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이민재는 프로라는 관문 앞에서 여섯번이나 탈락의 아픔을 맛봤다. 대학원까지 포함하면 떨어져본 경험만 여덟번. 그럼에도 그는 "한번도 야구가 재미없거나 싫어진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사진=배지헌) |
야구는 그 자체가 끊임없는 실패로 이루어진 스포츠다. 짜릿한 승리와 성공의 순간을 누리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패배와 좌절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일류 선수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3할 타자도 10번 나와서 7번은 아웃을 당한다. 전설적인 타자 프랭크 로빈슨은 2년차 시절 20타수 무안타의 부진을 겪는 동안 “다시는 안타를 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안타를 쳐냈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야구에서의 실패는 더 나은 성공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유명한 경구,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야구를 위해 존재하는 격언처럼 보인다. 우리가 멋진 홈런이나 호수비, 삼진아웃을 보며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는 것도, 어쩌면 그 한 번의 성공이 있기까지 거쳐야만 했던 수없이 많은 실패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LG 외야수 이민재(24)도 실패에 대해서라면 이골이 날 만큼 많은 아픔을 경험해본 선수다. 사실 그의 야구 인생은 언제나 실패와 좌절, 탈락으로 가득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랬다. “야구를 못해서 전학을 자주 다녔어요. 초등학교 때도 그렇고 중학교 때도 전학을 다녔죠. 1년 유급하라는 제안도 자주 받았어요. 체구가 정말 왜소했거든요. 중학교 1학년 때 신체검사에서 나온 키가 143cm에 불과했으니까요. 선린중 야구부에서 도저히 경기 출전 기회가 생길 것 같지 않아서 건대부중으로 전학을 했는데, 거기서도 주전으로 뛰지 못했어요. 두 타석 나갔다가 안타 못 치면 교체되고, 체격조건 좋은 후배들한테 밀려서 9번타자로 나오고 했죠.” 이민재의 말이다.
신체조건도 조건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야구선수로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절실한 마음이 없었다는 것. “진지한 계획이나 고민 없이, 그냥 야구가 좋아서 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는 당연히 가는 걸로 생각했고, 대학교까지 가서 교직 이수하면 되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죠. 부모님은 저 같은 선수 받아줄 고등학교 찾아 다니고, 받아주는 대학이 없어서 이리저리 알아보느라 고생하시는데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죠.” 그가 부모님의 고충을 이해하게 된 것은 경동고에서 주전 선수로 자리를 잡은 고등학교 3학년 때가 되어서였다. “나중에 깨달았죠. 야구 못하는 아들을 뒷바라지하는 부모님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야구 못하는 학교에서조차 주전으로 못 나오던 저를 관중석에서 지켜볼 때 부모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내가 정말 못된 아들이었구나, 하고 그때서야 실감이 나더라구요.”
왼손잡이인 이민재가 맨 처음 맡은 포지션은 외야수. 하지만 왼손투수가 부족했던 팀 사정 때문에 경동고 시절에는 투수를 겸했다. “지도자 분들마다 다 하시는 말씀이 ‘너는 공 던지는 폼이 예쁘니까 투수를 해봐라’고 하시더군요. 반대로 어떤 분들은 ‘너는 타자가 더 낫다’고 하는 분들도 있었구요. 그러다 보니 스스로 투수를 해야 할지 타자를 할지 많이 헷갈렸어요.” 그래서 이민재는 고교 2학년때는 투수로, 3학년 때는 다시 외야수로 돌아갔다가 홍익대에 진학할 때는 투수로 입학했다. 갈팡질팡. “제가 생각해도 좀 우유부단하고 줏대가 없는 성격이었던 것 같아요. 저 스스로는 투수보다는 타자쪽에 더 재미를 느꼈는데, 인생이 달려있는 시기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녔으니까요. 한번은 너무 답답해서 누가 좀 결정을 내려줬으면 좋겠다, 차라리 어디가 부러지거나 다쳐서 할 수 없이 투수를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에요.”
