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이세 允恭 사십이세 윤공
文科侍中
문과시중
문과에 급제하여 시중을 지냈다.
[보유] 九月 命內侍朴允恭增營壽德宮
구월 명내시박윤공증영수덕궁
1157년 9월. 내시(內侍) 박윤공(朴允恭)에게 수덕궁(壽德宮)을 증축[增營]하라고 명하였다.
<출처 : 고려사 卷十一 毅宗 1156년 丙子十年 ~ 1157년 丁丑十一年
[보유] 박윤공(?~?) : 의종 11년(1157) 9월 계해(癸亥) 초하루에 내시(內侍)로서 수덕궁(壽德宮)을 증축(增築)을 담당하였다. 의종 23년(1169) 12월 경자(庚子)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종 23년(1169) 기축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보유] 고려사절요 : 정중부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키다
의종 24년 1170년 08월 30일 (음)
「李高 義方等率巡檢軍, 夜抵太子宮, 殺行宮別監 金居實 員外郞 李仁甫等. 又入泉洞宅, 殺別常員十餘人, 使人呼於道曰, “凡戴文冠者, 雖至胥吏, 俾無遺種.” 卒伍蜂起, 搜殺判吏部事致仕崔褎稱 判吏部事 許洪材 同知樞密院事 徐醇 知樞密院事 崔溫 尙書右丞 金敦時 國子監大司成 李知深 秘書監 金光中 吏部侍郞 尹敦信 衛尉少卿 趙文貴 大府少卿 崔允諝 侍郞 趙文振 內侍少卿 陳玄光 侍御史 朴允恭 兵部郞中 康處約 都省郞中 康處均 奉御 田致儒 祗候 裴縉 裴衍等五十餘人.
이고와 이의방 등이 순검군을 이끌고 밤에 태자궁(太子宮)에 이르러 행궁별감(行宮別監) 김거보(金居實)와 원외랑(員外郞) 이인보(李仁甫) 등을 죽였다. 또 천동택(泉洞宅)에 들어가 별상원(別常員) 10여 인을 죽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길에서 소리치기를, “모든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 하더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라고 하였다.
군졸[卒伍]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치사(致仕)한 최유칭(崔褎稱), 판이부사(判吏部事) 허홍재(許洪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서순(徐醇),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최온(崔溫), 상서우승(尙書右丞) 김돈시(金敦時),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이지심(李知深), 비서감(秘書監) 김광중(金光中), 이부시랑(吏部侍郞) 윤돈신(尹敦信), 위위소경(衛尉少卿) 조문귀(趙文貴), 대부소경(大府少卿) 최윤서(崔允諝), 시랑(侍郞) 조문진(趙文振), 내시소경(內侍少卿) 진현광(陳玄光), 시어사(侍御史) 박윤공(朴允恭), 병부낭중(兵部郞中) 강처약(康處約), 도성낭중(都省郞中) 강처균(康處均), 봉어(奉御) 전치유(田致儒), 지후(祗候) 배진(裴縉)과 배연(裴衍) 등 50여 인을 찾아 죽였다.」
[첨언] 의종 24년 경인년 1170년 음력 8월 30일에 일어난 <정중부의 난>에서 전해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된 박윤공은 보현원이 아닌 개경의 집에서 한밤중에 습격한 정중부, 이고, 이의방의 부하들이 휘두른 칼에 맞아 죽었다. 반란에 빌미를 준 자들은 김돈중, 한뢰, 임종식, 이복기였다. 반란을 주도한 이의방과 이준의, 이린은 형제였다. 이의방이 정중부에게 살해당하자 동생 이린은 고향 전주로 내려갔다. 손자 이안사가 삼척으로 도망했다가 다시 함경도 여진족 땅으로 망명하였다. 이린의 6대손 이성계가 고려에 귀부하여 대장군이 되고, 그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가 되었다. 밀양박씨 42세 박윤공이 전주이씨 이의방, 이린의 칼에 맞아 죽었으니, 밀양박씨와 전주이씨는 전주이씨 아주 오래 묵은 宿怨이 있다.
그러나 47세 박사경은 상장군으로 이성계와 협력하여 조선을 개국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그러나 48세 박침은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고려의 충신으로 두문동 72인에 들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고 도는 것을 볼 수 있다. 박사경과 이성계가 친밀하였기 때문에 박사경의 후손들이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현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광해군이 망하면서 밀양박씨 주류도 망하고 말았다.
고려사에 나타난 박윤공과 『밀양박씨세보』의 초기 편찬은 500년의 시공 차이를 갖는다. 족보 편찬자들이 없는 世系를 만들기 위해 고려사를 뒤져서 일부러 박윤공이란 이름을 찾아 적었을 리는 없을 테니, 박윤공 대의 <文科侍中> 이 넉 자가 500년 동안 간직한 의미에서 보듯이 세보 편찬 당시까지 전해 온 각 문중의 가첩들이 진실성과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500년 이전의 世系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성과 사실성이 상당함을 인지할 수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 밀양박씨 모든 문중에서는 박윤공을 41세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갈문왕 박아도를 4세로 고정하였기 때문에 그 아래를 한 대씩 더합니다. 그래서 박윤공이 42세가 됩니다. 박윤공 항아버지에 대한 각 문중의 기사가 지금까지 한 줄 뿐이었는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고정하여 근거를 찾았으니 각 문중에서는 다음 족보를 만드실 때 제가 제시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확인하여 시사를 보유하시기 바랍니다. 010-8587-4092로 문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