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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7절로 12절 바울이 드로아에서 유드고를 살려냄
7절.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1. 바울의 일행이 모두 드로아에 함께 모였습니다.
즉 앞에 간 7명의 사람들과 뒤에 간 일행들이 함께 드로아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드로아 교회는 바울이 에베소 전도를 마치고, 디도를 만나기 전에 전도하여 설립한 교회였습니다.
그 때 바울이 드로아 전도할 때, 복음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절.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그래서 드로아 교회가 설립 되었는데, 드로아 교회는 역시 3층까지 건축되어 있는 부자 성도의 큰 집이 교회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예루살렘 교회가 마리아(마가의 어머니)의 집이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에 마리아의 집은 120명의 성도가 한 번에 들어가서 기도할 수 있을 만큼 큰 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개척교회는 잘 믿고 부유한 성도의 큰 집에서 모여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미국 같은 곳에서는 별도의 교회당 건물을 가진 교회는 정말 대단한 교회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보통은 별도의 건물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2. 그 주간의 첫날에 떡을 때러 모였다는 것은 요즘말로 주일날 성찬식을 거행하려고 모였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안식교 같은 곳에서는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고 있지만, 오늘 본문처럼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날(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면서 성찬식을 거행하고 예배 드렸습니다.
원래 안식교는 화이트 부인이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계시를 주장하여 생긴 신비주의 집단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안식교의 잘못은 특히 시한부 종말론에 있습니다.
즉 1883년 10월 22일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발표했다가 안 오시니까, 계산을 잘못했다고 1년을 연장했습니다.
그래서 1884년 10월 22일 안식교 교인들이 뉴욕에 모여서 밤 12시를 기다렸습니다.
모두 찬송하고 소리 내어 기도하면서 열광하고 있는데, 옆 건물 옥상에 술 취한 남자가 올라가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진짜 예수님이 재림한 줄 알고, 안식교인들이 미쳤습니다.
그래서 안식교의 시한부 종말론이 웃음거리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안식교는 자기들만 14만 4천에 들고 재림시에 들림 받는다고 시한부 종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교적인 율법을 고수하여 돼지고기 같은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처럼 토요일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려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소나 양 잡아서 제사 드리면서 예배 해야 참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교는 사이비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주일날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성찬식을 거행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1절에서 <떡을 떼어 먹었다>는 것은 사랑의 애찬(Agape)을 나누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는 성찬식도 거행하고 애찬식도 거행했지만, 애찬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서, 점점 사라지고, 성찬식도 일 년에 몇 번 거행하는 쪽으로 갔습니다.
지금도 어떤 교단에서는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거행하는 곳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주일날 교회에서 점심을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은 친교가 되며, 구역예배 시에 예배드리는 가정에서 다과로 대접하는 것도 좋은 교제가 됩니다.
일반인들도 함께 식사하는 것이 친교나 사업을 위해서 좋은 것처럼, 교회에서도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좋은 교제가 됩니다.
이처럼 함께 식사하면서, 교회 일에 대한 좋은 의논도 할 수 있습니다.
4. 바울은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가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이튿날 드로아를 떠나기 위해서 밤중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16절에 말씀한 대로 바울은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전달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바울과 드로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접대하기 위해서 그냥 음식 접대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공부를 했습니다.
이처럼 목회자를 잘 대접하는 것은 음식 대접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려는 것이 참 좋은 대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음식을 준비하는 마르다 보다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대접을 더 잘 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들도 교수에게 음식 대접하면서 휴강하자고 하지, 음식 대접과 함께 말씀 공부하겠다고 잘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광주 동명교회 남전도회는 음식 접대를 잘 하면서도 성경 공부에 열심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이 지금은 대부분 장로님들 권사님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밤중까지 설교를 했고, 드로아 교인들도 불평하지 않고 밤중까지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들입니다.
과거에 중국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이처럼 말씀의 은혜를 사모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초대 교회 때는 사경회라고 해서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밤 집회 이렇게 사경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쁘다는 이유로 성경 공부하는 사경회 보다는 재미난 부흥회를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은혜 생활을 하려면 <새벽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새벽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듣고, 새벽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도 새벽예배로 성공했습니다.
8절.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1. 윗 다락이란 것은 오늘날 3층을 가리킵니다( 9절- 3층에서 떨어지거늘).
이 3층에 등불을 많이 켰다는 것은 그만큼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경 공부를 하려면, 등불을 많이 켜고 밝아야 합니다.
이렇게 3층에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집은 대단히 큰 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원래 바울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만 해도 열 댓 명이 될 것이고, 드로아 교인들까지 합치면 백 여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9절.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 유드고라는 청년은 <다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으로서 남의 집 하인으로 일하는 일군이었습니다.
