이 우리입니다. 누가 누구를 감히 정죄하겠습니까? 다 같은 우리이고 또 다른 나인 것을요........
찬바람 부는 연말이라 카페의 어르신들은 더 추운 겨울입니다.
따뜻하게 잘 지내시고, 건강 유의하시길 빕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에릭손 올림
첫댓글 수도꼭지에 점자?
와 우리나라 정말 대단하네요
경기도 사는 친정오빠가 자전거 타다가 춥고 힘들면 화장실에서 몸도 녹이고 쉬었다가 라이딩 한다고 하더라고요
클래식음악과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온다네요
유럽에서 돈주고 사용해도 너무 더러워서 숨도 안쉬고 있다가 튀어 나오곤 하는데 너무나 비교되네요
몰랐던 분야의 감동의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