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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6코스는 쇠소깍다리를 출발하여
제지기오름에 올랐다가
서귀포 올레여행자센터에서 마무리하는
11킬로미터로 난이도는 쉬운 구간, '하'다.
방금 도착한 기착지를 출발한다.
먹거리 골목 '아랑조을거리' 입구다.
제주 사투리로
'알아서 좋을 거리'라는 뜻이란다.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작가의 산책길, 이중섭거리다.
언덕을 따라 내려간다.
이중섭미술관 입구에 있는 연리지다.
본래 뿌리가 다른 나무 가지가 얽혀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연리지는
한 뿌리에서 난 가지가 얽혀있다.
다소 억지스러운 느낌이 있다.
부제가 '아고리와 아스파라거스의 사랑나무'다.
이중섭과 부인 별칭이
'아고리'와 '아스파라가스'다.
일본 유학 중 친구들이
긴 턱을 가진 이중섭에게 붙인 별명이 '아고리'다.
이중섭미술관이다.
천재화가 이중섭이 1951년 한국전쟁 중,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서귀포로 피난왔다가
1년 가까이 거주 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던 곳이다.
그 당시 거주했던 곳 옆에 미술관이 있다.
일본 유학 중 학원에서 만난 일본인 미야모토 마사코와 결혼하여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부부는 피난지 부산으로 돌아갔다가
궁핍을 견디지 못하고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으로 간다.
이중섭 탄생 백주년기념 사업으로
일본으로 돌아간 아내에게 보낸 미공개 편지를 통해
부부의 사랑을 느낄수 있는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2016년 개최된
'운명의 현해탄, 아고스와 아스파라가스의 사랑' 특별전이다.
이중섭거주지 옆에 조성된
이중섭공원이다.
이중섭거주지를 복원해놓았다.
당시 작품을 보면
그가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슴을 알게된다.
여기에 원주인이 거주하고있다.
마루에 앉아계신 할머니인데
귀가 안들리시는지, 관심이 없으신지
인사를 여쭤도 미동도 않으신다.
이중섭 동판화가 벽에 걸려있다.
도로건너
활과 시위로 입구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솔동산 문화의 거리'입구다.
송산마을, 소나무가 우거진 동산이지만
또 다른 유래도 있다.
옆에 서귀진이 있어 군사들이 훈련을 하던 장소로,
높은 동산에 활을 쏘기 위해 솔대를 세웠다하여
'솔대동산'으로 불리다 '솔동산'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제주 3성 9진의 하나인
서귀진지 성터다.
본래 홍로천, 인근에 있었는데
1590년 이 곳으로 옮겨왔다.
성 밑 포구가 넓고 암벽에 둘러쌓여 방풍이 되어
선박을 감추기 용이했다.
진 주변에 사람이 살지않아
페목장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거주하도록 하고
정방폭포 상류 물을 끌어와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하도록 했다.
서귀진 집수정이다.
해안가에 공원이 조성되어있다.
자구리포구에 설치된
자구리문화예술공원이다.
서귀포항 방파제 너머 문섬이 보인다.
배에 서있는 순록이
제 키보다 몇 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실크로드 - 바람길,
저마다의 짐을 짊어지고
묵묵히 살아가는우리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해설이다.
서귀포항 방파제가 길게 뻗어있다.
천재화가 이중섭이
가족들과 물놀이를 하면서 게를 잡던 곳이다.
직접 손으로 채취하는
바릇잡이 체험이 가능하다.
체험시 보말, 미역, 소라 채취가 가능하다.
멀리 섶섬이 보인다.
오른 쪽 해안 안쪽에
둥근 원을 한 시설물이 보인다.
해안가 낮은 담 안에 물을 가둬놓았다.
자구리담수욕장,
아이들이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공원을 빠져나와
소남머리로 간다.
