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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Athanasius of Serpukhov the Elder (+ 1401) and Saint Athanasius the Younger (+ 1395)
세르푸호프의 성 아타나시우스 (+ 1401년)와 성 아타나시우스 대제(+ 1395년)
Sts. Athanasius the Elder and Athanasius the Younger (Feast Day - September 12) 성 아타나시우스 대(大)와 아타나시우스 대(小) (축일 - 9월 12일) |
Saint Athanasius of Serpukhov was born at Obonezh Pyatina with the name Andrew into the family of the priest Auxentius and his wife Maria. He was, from youth, inclined towards prayer and renunciation of the world, and he sought a worthy guide in monastic labors.
성인 세르푸코프의 아타나시우스는 오보네즈 퍄티나에서 안드레라는 이름으로 사제 오센티우스와 그의 아내 마리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기도와 세상 포기를 지향하였고, 수도원 활동에서 가치 있는 안내자를 찾았다.
At this time, news of Saint Sergius of Radonezh had already spread throughout the whole of Rus. The Monastery of the Life-Creating Trinity at Makovets had become for everyone a luminous model of monastic organization. Here in the monastery, the cenobitic life transformed “the hateful discord of this world,” creating a oneness of spirit in a unity of love based on the example of the Divine Trinity. The youth Andrew went from the outskirts of Novgorod to Abba Sergius at Makovets, following in his footsteps in search of spiritual perfection.
이때 라도네즈의 성 세르기우스에 대한 소식은 이미 루스 전역에 퍼져 있었다. 마코베츠에 있는 생명을 창조하는 삼위일체 수도원은 모든 사람에게 수도원 조직의 빛나는 모델이 되었다. 이곳 수도원에서 세노비즘 생활은 "이 세상의 증오로 가득 찬 불화"를 변화시켰고, 신성한 삼위일체의 모범에 기초한 사랑의 일치 안에서 정신의 하나됨을 창조했다. 젊은 시절 안드레는 노브고로드 외곽에서 마코베츠에 있는 아바 세르기우스에게로 갔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영적 완전성을 추구했다.
At tonsure he was named Athanasius, in honor of Saint Athanasius the Great. Saint Athanasius in turn became a worthy disciple of the great Sergius, the father and teacher of Russian monasticism.
그는 성 아타나시우스 대왕을 기리기 위해 아타나시우스라고 명명되었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러시아 수도원의 아버지이자 교사인 위대한 세르기우스의 합당한 제자가 되었다.
The disciples of Saint Sergius, in addition to the usual monastic obediences, received the holy abba’s blessing for special church services: copying books, painting icons, building churches. This added a genuine ecclesiastical quality to life, imparting ecclesiastical beauty and hymnology, a liturgical transfiguration of God’s world.
성 세르지오의 제자들은 일반적인 수도원 순명 외에도 책 복사, 아이콘 그리기, 교회 건축과 같은 특별한 교회 예배에 대한 거룩한 아바의 축복을 받았다. 이것은 삶에 진정한 교회적 특성을 더하고, 교회의 아름다움과 찬미가(變讇家)를 부여하며, 하느님의 세계에 대한 전례적 변형을 가능하게 했다.
The favorite obedience of Abba Athanasius, which he imposed upon himself, was copying books. The holy books were regarded by the fathers as on the same level as the holy icons, the most important way to impart ecclesiastical ideas, those of theological and liturgical creativity.
아바 아타나시우스(Abba Athanasius)가 자신에게 강요했던 가장 좋아하는 복종은 책을 베끼는 것이었다. 교부들은 거룩한 책들을 성화(聖聖)와 같은 수준으로 여겼으며, 교회의 사상, 신학적, 전례적 창의성의 사상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여겼다.
The school of Saint Sergius, revealing to the Russian and to the Universal Church the whole extent of theological experiential knowledge of the Holy Trinity, is closely connected with the flourishing of ecclesiastical literature, with the necessity of interactive enrichment of the Russian Church by the literary works of the Byzantine Church and its theologians, and by the deep spiritual experience of the Russian ascetics.
성 세르지오 학파는 성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체험적 지식의 전모를 러시아인과 보편 교회에 드러내며, 교회 문학의 번영, 비잔틴 교회와 그 신학자들의 문학 작품에 의한 러시아 교회의 상호 작용적 풍요로움의 필요성, 그리고 러시아 금욕주의자들의 깊은 영적 체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In the year 1374, the Serpukhov prince Vladimir Andreevich the Brave, a colleague of Demetrius of the Don, turned to Saint Sergius with a request to found a monastery on his lands. Abba Sergius came to Serpukhov with his beloved disciple Athanasius, and having established the monastery of the Conception of the Most Holy Theotokos, he blessed Saint Athanasius to organize it, and then to be its abbot.