헬멧과 로진백 사이를 오가던 이민재가 지금처럼 외야로 자리를 굳힌 것은 대학교 2학년 때다. 당시 팔꿈치 부상으로 고생하던 그는 강봉수 투수코치와 면담 끝에 외야수에 전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대학 2학년 시즌을 외야수로 뛰고 그해 겨울에 수술을 받았어요. 이후로는 쭉 외야수로만 뛰게 됐죠.” 포지션이 정해지고 나자, 흐릿했던 목표 의식도 보다 또렷해졌다. “고교 때는 제가 제 스스로를 너무 잘 알았으니까, 프로에 간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그런데 대학에서 자주 출전 기회를 얻으면서부터, 프로에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이 야구를 보다 수준 높은 곳에서 계속하고 싶다, 한국에서 최고의 선수들이 뛰는 리그에서 함께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진 거죠.”
LG 이민재는 긍정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지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원래는 내성적이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거듭되는 실패가 그의 생각을 바꾸고, 성격을 바꿨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구를 대하는 그의 마음가짐을 바꿔 놓았다. (사진=백수진) |
하지만 졸업반이 된 해인 200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이민재는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했다.
“많이 실망했죠. 사실 지명 대상자인 친구들과 약속을 했어요. 동기생이 최윤석(SK)과 황성웅(롯데)인데, 셋 중에 누가 되든 안되든 그날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웬걸, 셋 중에서 저만 지명을 못 받은 거에요. 식사하면서 펑펑 울었죠.” 그런 이민재를 절친 최윤석은 ‘프로에서 신고선수로 오라는 전화가 금방 올 거다’라는 말로 위로했다. 그러나 어느 팀에서도 그를 찾는 전화는 오지 않았고, 결국 이민재는 강봉수 코치의 주선으로 LG 트윈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가게 된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당시 잔류군 계시던 코치님도 긍정적인 반응이셨어요. 그래서 합격 소식이 전해지기만을 기다렸죠.”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서류상으로 이민재가 LG 신고선수로 입단한 때는 2010년 8월이다. 그런데 그가 처음 입단 테스트를 받은 것은 2009년 8월이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다. “그때 테스트에서 떨어졌어요.” 이민재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학교 졸업하는 해 받은 테스트에서 합격을 못 한거죠. 정말 충격이었고, 많이 방황하면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이민재의 기나긴 탈락의 역사는 이제부터다. LG에서 떨어진 그는 군입대라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상무와 경찰청 야구단에도 지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아마추어 선수가 군 팀에 들어가기란 바늘로 낙타 몸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일. “그것도 둘 다 떨어졌어요. 별 생각을 다 했어요. 현역 입대도 생각해 보고, 교육 대학원 진학도 생각했죠. 실제로 성균관대와 단국대 대학원에 원서도 넣었어요.” 결과는? “그것도 떨어졌어요. 단대에서는 군대부터 다녀오라며 시험도 못 치르고 퇴짜를 맞았고, 성대에서는 면접까지 갔는데 떨어졌죠.”
탈락을 밥 먹듯이 거듭하는 사이에 어느새 12월이 됐다. 몸과 마음의 추위에 떨고 있던 이민재에게 한 친구가 일본 독립리그 진출을 권유했다. “대학 동기 중에 하나가 일본 독립리그에 코리아 해치를 간다는 거에요. 추천을 해주길래 거기에도 테스트를 보러 갔죠. 모교인 효제초등학교에서 친구와 함께 준비를 했어요.” 이번에는 합격이었다. “계속 입단 테스트 받으러 다니느라 운동을 쉬지 않고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도 1월이지만 야구를 놓지 않고 계속 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컨디션이 떨어지지 않고 유지가 됐던 것 같습니다.”
이제 계약서에 도장만 찍고 일본으로 건너가면 되는 상황. 그런데 바로 그때, 강봉수 코치에게서 연락이 왔다. “KIA에서 3군을 만들어서 육성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시더라구요. 선수를 뽑는다는 공지가 학교로 날아왔는데, 생각이 있으면 한번 테스트를 받아보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군요. (최)윤석이한테 조언을 구했더니, 당연히 3군을 가야 한다고 하지 뭐에요. 말이 3군이지만 거기서 잘 보이면 2군도 올라가고 발전할 수 있다, 꼭 테스트를 받으라고 권하더군요. 그래서 해치에는 정중하게 못 갈거 같다고 이야기한 뒤에, 확실하지도 않은 KIA 테스트를 받으러 광주로 내려갔어요.”
