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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함석헌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1서, 1:1~4)
1.
이것은 사랑의 사도가 그 편지 첫머리에 있어서 자기 전도의 목적을 표명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 말을 대단히 힘들게 한다. 1절에서 3절 상반까지의 말을 보면, 같은 말이 두 번 세 번 반복되고 고쳐 설명되고 하여서 일견에 그 문맥을 찾기 어려울 만큼 되어 있다. 그와 같이 힘들게 하는 것은 그 말을 긴절히 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 하는 말을 가장 인상 깊이 청자(聽者)에게 주고자 할 때에 항상 하는 것같이, 거듭하고 거듭해도 부족하다는 듯이 무거운 조자(謂子)로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한 전구(前句)에 대한 설명어가 되는 후구는 무엇이냐 하면 3절 하반의 극히 간단한 말이다. 즉 “너희도 우리와 함께 사귐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서다”라는 것이다. 이 일어(一語)는 그에게 그렇게 중요했던 것이다. 그는 이 송곳같이 간단한 일어(一語)를 독자의 가슴에 깊이 박기 위하여 천근 되는 마치로 두 번 세 번 다진 것이다.
기독 신앙의 목적은 사귐에 있다고 한다. 간단하고도 깊이 배울 만한 진리다. 세상에 무슨 주의 무슨 교하는 것이 다 주기를 약속하는 것이 많은데 기독교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너와 나 사이에 사귐만을 있게 하자고 한다. 우리 귀에는 약속을 많이 하는 것일수록 좋게 들리나 그런 것 중에 진(眞)것은 별로 없다. 참것은 담담한 가운데 있다. 군자지교 담여수(君子之交 淡如水)라 한다. 기독교는 담담하기 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유행하는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기독교를 될수록 달고 진한 것으로 선전하려 애쓴다. 농촌진흥, 사회개량, 국가융흥, 문명진보, 인격수양, 실로 산함신감(酸醎辛甘)의 각종 맛을 탄 기독교다. 그러나 생명의 샘물을 첫턱에서 마셨던 요한의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삼삼한, 그러나 생명을 소생케 하는 단순한 물이었다. 사귐을 목적하는 종교였다. 기독교의 생명은 그 휘두르는 기치가 찬란한 때에 있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아무것도 보잘것없는 때에 있다.
그러나 기독 신앙의 목적이 단순한 사귐에 있다 할 때 우리는 일편 의아한 생각이 불무(不無)하다. 기독교는 그렇게 값싼 것일까. 바울이 지중해의 거친 물결 위에 표랑한 것은 다만 사귐 때문일까. 리빙스턴이 만인(蠻人)과 맹수의 암흑대륙에 헤매면서 일생을 바친 것은 그저 흑인 친고(親故)를 얻기 위하여서만일까. 북빙양의 저쪽 얼음밖에 없는 그린란드에 에스키모 만인을 상대로 일생을 바친 예게르 부자의 일도 단순한 그것 외에 아무것도 없을까. 그외에 더 크고 넓은 목적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이것은 사귐의 의미를 모르는 데서 나오는 생각이다. 근래 시속의 타락된 우도(友道)로 말하면, 그렇다. 거기서는 물건만 한번 사도 곧 친고가 되고 연회석상에서만 한 번 만나도 곧 벗이 된다. 그런 붕우로 하면, 기독교는 그것을 목적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가르침이다. 그러나 벗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벗이란 우(友)자는 본래 손 둘을 그린 것이다. 즉 손과 손을 마주 잡은 것이 사귐이다. 즉 악수다. 화해다. 사귐이란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의가 없어지고 호의가 성립되는 일이다. 벗이란 호의를 가지고 서로 대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대단히 허수하게 들리나 아니 그렇다. 사람의 호의쯤은 어디나 있는 줄 아나 그렇지 않다. 세상은 왼통 적대관계 속에 있다. 신외개적(身外皆敵)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혼과 혼이 서로 대하는 일은 별로 없고 대개는 다 무장한 자아끼리가 만난다. 무장이라 해서 일본도나 피스톨을 가진다는 것만 아니다. 그보다 더한 무기를 가지고서 한다. 인사니, 체면이니, 말하자면 잔뜩 높은 석성을 쌓고 성첩 위에서 서로 손을 내밀어 잡는 것이 세상의 이른바 교우요, 친분이다. 좋을 때는 좋으나 일단 일이 있을 때는 저쪽을 그 성상(城上)에서 거꾸로 끌어 떨어뜨리자는 심리가 속에는 들어 있는 사귐이다. 이런 것이 사귐은 아니다. 사귐이란 청천백일하에 평화의 대지 위에 서서 하는 악수다. 인격이 동일한 평면 위에 서는 일이다. 동무가 되는 일이다. 이 본문에 사귐이라는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본래는 공유라 동참이라 제휴라 번역할 만한 말이다. 어떤 사물을 같이 가지거나 분담하거나 하는 일 그것을 코이노니아라 한다. 고로 이것은 동무가 되는 것이라고 할 말이다.
