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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했지만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를 몰라서 어려움을 겪는 신혼부부들이 생각보다는 많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연애 때에 서로를 대하는 방식과 결혼 후 남편과 아내로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혼부부들이 관계로 인해서 되게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부부관계만 그런 건 아닙니다. 이렇게 이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놓게 되면 또 갈등이 일어나요. 이제 자녀가 생겼잖아요. 그래서 자녀 양육 문제로 갈등이 생겨납니다.
자녀에 대한 갈등은 가치관이 달라서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자녀 교육 방법이 달라서 부딪히게 되기도 합니다. 결혼을 하면 다른 또 다른 가정이 생겨나요? 새롭게 생긴 가정의 가족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곤욕을 치릅니다. 그래서 시댁이나 또 처가의 문제가 이혼의 문제로 대두되어서 이혼을 하는 경우도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왜 벌어질까요? 새롭게 만들어진 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 관계를 정립하고 만들어 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성숙한다는 것은 관계에 있어서 성숙해진다는 걸 의미해요. 내가 지식이 많아지고 내가 또 몸이 더 튼튼해지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져 가고 이것도 성숙의 한 분야는 되겠지만 성숙의 본질은 관계의 성숙에 있어요.
실제로 신앙생활도 관계를 잘 해야 행복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후 이제 교회를 다녀요. 헌금생활을 하고 봉사를 해요. 근데 어떤 성도들은 이것이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것만 잘하면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예요.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는 배워요. 그렇지만 세상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목사처럼 성도처럼 살지만 세상에 가면 목사가 아닌 성도가 아닌 것처럼 사는 일들이 되게 비일비재한 겁니다. 불명예스럽게도 성도와 목회자들의 이름이 세상의 사건 사고에 거론되는 것도 예수님을 믿지만 어떤 자세로 예수님을 세상에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배움이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잘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될까요? 여러분 우리는 교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이미 많이 배웠어요. 물론 그 배움 중에는 틀린 것도 생각보다 되게 많아요. 그렇지만 어떻든 배우긴 배웠잖아요. 그리고 주변에 또 잘 배운 분들이 있어서 내가 잘 못할 경우에 그분들이 나를 얼마든지 교정해 줄 수 있고 나를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요.
근데 내가 세상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어떤 마음과 삶의 자세가 나에게 있어야 예수님을 잘 믿는지를 잘 배우지는 못했습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이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성령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기록해 놨어요. 제자들의 경우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지 예수님을 또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어깨에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는 잘 몰랐어요. 예수님이 말씀이 좋아서 예수님이 메시아처럼 보여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과 그분이 전파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 예수님을 어떻게 섬기는 건지 요즘 말로 옮기면 내가 교회에서 세상에서 어떤 믿음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들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제자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해요.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을 대하고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대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또 모호하죠. 도대체 그럼 내가 다시 어린아이들처럼 돌아가서 그런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당연히 그런 건 아니겠죠. 15절 말씀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내가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대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는 어린아이 같이해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어린아이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대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제게 영상을 하나 이렇게 보내줬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 장애인 올림픽이죠. 패럴림픽 알파인 스키 시각장애 부분에 출전한 국가대표 양재림 선수와 관련된 동영상이에요. 추측하는데 아내가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이 예화가 너무 좋아서 영상을 찾아서 저에게 보낸 것으로 추측이 돼요. 이 영상에 등장하는 양재림 성수는 시각장애인이에요. 한쪽은 전맹 아예 안 보인다는 뜻이에요. 한쪽은 시력의 10%만 보여요. 그러니까 눈을 눈동자를 이렇게 10분할하면 그중에 한 칸 정도만 보일 정도로 시각에 장애가 많은 선수입니다.
근데 어떻게 이런 시각에 장애가 있는 선수가 스키를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스키 속도 엄청 빠른 거 아시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라요. 한 번은 제가 스키 가장 상급 코스에 스키를 타러 올라간 건 아니에요. 구경하러 올라간 적이 있었어요.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스키를 타지도 않았는데도 그 코스 자체가 경사도가 가지고 있는 이 압박감이 엄청난 거예요. 그런 경사도에서 스키를 타기 때문에 실제로는 스피드가 엄청나요.