옛날 일본인 큰 부자가 살았는데
냉동공장을 짓기위해 파놓은 곳이 소머리 모양으로 생겼다는 이야기와
이 부근에 소나무가 많고, '머리'가 제주어로 '동산'을 뜻하여
소나무가 많은 동산이라는 의미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남머리 산책로를 도는데
해안으로 빠지는 계단이 보인다.
아래로 내려가니
수량이 풍부한 용천수를 담아 흘러내리도록
원형으로 저수조를 만들어 놓았다.
오른쪽 절벽 밑 작은 굴 안에
치성을 드린 흔적들이 보인다.
용천수 풀장이 제법 넓다.
다시 소남머리 산책로로 올라간다.
소남머리는 서예가 소암 현중화가
자주 찾았던 곳으로 알려져있다.
끄트머리 전망대에 올라
거믄여, 보목마을 방향 해안과 섶섬이 보인다.
해안을 둘러보며 벗어났던 올레가
정방폭포입구 교차로에서 합류한다..
서복공원 삼문 문루가 높다.
진시황이 불로영약을 얻기위해
서복(서불, 서시라도도 함)에게 명령하여 동남동녀 오백명과 함께 대선단을 이끌고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 한라산을 찾아온다.
일행은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리고
한라산에 올라 불로영약을 구하여 서쪽으로 돌아가면서
정방폭포에 '서불과지'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다.
'서귀포'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와 관련된 자료를 전시한 곳이다.
정방폭로 가는 길,
왼쪽 담안으로 공원이 보인다.
서복 불로초 공원,
서불이 한라산에서 구해 돌아간 불로초글 의미하리라.
중국 고유 황금색 기와를 인
정자가 보인다.
공원내에는 맥문동, 삼백초, 어성초 등
약용식물이 식재되어있다.
정방폭포 매표소다.
어른 이천원, 매표하고 입장한다.
신혼여행지로 찾았던 곳이다.
그 시절에도 매표를 하였는지
기억이 없다.
입구를 들어서자
두 줄기 물이 쏟아지는 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입구 괴이하게 굽은 소나무 가지 너머로
폭포를 사진에 담아본다.
옆 해안 모습이다.
단애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높이 23미터, 너비 8미터,
소의 깊이가 5미터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폭포수가 바다로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젊은 연인이 서성인다.
부탁하여 사진 몇 장을 찍는다.
찍어드릴까, 되묻는데 부탁해온다
건너받은 스마트폰으로는
뒷 배경을 담기에 부족하다.
이해를 구하고 내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여
전송해 주고 지운다.
서복공원으로 들어서기 전,
정방폭포 안내문에는 폭포에 새겨진 글자가
'서불과차(徐市過此)'로 기존 글자위에 덧붙여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서복전시관 안내문에는
'서불과지(徐市過之)'라고 소개한다.
서복전시관 안내문 내용을 보면
'파한록 기록에 의하면
백락연 제주목사가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그려오게 하였다.
글자를 살펴보니 전부 12자 였는데
과두문자라 해석할 수 없었다.'한다.
어떤 착오가 있었던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통일된 안내가 필요해 보인다.
짧은 시간, 사진 몇 장으로
옛추억을 회상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반대편 서복공원 출입구로 나선다.
해안가 절벽 위 산책로를 따라간다.
위령탑이 보인다.
우리나라 해난사고 사상 최악,
323명의 사망, 실종자를 기록한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이다.
세월호 사고가 304명의 사망, 실종자를 기록했으니
그 보다 더 큰 사고였다.
물론 사고 규모는 의미가 없겠지만
사고 경위를 보면 비슷하다.
단단히 결박되지않은 과적재된 화물이
파도에 선체가 기울면서 쏠려 침몰된다.
똑같은 실수가 대형참사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
너무 답답하다.
산책로를 따라 계속 가다보면
'소라의 성'에 닿는다.
해안가 절벽 위에 자리잡은
설계자 미상의 건축물이다.
서귀포시에서는 소라의 성을
시민 북카페, 열린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은 정기휴무일이다.