사귐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세상에 가장 결핍된 것은 사귐 임을 알 수 있다. 이 사귐 이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요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다. 시기도, 오해도, 음험도, 가장도, 교활도, 민족의 문제도, 계급의 문제도 다 이 코이노니아의 없는 데서 나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동무가 되는 날, 동무의 자격으로 서는 날, 지상에 하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이 있다면 그날이다. 천국은 동무의 나라다. 거기 훈장을 차고 갈수도 없고, 명함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예복을 입고 갈 수도 없다. 모든 사람이 다 동무로 아버지의 무릎하에 설 것이다. 상상하여보라. 그 날이 어떻게 클 것인가. 공자를 참 내 동무로 대하고 예수를 참 내 친고로 대하고 카이사르, 나폴레옹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식인종도 악수하고 대하는 날이.
기독교는 아무것도 달콤한 것을 약속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최대 절대의 것을 약속한다. 세상에 동무의 나라를 가져오는 일. 사해동포라 한다. 억만의 인류가 다 한 아버지의 자녀로 서는 일 그 일에서 더 큰일이 어디 있으며 그 일에서 더 긴급한 일이 어디 있을까. 사람 사이에 호의가 성립 못되고 사람과 사람이 동일평면에서 손을 잡지 못하고, 그리고 정신은 무슨 정신이고, 문명은 무슨 문명이고, 도덕은 무슨 도덕일까.
형제 원망하는 맘을 청산 못하면 모처럼 드리는 제사가 아무 소용이 없다. 이날껏 지사, 의사는 소용없는 제사를 드려오지 않나. 민족의 차별을 두는 정치, 계급의 차별을 두는 경제, 현우(賢愚)의 차별을 두는 도덕, 이런 것이 우리 아버지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나. 기독교는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아니요, 특별한 시간에 눈물을 짜며 예배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버지 보시기에 아무 반가운 것이 아니다. 저가 원하시는 것은 싸우던 것들이 형제가 되어 그 슬하에 모이는 일이다. 세상에 있는 기독교, 우리들의 하고 있는 기독교는, 믿기는 같이 믿고 생활을 제각기 하는 종교다. 예배석에서는 형님 동생이어도 물러나서는 제 문제 제각기 해결하는 타국지간이다. 이것이 기독교일까. 이것이 예수의 전파하신 것일까. 거짓이다. 껍데기다.
잘못은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위 교회의 껍질을 벗자는 무교회라는 자에도 있다. 우리게 신앙의 자유는 있을는지 모른다. 형식에 붙잡히지 않는 정신은 있을는지 모른다. 시비를 판단하는 날카로움은 있을는지 모른다. 성서의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함은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코이노니아가 과연 있는가. 하나님 앞에 나를 바쳤다 하나 과연 완전히 바쳤나. 자아의 성벽을 정말 완전히 헐어버렸나. 어떤 행객도 자유로 들어올 수 있게 내 문은 완전히 개방되었나. 우리는 과연 이웃 사람을 가졌나. 우리는 혹은 방탕하지 않았던 맏아들이나 아닐까.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제2계명은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제1계명과 별물(別物)이 아니다. 이웃사람에게 동무가 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웃에 동무가 되는 것은 말로 되는 것 아니요, 사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교회당이나 연구회 석상에서 되는 것이 아니요, 살림에서 되지 않으면 안된다. 어찌하여 과부의 운명을 된 그 자신만이 멜 의무가 있으며, 문둥병은 들린 그 자신만이 앓고 낫고 할 의무가 있고, 부랑자의 악 명예는 저 자신에게만 돌아가야 하는 것이며, 부채는 그 진 자만이 물어야 할 것인가. 아버지의 집에서 어디 그런 일이 있을까. 나사렛 사람의 위대는 그의 설교에 있었던 것도 아니요 그의 이적기사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만인에, 더구나 세리와 죄인과 음부와 탕자에게 완전히 따뜻하게 개방됐던 그 가슴, 그들의 무거운 짐을 몸소 지는 그 어깨에 있다. 저는 과연 아버지의 맏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형제애를 일으키기 위하여 이 냉랭한 이 음산한 이 살기등등한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기독교는 동무의 종교다.