근데 이런 운동 경기를 어떻게 시각장애를 가진 자매가 할 수 있었을까요? 이 자매가 스케일을 탈 수 있었던 것은 가이드 러너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 가이드 러너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시각장애인 앞에서 스키를 타면서 말로 스피커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말로 서로 하나 둘 셋 소통하면서 스키를 타고 또 옷을 뒤에 따라오는 스키 선수가 다 분별할 수 있도록 아주 화려한 옷을 입어요. 잘 안 보이는 옷이지만 흰옷 같으면 눈이 흰데 흰옷 입으면 안 보이잖아 그게 아니라 빨갛거나 어떻든 조금 남은 시력이지만 그것으로 보면 다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옷을 화려하게 입고 앞에서 이렇게 스키를 타고 이끌어져요.
이게 가이드 러너예요. 당연히 이 사람은 식기도 잘 타야 되고요. 뒤따라오는 사람의 상황도 잘 살펴야 돼요. 스키 선수가 장애인 스키 선수가 대회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이 가이드 러너에 대한 100%의 신뢰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못 믿으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대회에서는 이길 수가 없는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실력이 너무 좋아요. 근데 이 장애인 스키 대회는 2인 1조로 하는 경기라서 가이드 러너 나를 앞에서 이끌어주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경기도 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큰 사고도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철저하게 100% 믿든 신뢰가 있어야 그 스피드와 두려움을 이겨내고 경계를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스키 선수와 가이드 러너의 관계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잘 설명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실패하게 돼 있어요. 스키 선수가 가이드 러너를 신뢰하지 못하면 대회에서 실격을 하든 사고를 당하든 아니면 너무 점수가 낮게 나와서 아예 순위 밖에 있든 가이 로드를 믿어야만 이 대회에서 이기거나 그리고 다치지 않게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못하면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여러분과 저는 실패하게 됩니다. 신뢰하지 못하면 삶이라는 경기에서 우리는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실패할 뿐만 아니라 심각한 손상을 입어요. 스키 선수가 가이드 로를 못 믿으면 심각한 부상의 위협에 순식간에 노출이 돼요.
마찬가지예요. 여러분과 저도 세상을 살 때 세상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지 않으면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실패할 수 뿐만 아니라 심각한 손상도 우리가 입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생명까지도 잃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하지 않으려면 가이드 언어인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신뢰해야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삶이라는 경기에서 실패하는 것은 세상 속에서 우리의 가이드 언어인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선수에게 보이는 가이드 러너의 모습은 아주 일부분이에요. 전체가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일부분이 보여요. 그래도 스틱을 힘차게 뻗고 경기를 시작해요. 일부만 보이는데 장애인 선수에게 들려지는 가이드 러너의 소리는 선명하지만 이게 스피커로 전달되니까 육성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여기서는 이 스피커가 없어도 제 육성이 전달이 되잖아요. 근데 가이드 러너는 주변에 워낙 이렇게 소리들이 많아서 서로 이렇게 스피커로 주고를 받아요. 마이크와 스피커로 소리를 주고받아요. 그러니까 육성이 들린 것이 아니라 스피커 음이 들리는 거예요.
근데 육성이 아닌 스피커 음이 들려도 그것을 신뢰해야 이 게임을 완주할 수 뿐만 아니라 이겨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도 육성이 들리지 않아도 신뢰해야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의 인도가 분명하지 않아도 신뢰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의 인도가 인도가 항상 분명하고 선명할 때까지를 기다려요. 못 믿다는 거죠. 예수님이 조금 보여줘도 믿고 그 길을 가는 게 아니라 더 선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줘야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믿음은 때로는 작게 보여주는 예수님이 보여주는 그 길들을 신뢰함으로 걸어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명한 음성이 육성으로 들리지 않아도 신뢰해야 믿음의 경기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신뢰의 관계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경고하고 튼튼하고 강력하게 우리 가운데서 경험되어지게 되는 겁니다.
무리를 걷던 베드로가 순간 무서움을 느끼자 물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가이드 러너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면 순간 세상이 무섭게 여겨져요. 내가 왜 세상이 무섭게 느껴지느냐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 그런 거죠. 조금 보인다고 해서 믿지 못하고 육성으로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이 무섭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범죄하는 배경에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어요. 미래가 되게 무섭게 느껴져요. 그래서 죄를 짓게 되는 거예요. 죄를 지어서라도 내가 미래를 안정하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가 범죄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범죄에 배후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는 거죠.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배후에 두려움이 있어요. 좁은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라서 힘차게 내딛지 못하는 것은 무서움과 두려움이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도로 살면 세상에 낙오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어요. 말씀으로 살면 세상에서 바보 취급 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어요. 말씀대로 살면 나는 세상에서 명예의 영광을 얻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성도들이 세상에서 잘못된 길들을 계속 걸어요.
