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톱이라고? / 조미숙
꽃 농원에 갔다. 알록달록 즐비한 꽃만큼이나 사람들로 붐볐다. 올해 벌써 네 번 정도 다녀왔다. 올 때 마다 꼭 작은 나무나 화초를 몇 개씩 샀다. 오늘도 역시나 파키라와 미니 장미를 사 왔다. 몸은 피곤했으나 빈 화분에 옮겨 심는데 기분은 상쾌했다. 요즘 긴기아난에서 품어져 나오는 향기가 달콤하게 코를 찔러 아찔하다. 몇 해 전 선물로 받았는데 분갈이를 잘못했는지 꽃이 피지 않았다. 올해는 관심을 보이고 물을 자주 줬더니 어느새 꽃대가 올라와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고 있다. 작은 화분에서 몸살을 하고 있는 것 같아 큰 화분으로 옮겨주고 이것저것 정리를 했다. 꽉 찬 베란다가 한결 싱그럽다. 잠시 내 인생이 봄을 맞는 것 같다.
<집사부일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 뇌 과학자인 정재승이 출연했다. 한 달에 30여권을 읽는다는 그의 서재는 2만여 권의 책으로 둘러 싸여 있다. 1만 2천 권 정도 기부했고 한 달 책값이 100만 원 이상이라고 한다. 거실 천장이 개방되어 있고 그 2층을 빙 둘러 책이 꽂혀 있는데 우리의 두뇌를 본 떠 왼쪽은 논리 영역, 오른쪽은 예술 영역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대표 책은 표지가 보이게끔 전시해서 관련 도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책을 모으는 가장 큰 이유는 읽기 때문이고 그것이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은 한 사람의 온 인생을 담은 것이라서 우리는 읽기만 하면 그것을 얻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출연진들의 엠알아이(MRI)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도 흥미로웠다. 뇌 사진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격과 직업 등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는 다소 황당하지만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한 사람씩 뇌 사진을 설명해 주는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같은 종끼리 비교해서 뇌가 크면 그만큼 똑똑하다는 것도 맞는 말이며 뇌 주름이 많이 잡혀 있으면 뇌를 많이 사용했다는 증거여서 어느 쪽의 뇌를 주로 사용했는지에 따라 성격이나 직업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티브이에서 보이는 출연자의 성격에 맞게 그 사람의 뇌 사진도 정재승 박사의 설명과 맞아떨어졌다. 갑자기 내 뇌도 들여다보고 싶었다.
카이스트 대학에 입학하면서 세 가지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첫째는 도서관의 책을 다 읽는 것이었는데 결론은 다 읽지 못했지만 졸업 당시에 가장 많이 대출한 사람이 되었다. 두 번째는 진하게 사랑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배운 것을 나누는 것이었다고 한다. 대학 때 만난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고 지금은 집필과 강의로 배운 것을 베풀고 있으니 계획한 것은 다 이루고 사는 것 같아 몹시 부러웠다. 정재승 박사의 뇌는 어떻게 생겼을까? 천재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1879~1955)도 10% 정도 밖에 사용하지 않았다는데 범인인 난 얼마나 썼을까?
난 어쩔 수 없는 가정환경이었기에 상고라도 감지덕지하며 갈 수 밖에 없었다. 상고생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주산, 부기, 타자 자격증을 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공부 잘하면 은행에, 그 외 대부분은 경리 사원으로 취직하던 때였는데 난 그런 게 그냥 너무 싫었다. 인문계 학교에 못간 것만 아쉬워했다. 그렇게 3년을 허송세월하고 판매직으로 취직했는데 그래도 대학에는 가고 싶었다. 내 처지가 대학만 졸업하면 바뀔 것 같아 입시 학원에 등록했다. 저녁에 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면 진도 따라가기도 버겁고 피곤하기만 해 몇 개월 만에 포기했다. 찬란한 20대를 회사와 집만 오가며 지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나마 대학 진학의 꿈을 놓지 않아서 늦은 나이에 방송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그래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나를 대학에 못 보낸 것을 두고두고 한으로 여긴 엄마에게 졸업장을 선사했다.
결혼 적령기(그때는 27세 정도)를 지나니 이미 노처녀 딱지는 붙었고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있었다. 몇 년 동안은 일본어에 빠져 퇴근 후에는 학원에서 살다시피 해 일본어능력시험 1급까지 땄다. 그 급수면 일본 유학이 가능하다고 했다. 물론 유창하게 말을 하지는 못하고 겨우 책이나 읽는 수준이지만 그동안 배운 것도 있고 하니 유학을 갈까 했는데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 어려서는 공무원은 지질한 것 같아 생각지도 않았는데 세월이 흘러 마음이 바뀌어 도전하려니 이미 나이 제한에 걸려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시기에 남편을 만나 급하게 결혼했다. 나이 서른이 넘었어도 사랑이 밥 먹여 주는 줄 알았다.
아이 셋 줄줄이 낳아 기르다 보니 어느새 중년이 훌쩍 넘었다. 친구들은 자식 시집 장가 보낼 시기에 난 아직 뒷바라지 할 아이들이 있다. 내 부모님의 희생처럼 큰사랑으로 키우지 못했다. 가끔 아이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고 심지어 때리기도 했다. 무식한 데다 게으르기까지 해서 상처를 주는 일이 많았고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했다. 지혜롭지 못한 엄마 밑이긴 하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잘 자랐다.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으로 한몫을 하는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가야 할 길은 먼데 해가 저무는 예전의 반복되었던 꿈처럼 나이 먹는 게 두렵다. 어리석고 부실한 게 너무나 많은 삶이 내 뇌에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여기 저기 고장 난 몸에 기억력까지 떨어지니 치매에 걸릴까 봐 또 두렵다. 책을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고 매학기 글을 써도 좀처럼 늘지 않는다. 사고의 전환이 쉽지 않다.
작년에 만성 두통에 시달리다 못해 뇌 엠알아이를 찍었다. 의사가 하는 말이 나이에 비해 신경이 많이 죽어 있단다. 뇌 사진에 하얗게 보이는 곳이 신경이 죽은 흔적이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라는 내 질문에 의사는 “고스톱이라도 열심히 치세요.” 한다. 난 고스톱은 못 치는데 어쩌지?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선생님.
하하! 의사 선생님 처방이 재미있네요. 글쓰기 반에서 열심히 글 쓰면 치유되지 않을까요?
고스톱 보다 더 좋은 글쓰기를 하시잖아요. 코로나 19 조금 더 나아지면 목포에 사시는 분들 한번 만나시죠.
하하. 저는 고스톱은 칠 줄 알지만 즐기지는 않는 데다 매번 잃기만 하니 어쩌지요?
의사의 처방에 빵 터졌습니다.
알면 알수록 신비한 뇌과학이네요.
저는 프로그램을 보지 않았지만 글을 읽으니 찾아 보고 싶어집니다.
그만큼 글을 잘 쓰셨다는 이야기겠지요?
선생님 글 잘 쓰시는데 걱정 말아요. 남아있는 신경들이 두세 배 몫을 할 거여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