결과를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이번에도 불합격이었다. 당초에는 10명 정도를 선발한다고 알려진 테스트였지만, 실제로는 18명의 지원자 중에 1명만이 합격했다. “세상이 나를 싫어하나, 야구가 내 적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민재의 말이다. “그러다 결심을 굳혔어요. 제가 생일이 빨라서 동기들보다 한 살이 어리거든요. 어차피 초중고 시절 내내 유급을 권유받았던 난데, 이렇게 된거 8월 지명 끝난 뒤에 다시 테스트에 도전하자, 마지막으로 한번 도전해 보자고 생각했죠. 말하자면 프로입단 테스트를 유급한 셈이죠.” 그날 이후 이민재는 2개월 동안 웨이트 트레이닝에 전념하면서, 주말에는 사회인 야구 팀에서 선수 출신으로 활약했다. 8월에 있을 입단 테스트에 맞춰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한 준비였다.
그런데 사회인 팀에서 맺은 인연이 이민재의 운명을 다시 프로 구단 문턱으로 이끌었다. “사회인 팀을 소개해준 분께서 넥센 히어로즈에 테스트 받을 기회를 마련해 주셨어요. 그래서 강진까지 테스트를 받으러, 버스를 타고 네 시간을 가서 2박 3일간 테스트를 받았죠. 버스도 중간에 여수에서 잘못 내리는 바람에 택시를 잡아타고 겨우겨우 찾아서 갔어요. 하하하.” 이번에는 차마 결과를 물어볼 수 없었다. “거기 합격했으면 제가 지금 LG 유니폼을 입고 있을리 없잖아요. 그것도 안 됐어요. 보류라고만 통보를 받고, 합격 불합격 여부는 이야기가 없었어요. 그때가 5월 말이었어요.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서, 고교 때 코치로 만난 곽채진 코치님(현 고양 원더스) 주선으로 신일고등학교에 가서 다시 훈련을 시작했죠.”
신일고에서 훈련한 기간은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이던 이민재의 성격을 바꿔 놓았다. “2~3개월 동안 고등학생 동생들과 함께 훈련했어요. 솔직히 눈치가 보였죠. 제 딴에는 ‘프로도 못간 나같은 선수가, 그것도 졸업생도 아니면서 학교에 와서 훈련하면 아이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사실 그 친구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저 혼자 자격지심이었죠. 하지만 그 기간을 참고 이겨내면서 제 성격이 조금은 달라진 거 같아요. 이 정도는 이겨내야 한다, 목표를 향해 가려면 얼굴에 철판 깔고 당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민재는 그 기간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믿는다. “아마 대학 졸업한 뒤 고생하는 기간 없이 바로 프로에 들어갔으면, 그때 제 성격이면 주눅 들어서 얼마 못 견디고 바로 나왔을지 몰라요.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었거든요. 프로에 가서 그래갖고는 성공하지 못하잖아요. 저에게는 그것조차 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입에서 나는 단내를 맡으며 훈련하다보니 어느새 8월, 신인 드래프트가 열리는 때가 됐다. 이민재는 부모님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LG 트윈스의 입단 테스트 기회를 얻어냈다. “참 제가 생각해도, 같은 팀에 2년 연속으로 테스트를 받는 사람이 있을까 싶더군요. 거기 계시던 정성주 차장님(LG 스카우트)이 ‘너도 정말 징하다’고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했어요.” 결과는 합격이었다. “합격 소식을 듣는 순간, 지난 일년간의 일이 전부 떠오르더라구요. 하지만 기쁜 마음은 잠깐이고, 그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프로 생활을 헤쳐 나갈지를 생각했어요. 마음을 굳게 먹었죠.”
부모님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어린아이 좋아하듯이 방방 뛰면서 기뻐하셨고, 어머니는 표현을 잘 안 하시는 성격이라 아버지보다는 침착했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하셨어요. 그때까지 맨날 테스트만 했다 하면 떨어지는 아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크셨을 텐데,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으셨거든요. 오히려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셨죠. 부모님께 지금도 정말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 뿐이에요.” 힘들 때마다 친구 최윤석의 격려도 큰 힘이 됐다. “윤석이가 방망이나 도구 같은 건 다 지원해 줬어요. 테스트 결과 기다리는 저한테도 ‘넌 될거야. 넌 정말 아까운 선수야’라고 좋은 말만 해 주고. 정말 좋은 친구에요.”