우리의 가이드 의원인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거죠. 성도들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믿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다 내가 이성적으로 납득하지 못한다고 해서 신뢰하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선명하게 인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법을 저질러요. 예수님이 내 삶을 분명하고 선명하게 확실하게 인도하고 있다고 믿지 않으니까 우리가 죄를 짓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쓰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거죠. 망하게 하셨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하시고 이렇게 세우셨다가 다시 넘어지게도 하시고 열매를 거두셨다가 또 맺게 하시기도 하시고 벌레를 먹게 하셨다가 또다시 완전히 회복하게 하시기도 하시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우리가 못 믿는 거예요. 못 믿어도 두려움에 휩싸이고 무서움에 휩싸여서 하나님에 대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신뢰입니다. 기다린다는 것, 인내한다는 것은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목소리가 목회자를 통해 전달된다고 해서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묵상을 통해서 나에게 전달된다고 해서 또 신뢰하지도 않아요. 하나님의 소리가 각종 꿈이나 사인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해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답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살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인 거예요. 우린 교회에서는 어떻게 예배하고 또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많이 배웠어요. 세상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못 배웠어요. 그래서 조금만 불안한 일이 일어나면 불안이 생기면 불신앙의 길을 순식간에 걸어갑니다.
여러분 직장이 어려울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신 적이 있나요? 직장에 달아날 생각을 하지 그 안에 하나님의 섭리를 보진 않더라고요. 직장의 상사가 나를 엄청 괴롭혀요. 힘들게 만들어요. 그 안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으시나요? 도망가잖아요. 때로는 월급이 너무 좁고 때로는 너무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때로는 나를 너무 무시해서 그곳이 하나님 인도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많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섬기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린아이 같은 태도가 성도의 태도여야 한다는 의미예요. 15절 하반절에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게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잖아요. 제자들에게서 문제 행동을 봤기 때문인 거예요. 그들의 행동이 수정되지 않고서는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 뻔했고,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이 되지 못할 것이 뻔했던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이 어떤 자세와 태도로 하나님 나라를 받들어야 되는지 이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시면서 어린아이의 모습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없던 믿음의 요소가 어린아이에게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어린아이처럼 어린아이와 똑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어야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어린아이의 특징 중에 하나가 수용성이에요. 스펀지는 정말 물을 잘 빨아들이죠. 이처럼 아이들은 의심하지 않고 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요. 심지어 아이들은 도둑의 말도 믿고요. 심지어 아이들은 자기를 납치하려는 사람들의 말도 믿어요. 왜냐하면 의심이 없기 때문인 거예요. 의심이 없어서 모든 것을 다 수용한다는 거죠. 이 수용성이, 이 어린아이의 수용성이 성도에게 있어야 된다는 거죠.
의심하고 배척하고 배타적인 마음이 성도에게 있으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도,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기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기도 어렵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철저한 수용성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의심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해요. 어떤 것도 의심하는 사람들은 돈을 줘도 의심하고 받아들여요. 안 받아요. 제가 한 번은 약간 이상한 장면을 하나 봤어요. 원래 아이들은 어른들이 이렇게 과자를 주면 잘 이렇게 받잖아요. 이 아이가 막 과자를 주니까 우는 거예요. 막 싫다고 하고 막 엉망 우는 거예요.
왜 그런지 이렇게 나중에 알아봤더니 보통 아이들이 이렇게 누가 어른이 와서 뭔가 맛있는 걸 사주고 이 아이를 이렇게 데려가는 거예요. 그냥 친구들이 그렇게 데려가는 걸 너무 많이 본 거예요. 원래 이 사람의 의도는 정말 이 아이가 안 돼서 뭔가 맛있는 걸 사주려고 한 게 본질이었는데, 이 아이가 친구들이 그렇게 맛있는 과자를 먹으면서 끌려가는 걸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막 통곡을 하면서 막 울고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장면이 이렇게 영상에 남겨져 있는 것을 봤어요.