2.
그러면 그 코이노니아는 어떻게 하여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사람이 어떻게 하면 동무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을 인생의 여러 가지 실지 사실에 비추어서 생각하여보기로 하자.
맨 먼저는 사람은 물건에 의하여 연결이 될 수 있다. 내게 주는 것이 있는 사람이 내게 친한 사람이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사모하는 것은 효도 때문이 아니요 젖을 먹기 때문이다. 기르지 않은 어머니는 사랑을 요구하여도 무용이다. 그리고 어린이에 한한 것 아니라 일반 세인의 교의(交誼)도 대개는 돈으로 된 것이다. 세인결교수황금 황금불다교불심(世人結交須黃金 黃金不多交不深)이라고 옛 사람은 벌써 말했다. 돈 있으면 문전에 차마(車馬)가 분주하고 돈 없으면 영락(零落)하다. 기독교회에도 이런 일은 없지 않다. 부하면 오겠다는 하나님의 종이 많고 가난하면 돌아보는 자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귐은 아니다. 황금으로 사귄 동무는 황금이 진하는 날은 타인이요 적수다. 그는 황금을 사귀던 것이요 사람을 사귀던 것은 아니다. 관중(管仲), 포숙(鲍叔)의 사귐을 칭찬하는 것은 그것이 가난할 때에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담에 사람이 서로 가까와지는 것은 경우가 같은 때다. 처지가 같을 때에 사람은 서로 보드라운 동정의 맘을 쓴다. 그 가장 알기 쉬운 실례는 선객의 경우다. 배를 타고 대양 위에 떠서 운명을 오직 한 개 엔진의 바퀴에 붙일 때 평일에는 얼음 같던 사람에게서도 따뜻한 맘씨가 움직인다. 이것은 동일한 운명에 놓였다는 생각의 소사(所使)다. 혹은 수해, 화재를 당한 때에 전에 없던 선심을 아주 쉽게 쓰게 되는 것도 그것이다. 사람들이 만일 우리 지구도 결국 망망무애한 대해에 떠가는 한 개 배인 줄을 안다면, 그리고 우리는 운명을 한가지로 하는 것인 줄을 알았다면, 세상은 좀더 따뜻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는 생각지 않고 일시 같이했던 경우도 미구에 지나가고 마는 고로 우정도 그것과 같이 사라지고 만다. 고로 처지로써 맺어진 우의도 참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또 우의에 맺어지는 것은 사상이 공통하는 때다. 우리는 사상의 공명자(共鳴者)를 발견할 때 취하는 듯한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이해의 더러운 것이 섞이지 않는 이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는 때가 많다. 청년의 우의는 때로 친척형제 이상에 오르는 것이 있다. 지기가 상통하는 벗으로 더불어, 한등하(寒燈下)에 설화하여 밝히는 하루저녁은 이욕(利愁)에 분망(奔忙)하는 속진 속에서 10년을 지나는 것보다 낫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탄미할 만한 것이 있다 하여도 이것도 참 우의는 아니다. 참 동무는 아니다. 사상으로써 연결됐던 의(誼)는 사상이 쇠(衰)하는 날에 따라 쇠한다. 그리고 사상 중에 마침내 쇠하지 않을 사상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그 일례를 과반의 사회주의자에게서 보았다. 그들은 동지를 불러 타와릿슈 즉 동무라 하였다. 그리하여 동무를 위하여는 수화를 피(避)치 않는 열정이었다.