그래서 낮에 일을 많이 하느라고 몸이 피곤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피곤했기 때문에 졸지 않으려고 창문에 걸터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깥도 아니고 안쪽도 아닌 창문은 위험한 곳입니다.
즉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든지 안 믿으려면 밖으로 가든지 태도가 확실해야 합니다.
오히려 어중띄기는 다른 교인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드고가 창문에 걸터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 다른 교인들에게도 집중력을 방해하고 바울사도에게도 방해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졸리면 아예 밖에 나가서 세수를 하고 다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유드고는 창문에 앉아서 졸다가 깊이 졸았습니다.
이 때 다른 참석자들이 유드고를 깨웠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내버려 두었다가 유드고의 추락사건으로 인해 성경 강해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다가 조는 사람이 있으면 옆에 사람이 깨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졸음이 전염 되어서 모두 설교를 못 듣고 끝나버리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옴을 볼 수록 모이기에 힘쓰도록 서로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갈 때, 슬기로운 다섯 처녀 같이 졸지 말고, 깨어 기도함으로 등불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3. 유드고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3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입니까?
여름 수련회 때 어린아이가 하나 죽으면, 교회가 쑥대밭이 되어버립니다.
이 때 드로아 교회도 유드고 청년이 예배당에서 설교 듣다가 떨어져 죽었으니, 잘못하면 교회가 시험 들어서 교회의 문을 닫아야 할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핍박과 데모가 일어났는데, 유독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만은 평안했습니다.
1차 전도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교인이 죽이려고 했고, 이고니온까지 쫓아와서 난동을 부렸고,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2차 전도 때는 빌립보에서 점쟁이 사업가들이 고소해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었고,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유대교인들이 죽이려고 해서 도망했고, 고린도에서는 유대교인들이 고소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3차 전도 때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우상장사꾼들이 데모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드로아에서는 이런 핍박이나 데모가 없이 복음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절.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이처럼 드로아에서는 외부적인 핍박이나 데모가 없어서 평안했는데, 내부적으로 바울의 설교 때 유드고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유드고가 다시 살아나지 않고 그대로 죽어버렸다면, 온 교회가 시험이 들어 문을 닫고 바울의 복음 전도도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외부적인 핍박은 성도들에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평안하기만 하면, 내부적으로 썩어서 스스로 무너지고 맙니다.
만일 우리 교회가 아무 문제가 없고 평안하기만 하면, 내부적으로 곪아서 자체적인 범죄로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 늘 깨어 기도하시고, 서로 격려하여 모이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10절.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 바울이 설교할 때, 설교 듣던 사람이 죽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이 때 바울은 설교를 중단하고 내려가서 청년 죽은 청년의 시신 위에 엎드려서 몸을 안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그 시신 위에 엎드려서 눈에 눈을 대고, 입에 입을 대고, 손에 손을 댄 후에, 일곱 번 그렇게 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죽은 사람의 몸 위에 엎드린 것은 자기의 생명을 죽은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간절한 모습입니다.
보통은 병자에게 안수 기도를 하지만, 이처럼 특별한 경우에는 죽은 사람의 몸에 엎드려서 생명을 전달하고 살려내는 것입니다.
2. 바울이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한 말은 정말 바울이 영적인 안목이 열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이아무개 목사라는 분이 충청도 서산에서 집회를 하는데, 제주도에서 어떤 부인이 이아무개 목사님을 만나려다가 못 만나고 병원에서 죽었답니다.
그런데 의사도 죽었다고 닝거를 다 빼고, 심전도기계도 다 멈추어서 다 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아무개 목사님이 보니까, 아직 살아있더랍니다.
그래서 병실이 떠나가라고 30분 정도 기도하니까, 죽었다던 분이 다시 살아났답니다.
이처럼 바울은 영적인 안목으로 유드고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기도하여 완전히 살려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죽었던 유드고를 살려낸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사도행전 9장 40절에서 죽었던 도르가를 살려낸 것과 같습니다.
11절.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 유드고가 살아난 후에 다시 3층에 올라가서 다시 떡을 때어 먹고, 날이 새도록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또 교제했습니다.
성찬과 예배와 성경공부와 애찬과 교제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초대교회의 모임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동명교회 남전도회 모임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2장 43-47절에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도 집에 모여 함께 떡을 떼고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하고, 기도에 힘쓰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꼬박 철야집회를 했습니다.
성찬식도 거행하고, 말씀도 오랫동안 듣고, 죽었던 사람도 살아나고, 떡을 떼면서 오래토록 친교하면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좋은 철야 집회의 모습입니다.
12절.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1. 3층에서 떨어져 죽었으면, 다시 살아났더라도 상당한 기간 동안 병원에 입원해있다든지, 적어도 며칠 동안 누워 있어야 할 것인데, 떨어지기 이전처럼 완전한 건강을 회복한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드로아 교인들은 유드고 회생을 통해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나 가정이나 교회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함으로써 큰 위로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