마침 찾은 날이 월요일이라
내부는 둘러 볼 수 없었다.
소라의 성 외부를 둘러보고 나와
다시 길을 재촉한다.
소라의 성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들어
해안가에 닿으니
외국인 부부로 보이는 일행이 보인다.
남편은 카메라를 들고
바닥에 엎드려 위 쪽을 사진에 담고있다.
높이는 낮지만
어제, 그제 내린 비 때문일까,
수량은 제법 풍부하다.
'소정방폭포'를 이렇게 조우한다.
해안절벽이 아득하다.
저런 벼랑 위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는게
아찔하다.
다시 올레로 돌아와
산책로를 걷는다.
해안가 우거진 나무숲을 지나
파라다이스호텔 끝 건물 사이를 지나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바다 건너 섶섬이 보인다.
비탈 길을 지나
계단을 내려서
다시 해안에 닿는다.
해안가 조성된 올레길을 따라간다.
펜스 안쪽은 우회로다.
기상악화 또는 노약자가 이용 할 수 있도록
다소 편안한 길을 만들어놓았다.
오늘은 바깥, 해안으로 걷는다.
땅속으로 스며든 빗물이
아직 다 스며들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서귀포항 방파제가
문섬에 닿은듯 보인다.
다시 해안가 숲을 지나
거문여해안에 닿는다.
문섬이 보이,
서귀포항 방파제 뒤 나즈막한 새섬,
맨 왼쪽 평평한 능선이 삼매봉이다.
해안가 숲길을 빠져
건물 사이를 통과해
해안 도로, 에 검은여로에 닿는다.
도로 변 옹벽과 맞닿은 바위 사이로
작은 폭포같은 물이 떨어진다.
문섬위로
마치 장막이 걷히듯 파란 하늘이 드러난다.
국궁장, 백록정 사대 해안 맞은 편에
과녁에 세워져있다.
언덕을 올라
보목 하수처리장 뒤 해안을 따라
다시 뒤돌아본 풍경이 환상적이다.
거센 바람에 구름이 밀려나고
다시 기세를 잡으려는 하늘이 조화를 부린다.
복목하수처리장 끝에서
해안가 숲길로 올레가 방향을 안내한다.
짙고 무성한 숲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언덕을 올라서
다시 산책로를 걷다가
'소천지'이정표를 보고
오른쪽 해안으로 빠져 전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이다.
섶섬 위 하늘을 더 멀리 걷혔고
앞쪽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웅덩이가 있다.
백두산 천지를 축소해 놓은 모습이라
소천지라고 명명하였다.
날씨가 맑고 바람이 없는 날에는
소천지에 담긴 한라산을 찍을 수 있다는데
방향으로 봐서는 이해가 안된다.
해안으로 내려가
소천지를 둘러싼 화산석 위로 올라간다.
소천지에서 올라와 올레길에 오르니
제주대학교 연수원 경계 밖이다.
무성한 나무터널을 지난다.
돌담 아래 난 소로를 지난다.
잠깐 길을 빠져 해안으로 내려선다.
방금 전과 완연히 다른 하늘,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걸까?
다시 숲길로 돌아와 걷다보니
독특한 모양의
2층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구두미 포구'가 그야말로 아담하다.
이 지역이 거북이 머리와 꼬리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섶섬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구도미포구 앞으로 나온 올레가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구두미포구 너머로 본
섶섬과 바다풍경이다.
멀리 지귀도가 보인다.
섶섬해녀할망카페, 순다리할망,
순다리, 쉰다리라는 메뉴가 낯설다.
제주도 토속 저농도 알콜음료다.
쌀밥이나 보리밥을 발효시켜 만든다.
할망카페 뒤 숲을 지나 둔덕을 넘어간다.
보목천이 바다로 흡수되는 곳에
건너는 다리가 있다.
다리 위에서 올려다 본 상류다.