원래 아이들은 그런 도둑마저도 다 믿어요. 다 믿어요. 그게 아이들의 수용성이에요. 이 아이 같은 경우는 원래 그래야 되는데 얼마나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으면 그 아이의 수용성이 다 깨졌을까요? 저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 원래 저 아이들은 살아 어른들을 믿어야 할 때인데, 어른들이 어떻게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도둑의 말도 믿고 자기를 납치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정상인데, 저렇게까지 두려워하고 하는 어떻게 살았길래 저런 모습이 있을까가 마음이 참 슬프게 하더라고요.
의심이 조금이라도 작용하면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언제 경험하느냐 의심이 사라질 때 경험하는 거예요. 의심이 사라져야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경험하는 거예요. 우리 신기하게 교회에서는 의심이 좀 덜해요. 근데 세상으로 가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심이 많아져요.
그런데 교회에는 오면 그래도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좀 작아요. 세상을 가는 순간 의심이 너무 많아져요.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가르쳐준 대로 그대로 믿습니다. 어른들은 무조건 의심하고 보지만 아이들은 먼저 믿어요.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지혜는 성경이 말하는 것이 최고이고 최선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대로 믿어야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의심하지 말고 믿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경험되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어린아이의 수용성이 의심하지 않는 수용성이 결여되어져 있어요. 하나님의 이끄심도 의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의심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의심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 이미 임해 있는 우리 가운데 이미 능력으로 임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신뢰하는 이들 속에 역사하는 나라예요. 그 능력의 크고 위대함이 그런 사람들에게 능력이 크고 위대함을 나타냅니다. 아이들은 스펀지예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요. 성도는 나이가 들어도 영적으로는 아이의 순수함이 있어야 됩니다. 성도가 성도가 나이에 맞게 나이가 드는 것 내면의 나이가 드는 것 정말 괴로운 일이에요. 한 60 70 80 살면 인생 많이 경험했잖아요. 그래서 이미 내면에는 온갖 안 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어요. 안 돼요. 해도 안 돼요. 쓸데없어요. 필요 없어요.
물론 성도는 성도는 육체의 나이는 들어도 영적인 나이는 늘 어린 아이에 대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 성도에게 남아 있어야 됩니다.
어린아이의 또 다른 특징은 의존성입니다. 철저하게 부모를 의존하는 것. 아이는 혼자 있으면 그냥 죽어요. 심지어 아이는 혼자 있으면 순식간에 위기가 와요. 여러분 아이들의 사건 사고가 되게 많잖아요. 혼자 눕혀 놓았는데 사건 사고가 생겨요. 그냥 혼자 안전하게 침대 위에 눕혀 놨는데도 아이는 사건 사고가 생겨요. 그만큼 부모와 떨어지면 떨어지면 위기인 존재가 아이인 거죠.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과 분리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어도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근데 아셔야 될 게 우리는 영적으로 아이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분리되는 순간 위기가 와요. 여러분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하나님과 멀어지는 순간 위기는 이미 여러분 앞에 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도 직장에서도 결코 하나님과 멀어져선 안 돼요. 난 하나님과 멀어지면 죽는 존재, 난 하나님과 떨어지면 죽는 존재, 하나님 하나님 없으면 죽는 존재라는 사실이 확실히 우리의 마음과 삶에 각인이 되어야 됩니다.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위기가 됩니다. 부모를 철저히 의존해야 살 수 있어요. 그처럼 성도도 하나님과 멀어지는 순간 위기가 와요. 성도도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따지고 보면 어린아이들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인생을 살아요. 그러니까 부모가 전부이기 때문인 거예요. 아이가 어렸을 때는 그냥 부모가 전부예요. 부모를 신뢰하고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동일하다는 겁니다.
말씀 한 구절 읽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우리 같이 읽습니다. 시작.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자들은 아직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상한 반응을 하며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내가 죽을 때예요. 나 자신이 죽으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할 수 있어요. 내가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것은 자신이 어른이 자신 어른의 모습이 죽어야 한다는 의미인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교회에서도 자녀로 살고 세상에서도 자녀로 살아요.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자녀를 살고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어느 순간부터 능력으로 임하느냐 내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 때예요. 다시 중단했던 직장에서의 식사 기도를 여러분 시작하십시오. 우리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예요. 만약에 우리가 교회에서만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세상에서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과 권세를 경험하지 못한 채 이 땅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이 세상의 자유를 이길 수 있고, 세상의 거짓과 위선을 이기고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이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오늘부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