이민재는 빠른 발과 정확한 타격 능력, 좋은 송구와 수비력을 갖춘 외야 유망주로 꼽힌다. LG의 두터운 외야 선수층 때문에 당장은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지만, 그는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기다림의 끝에는 결과가 따르고, 실패했을 때는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진=배지헌) |
신인 드래프트 낙방을 시작으로 LG, 상무, 경찰청, KIA, 넥센까지 총 여섯 번(대학원까지 합치면 여덟 번)이나 불합격의 아픔을 겪은 이민재를 LG에서 합격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김기태 감독님이 2군 감독으로 계실 때였는데, 테스트 때 직접 와서 보셨거든요. 저도 그렇고 한일장신대 출신인 최영진 선수가 뽑힌 것도 보면, 출신 학교나 경력을 보기보다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나 의욕을 보고 뽑으신 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일년을 쉬면서도 혼자 운동을 계속했다는 걸 평가하신 게 아닐까. 정성주 차장님도 합격 소식 전하면서 말씀이 ‘네가 야구를 잘해서 뽑은 게 아니다. 1년 동안 그렇게 몸을 만들었다는 건 야구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판단이 됐기 때문에 뽑은 거다’라고 하시더라구요.”
이민재는 자신이 그동안 프로의 선택을 받지 못했던 것은 “한 가지 특출하게 뛰어난 재능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진단한다. “하나라도 확 눈에 띄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했어요. 발도 빠르긴 하지만 엄청나게 빠르다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고, 방망이는 맞히는 재주는 있지만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었고, 어깨가 강하다고는 하는데 실전에서 보여줄 기회는 많지 않았죠.” 이에 대해 정성주 스카우트 차장은 “이민재는 빠른 발과 좋은 어깨, 컨택 능력을 겸비한 가능성 있는 선수”이며 “훈련태도도 아주 성실하다”고 좋은 평가를 내렸다. 다만 아마추어 시절부터 파워가 부족한 게 약점이라는 지적이다.
여섯 번이나 입단을 거절당한 이민재의 숨은 잠재력은, LG 유니폼을 입은 뒤부터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제가 비록 부족한 점은 많지만, 만약 프로에 가서 전문적인 지도를 받으면 지금보다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내가 어느 정도 잠재력이 있는 선수인지는 프로를 가봐야 알 수 있는 거잖아요. 일단 LG에 온 뒤에는 타격 능력이 가장 크게 발전한 것 같아요. 아마추어 때는 전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배우면서, 시야가 넓어졌다고 할까요. 타격에 처음으로 자신감이 생겼어요. 수비도 좋아졌어요. 처음에는 사회인야구 선수도 안할만한 실수를 하도 하니까, 김기태 감독님이 ‘여기가 무슨 엘지 공장 팀이나 엘지 회사원들 야구단이냐’고 하실 정도였거든요. 코치님들이 세세한 부분까지 좋은 지적을 많이 해주셔서 지금은 많이 향상됐다고 느껴요.”
물론 신고선수에게 입단하자마자 기량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지난해 퓨처스리그를 개막하니까, 1군에서 한꺼번에 선수들이 내려와서 바로 2군 경기에 투입되더군요. 벤치부터 시작했죠. 좀 허탈하긴 했지만, 트레이너 한 분이 해주신 말씀이 도움이 됐어요.” 어떤 얘기였을까. “지금 시작은 비록 이렇지만, 나중에 1군에 올라가도 처음에는 벤치에 앉게 될 거라고 하셨어요. 2군에서 벤치에 있더라도 기회를 잡아서 잘 하면 그 다음에는 2군 주전을 뛸 수 있고, 2군 주전을 해도 1군에 올라가면 다시 벤치에 있을 거고, 백업으로 뛰다가 기회를 얻어 주전으로 올라서는 거라고. 단계를 밟아 올라가게 마련이니까 절대 조급해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무엇보다 부상당하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까, 절대 아프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참고 기다리는 일이라면 이민재의 전공 분야. 묵묵히 자신의 훈련을 하면서 기다리자, 결국에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따금 대수비나 대타로 나갈 때마다 꼭 안타가 나오더라구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술적으로 좋아졌던 모양이에요. 그러다 1군에서 이진영-이대형 선배가 부상당하면서 외야수 자리가 비게 됐어요. 드디어 저에게도 경기에서 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거죠. 나한테는 여기가 1군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었어요. 다행히 기록도 좋아서, 5월 중순 이후부터는 꾸준히 출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어요.”