폭우가 내렸다는데도 말라붙었다.
포목포구 지나
휠체어구간으로 나뉜 올레가
제지기오름으로 방향을 꺽는다.
왼쪽 제지기오름 입구가 나타난다.
오름 남쪽 중턱 굴이 있는 곳에
절과 절을 지키는 절지기가 있어
절오름, 절지기오름으로 불리다 제지기오름이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그 외 옛 지도에 저즉지, 저즉악으로 표기되어
오름모양이 낟가리와 비슷안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산 둘레를 돌아
완만하게 산길이 올라간다.
중턱에 올라 한라산을 조망한다.
구름은 걷혔지만 박무가 남았는지
오늘도 선명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능선에 올라섰는데
나무가 꽤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섶섬이 보인다.
정상부는 대체로 훤하지만
너머로는 나무에 가려 전망이 그다지 좋지 않다.
남동방향,
납작하게 가라앉은 지귀도가
그나마 또렷하게 보인다.
왼쪽 끝, 하얀등대가 구분된다.
하산을 서두른다.
중턱에서 내려다 본 서북방향은
하얀 비닐하우스가 가득하다.
효돈 감귤로 유명한 지역이라,
대부분 감귤하우스로 짐작된다.
한라산이 의연한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서쪽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해안 하효항방파제와 등대가 보이고
그 너머 남원읍 방향 해안으로 곶이 뻗어있다.
마져 계단을 밟아
칠십로로 내려선다.
제지기오름과 비닐하우스 사이로 들어섰다,
길이 막혀있어 돌아나온다.
칠십리로를 따라 가다 첫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꺽어져 들어간다.
다시 해안으로 길이 이어져
해안도로에 닿아 잠깐 바다로 빠진다.
'해녀들이 물질과 수영을 배울 때 이용하는 곳으로
미역, 소라, 오분자기 등 각종 해산물이 풍성하게 나는 곳이다.
큰 통 같다하여 '큰업통'이라고 불린다.'
'남쪽 갯가로 뻗어나간 곶부리를
소금코지라고 불렀다.
소금코지 허리 부분에 평평한 바닥돌이 있는데
바닷물이 들어왔다 증발하면서
하얗게 소금이 남았다 하여 불리게 되었다.'
암쪽 암석 두 개가 유달리 하얗다.
바다 철새들이 쉬는 곳이라하여
'생이돌'이라고 부른다.
'생이'는 제주도 사트리로 '새'를 뜻한다.
바위에는 새가 싼 똥으로 하얗다.
그 외, 바다로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와 아들, 모자바위라고도 부른다.
하효항방파제가
앞바다에 웅크리고 파도를 막고있다.
생이돌, 모자바위 뒤로
지귀도가 보일듯 말듯 하다.
해안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방파제 안쪽 하효항이 있다.
하효마을이다.
해녀상이다.
효돈감귤을 형상한 조형물과
효돈감귤 안내비가 바다를 향해 서있다.
효돈은 따뜻한 지역으로
오래 전부터 감귤을 재배해 욌으며
진상품으로 조정에 보내질 정도로 맛이 깊었다.
쇠소깍을 빠져나온 효돈천이
바다로 흡수된다.
하류에 펼쳐진 검은 모래해변이
하효 쇠소깍해수욕장이다.
이 지역 모래가 검은 것은
한라산 고지대에 분포되어 있는 현무암이 침식되면서
하천을 통해 바닷가로 운반되어 형성되었다.
효돈촌 최하류,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부교를 설치하여
선착장을 만들어 놓았다.
선착장에 나룻배가 십 여척 묶여있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하효천 하상이
마모되면서 깊고 넓은 물웅덩이, 소를 만들었다.
'쇠'는 효돈의 옛지명 '소'를 뜻하고,
'소'는 '웅덩이'를 가르킨다.
'깍'은 '끝' 또는 '꼬리'를 의미한다.
'소웅덩이의 끝'이라는 말이다.