1374년, 세르푸호프 왕자 블라디미르 안드레예비치(Vladimir Andreevich the Brave)는 돈의 데메트리우스(Demetrius of the Don)의 동료로, 성 세르기우스(Saint Sergius)에게 그의 땅에 수도원을 설립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바 세르기우스 (Abba Sergius)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와 함께 세르푸 호프 (Serpukhov)에 와서 가장 거룩한 테오토 코스 (Theotokos)의 개념 수도원을 설립 한 후, 성 아타나시우스 (Saint Athanasius)를 축복하여 그것을 조직하고 수도원장이되었다.
The monastery of Saint Athanasius was built near the city of Serpukhov, on the high bank of the River Nara. They therefore called it “Vysotsky” [“of the heights”]. Hence also its title, with which entered into Russian Church history its founder and first abbot, Saint Athanasius of Vysotsky.
성 아타나시우스 수도원은 나라 강 (Nara River)의 높은 은행에있는 세르 푸 호프 (Serpukhov)시 근처에 세워졌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을 "비소츠키"("높은 곳의")라고 불렀다. 따라서 러시아 교회 역사에 창시자이자 첫 번째 대 수도 원장 인 Vysotsky의 Saint Athanasius에 들어간 제목이기도하다.
Abba Athanasius zealously set about the organization of the monastery entrusted to him. Many Russian ascetics arrived here, “on the heights,” for a heightened schooling in monasticism.
아바 아타나시우스(Aba Athanasius)는 자신에게 맡겨진 수도원 조직에 열정적으로 착수했다. 많은 러시아 금욕주의자들이 수도원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높은 곳"에 이곳에 도착했다.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Abba Athanasius, preserved for us by Epiphanius the Wise, to be a monk was no easy thing. “The duty of the monk consists in this, that he be vigilant in prayer and in divine precepts until midnight, and sometimes for the whole night. He should eat nothing but bread and water, oil even and wine would be altogether improper.” Through the words of the Saint of God, many came to him at the monastery on the heights, “but then they slackened, and, unable to endure the work of ascetic struggle, they fled.”
현자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the Wise)가 우리를 위해 보존한 아바 아타나시우스(Abba Athanasius)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도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도승의 의무는 자정까지, 때로는 밤새도록 기도와 신성한 계율에 깨어 있는 것이다. 그는 빵과 물, 심지어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 하며, 포도주는 전혀 부적절할 것이다." 하느님의 성인의 말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고지대에 있는 수도원에서 그분께 나아왔지만, "그들은 게으르해졌고, 금욕적인 투쟁의 일을 견디지 못해 도망쳤다."
Those ascetics of higher monastic worth remained with the holy abba. Therefore, it was to this monastery, to his disciple and fellow-ascetic Athanasius, that the God-bearing Abba Sergius of Radonezh sent his future successor, Saint Nikon (Nov. 17) for tonsure and guidance in monastic endeavors. Saint Athanasius taught him: “Monks are called voluntary martyrs. Many holy martyrs suffered for a single hour and then died, but each day monks endure sufferings not from torturers, but from within, from the properties of the flesh and from noetic enemies. There are struggles, and they suffer until their last breath.”
더 높은 수도원적 가치를 지닌 금욕주의자들은 거룩한 아바(abba)와 함께 남았다. 그러므로, 라도네즈의 아바 세르기우스(Abba Sergius)는 그의 제자이자 동료 금욕주의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게 신을 품은 라도네즈(Radonezh)의 아바 세르기우스(Abba Sergius)가 그의 장래의 후계자인 성 니콘(Saint Nikon, 11월 17일)을 수도원 노력에 대한 격려와 지도를 위해 보냈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그에게 "수도승들은 자발적인 순교자라고 불린다. 많은 거룩한 순교자들이 단 한 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고 죽었지만, 수도사들은 매일 고문하는 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육체의 속성과 노골적인 적들로부터 고통을 견뎌낸다. 몸부림이 있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고통을 겪는다."
Vysotsky Monastery 비소츠키 수도원 |
In 1478, after the death of Saint Alexis, Metropolitan of Moscow, the new Metropolitan, Saint Cyprian (Sept. 16) arrived in Moscow. But Great Prince Demetrius of the Don wanted to establish his own priest and colleague Michael [Mitaya] as metropolitan, and he would not accept Metropolitan Cyprian. Instead, he expelled him from Moscow.
1478년, 모스크바 대주교 성 알렉시스가 사망한 후, 새로운 대주교인 성 키프리아누스(9월 16일)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러나 돈의 대공 데메트리우스는 자신의 사제이자 동료인 미카엘 [미타야]을 대주교로 세우기를 원했고, 그는 키프리아누스 대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를 모스크바에서 추방했다.