그러나 어떠한가. 반역자를 가장 미운 것으로 욕하던 그들은 제각기 피차에 반역자 안된 것 없다. 그 원인은 그들의 사상의 조락에 있다. 종교의 교파라는 것도 대개 이런 것이다. 그 열심은 사상에 대한 열심이다. 그리고 사상이 사상만으로 생활에서 유리 되는 한, 노리개와 같이 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여자는 노리개를 위하여 열중하는 것이니 청년이 사상을 위하여 열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에게 아무 실(實)된 것을 가져오는 것이 없다. 나는 당신과 신앙상의 생각이 일치합니다. 나도 아무 선생님의 저서를 좋아합니다. 나도 이 집회에 참여하기를 많이 바랐습니다 이런 따위 정도로는 아직도 아직도 코이노니아는 아니다. 예수는 그런 사람에게 냉연한 태도로 대했다. 그런 것이 ‘천국에 유하관언(有何關焉)이리오’ 기 때문이다. 원래 사상의 공명이란 것은 자영토(自領土)의 확장인 경우가 많다. 기뻐하는 것은 진리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오 내 성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각기 성이 넓어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한 아버지의 집뜰은 주먹질과 피흘림으로 더럽힘을 면할 수 없다.
그런 것이 참 사귐은 아니다. 참 사귐 코이노니아는 우리 인격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서만 가능하다. 본문의 3절 말이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함이다.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공통한 아버지를 가짐으로라야, 공통한 주를 가짐으로라야 가능하다. 일체를 버리고 벌거숭이로 아버지 무릎에 가면 거기 사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변함이 없으시매 아버지로 인하여 된 사귐은 변할 리가 없고 끝날 리가 없다. 세계 항구 평화의 길이 여기 있다. 다른 모든 것으로 하는 교의(交誼)에는 항상 소유주가 되려는 사아(私我)가 깉으나 아버지와 예수를 공유하는 사귐은 사아(私我)가 없어지고야만 된다.
아버지는 소유할 것이 아니요 내가 그리 돌아갈 것이다. 사귐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사유하려는 자아에 있다. 인간사회를 일개 원주라 하고 하나님을 그 중심이라 하면 소유하려는 사아의 성질은 중심에서 떠나려는 원심적 경향이다. 중심에서 갈라져 나온 각 점의 행렬이 원주인데 그 각 점이 중심에서 멀어지면 질수록 그 사이는 성기어지는 것이요, 중심에 향하여 나오면 나올수록 밀(密)하여진다. 원심력이 이기면 인간사회는 망하는 것이요 구심력이 이기면 사람은 아버지의 가슴이란 일점에 다 모여든다. 고로 아들 신앙만이 코이노니아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었고 그의 신앙은 아들 노릇 하는 살림이었다. 천사의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온갖 학문을 다 알고, 산을 옮길 확신이 있고 내 재산을 다 버려 구재사업을 하고 내 몸까지 버릴 열심이 있어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모든 인간을 같은 아버지의 자녀로 사랑하는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예수의 종교는 아니다. 우는 꽹과리같이 아무 실용 없는 것이다.
3.
우리가 코이노니아를 가지는 목적은 무엇인고 4절의 말씀이 그것을 가르친다.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하여다. 기쁨이 충만함! 사람의 바랄 것은 이 이상이 없다.