전통 나룻배를 탄 사람들이
노를 저으며 소를 오르내린다.
단체 승객을 태운 테우가
쇠소에 놓인 줄을 끌며 소요한다.
쇠소깍 위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농산물을 판매하는 상점이 자리잡고있다.
쇠소깍 상류, 물이 말라버린 효돈천에
풀이 우거졌다.
쇠소깍과 마찬가지로
암반이 깍여나간 절벽이 형성되어있다.
물이 고인 웅덩이
쇠소깍 상류 모습이다.
효돈천 상류를 멀리 조망한다.
효돈마을 지명은 '소를 모아 기르는 곳',
'쉐둔' 또는 '쉐돈'에서 비롯된다.
소를 뜻하는 제주어 '쉐'가
한자를 차용하면서 '우둔'이라 불린다.
쇠둔 혹은 우둔이라 불리던 마을 이름이
18세기 후반부터 '효돈(孝敦)'으로 기록되었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이 효돈으로 변경된 것이
이 마을 출신 선비였던 고명학(高鳴鶴)의 효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고명학(高鳴鶴)은
영조 45년(1769)에 우둔마을에서 출생했다.
집은 가난했으나 글 읽기를 좋아해서
영조1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정에서 우승 벼슬을 주었으나
늙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순조14년에도 주어진 장령 벼슬도 사양했고,
다시 대정현감을 제수하였으나
부모의 병환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고명학의 효심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순조22년(1822) 위유어사에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된 조정화는
고명학의 행적을 탐문하고 그의 효심이 소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어사는 그렇게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사는 마을이면
우둔(牛屯)보다는 '효돈(孝敦)'이 좋겠다고 하여
효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효돈이란 '효가 도타운 땅'이란 의미다.
<출처 : https://news.v.daum.net/v/20080903175503933?f=o>
쇠소깍다리 앞이다
올레 6코스 시작점 표지석에서
오늘 여정이자,
이번 제주 올레걷기의 전 여정을 마무리한다.
4시 28분, 쇠소깍다리에서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편을 검색하여
효돈초등학교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서귀포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102번 버스를 탈 예정이었다.
올라 탄 버스가 시외버스터미널 방향이 아니다.
그렇게 꼬인 숙소돌아가는 길이,
세 시간 소요되었다.
7시 반 경 , 숙소에 도착하니
일행 세 분이 동문시장에서 회를 포장해 왔다.
좋은 동행과 술잔을 기울이며
돌아 본 14박 15일, 안타까운 일도 있었지만
일행과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돌아보니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평생 가장 길고 유쾌한 시간 아니었을까?
회억, 따스하고 진한,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간으로
남으리라는 공감을 가득 채운다.
5월 7일 제주도에 도착하여 시작한 여정을
오늘 비로소 마무리한다.
몸은 비록 진작 제주도를 떠났지만
이 시간까지 마음은 구석구석 걸었던 길을 헤매었다.
희미한 기억을 사진으로 떠올리고,
지나온 길을 트랙으로 따라가고,
스쳤던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며 여정을 계속했다.
지인은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보고
언제 제주에서 오느냐고 전화를 걸어온다.
5월 21일 귀가했으니
근 오십 여 일 블로그 작업을 했다.
생활이 있으니 여기 저기 다니고 사람을 만나지만
끝나지 않은 제주도 여정이 늘 마음의 짐이었다.
시기적으로 불편하지만 딸래미가 마련해준
일주일간의 가족 일본 북해도 여행을 내일 출발한다.
늘 철저한 준비보다는
즉흥적으로 떠나는 여정, 이번 일본 여행에서는 자제할 생각이다.
귀국하면 그 동안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어두었던
불현듯 떠오르는 다음 여정을 실행해야겠다.
14박 15일, 오는 날과 가는 날,
폭우가 예보된 하루를 빼고 열 이틀을 걸었다.
그 기록을 연결한 트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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