지난 시즌 퓨처스에서 이민재의 성적은 타율 3할 6리에 도루 23개. 공수주에서 팀내 유망주들을 능가하는 좋은 기량을 과시했다. 그 결과 올 시즌을 앞두고 해외 전지훈련 명단에 포함되고 신고선수에서 정식 선수로 승격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사실 저 스스로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김기태 감독님께서 전지훈련 명단에 넣어주신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중도 귀국하긴 했지만, 베테랑 선배들과 함께 숙소 생활하면서 야구는 물론 일상생활까지 옆에서 지켜본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시범경기도 비록 하루동안이지만 출전 기회를 얻었구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관중석에서 제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딱 하루 동안 시범경기를 체험한 뒤 다시 구리로 돌아가는 그에게, 김기태 감독은 따뜻한 격려를 건넸다. “감독님께서 ‘너희들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 알고 경험 시켜주려고 부른 거다. 너희들 잊지 않을 테니까, 열심히 하고 있어라’고 말씀하셨어요.” 감독의 격려가 힘이 된 덕분일까. 올 시즌 현재(16일)까지, 퓨처스리그에서 이민재는 팀내 타자들 중에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펼치고 있다. 팀이 치른 전 경기(21경기)에 출전해 75타수 23안타 타율 3할 7리. 홈런은 없지만 안타 중 7개가 2루타, 5개가 3루타일 정도로 ‘갭 파워’ 히터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제가 원래는 장타자와는 거리가 먼데 프로 첫해 은근히 2루타, 3루타가 많이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꼭 홈런만이 장타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꾸준히 웨이트하고 타구에 힘을 싣는 법을 익혀서 홈런타자는 아니더라도 ‘한 방이 있는 타자’가 되는 게 최종 목표에요. 수비, 주루, 타격, 작전수행, 장타력까지 두루 다 갖춘 타자가 되고 싶어요.”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직도 통과해야 할 많은 관문이 남아 있다. 이민재도 이를 잘 안다. 그래서 결코 조급해하거나 의욕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스스로를 계속 경계한다. “작년에는 그저 경기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목표 달성이었는데, 올해는 1군 무대에 올라간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잖아요.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그 목표가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저 스스로 초조해하고 의욕이 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돼요. 제 마음을 다잡는게 중요할 거 같아요. 초심을 계속 유지하면서, 지금 여기서 하는 훈련과 오늘 하는 경기에 집중하고 끊임없이 의욕적으로 야구에 몰두하려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제 목표인 1군 무대 입성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까요.”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민재는 언제고 기다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숱한 기다림과 실패를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실패는 전혀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 되지 못한다. “1년 동안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전전했던 경험이 저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재산이죠. 그전까지는 인생에서 뼈저린 좌절을 경험한 적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뒷바라지 해주시는 대로 아무 걱정없이 살았죠. 프로의 문턱에서 연거푸 떨어지면서, 비로소 실패가 어떤 것인지, 기다린다는 게 무엇인지를 절절하게 배울 수 있었어요.”
그가 얻은 교훈은 간단하다. “기다림의 끝에는 성공이든 실패든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런데 제가 실패는 많이 해봤잖아요. 이제는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고, 계속 도전하고, 또 새로운 길을 찾아 가면 된다는 걸 알아요. 기다린다는 게, 실패하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야구에서는 무수히 많은 실패가 쌓이고 쌓여, 성공의 기쁨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이민재는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안다. 그에게 있어 진짜 실패는, 실패가 두려워서 도전을 포기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민재는 오늘도 내일도, ‘더 나은 실패’를 향해 쉬지 않고 배트를 휘두른다. 2군 구장의 컴컴한 어둠 속이 아닌, 잠실벌의 환한 조명과 환호 속에 배트를 휘두르는 날을 꿈꾸며. 그는 지금, 야구 인생의 새로운 테스트를 향해 도전하고 있는 중이다.
인터뷰 진행: 백수진, 배지헌
인터뷰 정리: 배지헌
첫댓글 축하 ㅋㅋㅋ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