이 세대의 특색은 기쁨이 없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근심 않는다는 나라는 없고 어느 사람이나 슬픔 고통 없는 사람은 없다. 문명은 날로 진보하고, 생활은 날로 편해가고, 의약은 날로 발달한다는데 기쁨은 점점 더 줄어간다. 돈은 즐겁게 살자는 것이겠는데 돈더미 위에 앉아서는 근심하고 학문은 지혜를 얻자는 것이겠는데 학문을 하고는 고뇌한다. 이 모순의 원인은 무엇일까. 왜 곳간 안에서 굶어죽나. 왜 그 많은 시와 소설과, 그림과, 연극과 활동사진과 공원과 하이킹이 그들을 기쁘게 못하나. 간단한 진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동무가 있어야 기쁜 것이다, 고독은 모든 쾌락을 죽여버린다. 천하를 소유하여도 나 혼자면 즐거움이 없다. 즐거움은 그것을 나눌 사람이 있어야만 즐거운 법이다. 현세인의 기쁨이 없는 것은 고독하기 때문이다. 수백만의 대도시 복판에 있어서도 저들은 고독이다. 신외(身外)는 개적(皆敵)이기 때문이다. 적의 없는 사람이 동무가 많고 동무가 많은 사람이 기쁨이 많다. 아무게도 적의 없는 어린 아기는 그저 종일을 웃어 지내고 소년에서 청년으로, 대적이 생겨갈수록 웃음이 적어진다. 인생의 경쟁장리(競爭場裡)에 광분하는 장년남아는 웃을 시간이 거의 없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나. 인생이 어찌하여 7월 장마의 흐린 날 모양으로 항상 음침하고 무더운 공기 속에만 살 것일까. 참새도 먹을 것을 먹은 다음에는 처마 끝에 노래를 하거든 사람만이 어찌하여 눈물과 한숨으로만 살 것일까. 기쁨을 얻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의 목적은 기쁨의 충만에 있다. 샘물이 넘쳐흐르듯이 기쁨이 우리 주위에 철철 흘러 넘어야 할 것이다. 태평양의 거도(巨濤)같이 억제에는 수 없는 기쁨의 찬송이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밀려나와야 할 것이다. 기독교로서 만일 이것을 이루지 못하면 거짓 종교다.
그것을 위하여 우선 코이노니아를 가져야 한다. 기쁨의 충만을 얻기 위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모여들어야 한다. 아버지의 입김을 맡는 그 무릎하에 모이면 얼굴과 얼굴이 서로 보여서 너도 우리 아버지 아들이요 너도 우리 아버지 딸인데 공연히 내가 내 주인이 될 성싶어 가산을 갈라 달래가지고 거친 들로 나갔던 고로 싸움이 있었던 것이 알려진다. 거기서 음침한 안개 속에서 볼 때 모두 다 나를 미혹하려는 유령 같아도 보이고 나를 잡아먹으려는 맹수같이도 보여서 서로 싸운 것이다.
세계에 다른 데는 몰라도 적어도 조선에 필요한 종교는 코이노니아의 종교다. 오늘날 우리게 긴급한 것은 예배도 아니요 찬양대도 아니요 연구회도 아니다. 부흥사경도 아니다. 형제가 싸움을 하고 원망 하는 마음이 심중에 풀리지 않았는데 예배는 무슨 예배일까. 형제끼리 서로 음해하는 소리에 아버지의 눈이 눈물로 흐렸는데 찬양은 무슨 찬양일까. 동생은 가두에 방황하는데 연구, 사경은 무엇일까. 우리의 집 안이란 수천년래 왼통 웃어보지 못한 집안이요 유쾌하게 담화 하루저녁 못해본 집안이 아닌가. 우리는 이 거칠어진 동산을 다스리는 것이 일이다. 이 케케묵은 먼지를 쓸어내야겠고 이 찢어진 창문을 다 다시 바르고 이 냉랭한 온돌에 불을 다시 넣고 이 구석 저 구석에 혹 울고 앉았고 혹 웅크리고 섰고 혹 넘어져 있는 것을 다 오라 해서, 그 꼴 안 보신다 나가신 아버지를 모셔 들여야 할 것 아닌가. 종교는 모방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를 살리는 우리 신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조선을 과연 개조했을까. 이 시커먼 피가 응결된 지 천년이나 되는 혈관에 과연 온기가 돌아 죽었던 맥이 다시 놀게 하였나. 이 시들고 마른 얼굴에 기쁨의 웃음을 가져왔나. 이 다 끊어진 심금의 줄을 이어 가늘게나마도 맑은 소리가 나게 했나. 무교회주의는 과연 이 큰 길가에 앉은 노창녀의 어깨 위에 따뜻한 동생의 위로하는 손을 얹었나. 믿기는 같이 믿고 살림살이는 제각기 하는 믿음으로는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 전도가 묵은 밭을 같이 갈아주고 막힌 하수도를 같이 쳐주는 것인 담에 이것은 할 수 있다. 그 실력이 지금 없다. 있게 하여주시기 위하여 빌어야 할 것이다.
성서조선 1940.3 134호
저작집30;18-299
전집20;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