Saint Cyprian was in a difficult position. But he found support and sympathy among the pillars of Russian monasticism, Saints Sergius of Radonezh and Athanasius of Vysotsky. From the very beginning, they saw the canonical legitimacy of the Metropolitan in his dispute with the Great Prince and they supported him in the prolonged struggle (1478-1490) for the restoration of canonical order and unity in the Russian Church. Saint Cyprian had to journey several times during these years to Constantinople to participate in synodal deliberations concerning the governace of the Russian Church. On one of these journeys, with the blessing of holy Abba Sergius, Saint Athanasius of Vysotsky went to Constantinople with his friend the Metropolitan, leaving his own disciple, Saint Athanasius the Younger as the abbot of the Vysotsky Monastery.
St. Athanasius the Younger 성 아타나시우스 1세 |
At Constantinople Saint Athanasius settled into the Monastery of the Holy Forerunner and Baptist John (known as Studion), where he found a cell for himself and for several disciples who had come with him. Saint Athanasius occupied himself with prayer and salvific theological books. The monk spent about twenty years in the Queen City, working to translate books from the Greek language and copying Church books, which he then sent off to Rus. Thereby, he transmitted to the Russian Church not only a legacy of great Orthodox thought, but also the traditions of Constantinople’s masters of manuscript illumination, with their elegant penmanship and artistry of textual miniatures, achieving a harmony of content and form. A continuing creative connection was established between Saint Athanasius’s skillful copying of books at Constantinople and the calligraphic and iconographic school of the Vysotsky Monastery at Serpukhov.
콘스탄티노플에서 성 아타나시우스는 성스러운 선구자이자 세례자 요한 수도원(Studion으로 알려짐)에 정착하여 자신과 그와 함께 온 여러 제자들을 위한 감방을 찾았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기도와 구원 신학 서적에 몰두했다. 이 수도사는 퀸 시티에서 약 20년을 보내며 그리스어로 된 책을 번역하고 교회 서적을 복사하는 일을 한 다음 루스로 보냈다. 그리하여 그는 위대한 정교회 사상의 유산뿐만 아니라 우아한 글씨체와 텍스트 세밀화의 예술성으로 콘스탄티노플의 필사본 조명의 대가들의 전통을 러시아 교회에 전달했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이룹니다. 성 아타나시우스(Saint Athanasius)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능숙하게 책을 베끼는 것과 세르푸호프(Serpukhov)에 있는 비소츠키 수도원(Vysotsky Monastery)의 서예 및 도상학 학교 사이에는 지속적인 창조적 연결이 형성되었다.
It was not by chance that it was especially at the Vysotsky Monastery that the holy abbot Nikon guided the future iconographer Saint Andrew Rublev (July 4), as once previously the God-bearing Abba Sergius had guided Nikon himself in this monastery to spiritual maturity and an understanding of the rejuvenating and transformative spirit of pure ecclesiastical beauty.
성스러운 수도원장 니콘이 미래의 도상학자인 성 안드레아 루블레프(7월 4일)를 인도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는데, 이는 이전에 하느님을 잉한 아바 세르기우스가 이 수도원에서 니콘을 영적 성숙과 순수한 교회의 아름다움의 젊어지고 변혁적인 정신에 대한 이해로 인도했던 것처럼.
In this sacred service of ecclesiastical beauty, in constant liturgical activity for the glory of the Life-Originating Trinity, the life-bearing genius of Saint Andrew matured. God destined him for the great visual rendering of the theological and liturgical legacy of Saint Sergius, with the immortal wonderworking icon of the Most Holy Trinity for the iconostasis of the Trinity Cathedral. In the iconographic creativity of Saint Andrew Rublev, just as in the temple-building activity of Saint Nikon, and in the hagiographic works of Epiphanius the Wise, we find embodiment and synthesis of the finest traditions of Byzantine and Russian art.
교회의 아름다움을 지닌 이 거룩한 봉사 안에서, 생명의 근원이 되신 삼위일체의 영광을 위한 끊임없는 전례 활동 안에서, 성 안드레아의 생명을 지닌 천재성은 성숙해졌다. 하느님께서는 성녀 세르지오의 신학적, 전례적 유산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하고, 삼위일체 대성당의 성화를 위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불멸의 기적을 일으키는 이콘을 창조하셨다. 성 앤드류 루블레프(Saint Andrew Rublev)의 도상학적 창의성에서, 성 니콘(Saint Nikon)의 신전 건축 활동과 현자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the Wise)의 해학(hagiographic)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비잔틴과 러시아 예술의 가장 훌륭한 전통의 구현과 종합을 발견한다.
This creative synthesis was served also by Saint Athanasius of Vysotsky all his life. Living at Constantinople, he continued to work for the Russian Church, and for his native land. To give but one example, he sent to the Vysotsky Monastery ten icons of the finest Greek style. He and his disciples translated into the Slavonic language the Four Hundred Chapters of Saint Maximus the Confessor, the Chapters of Mark about church services, and the Discourses of Saint Symeon the New Theologian.
이 창조적 종합은 비소츠키의 성 아타나시우스(Saint Athanasius)에 의해서도 일생 동안 봉사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살면서 그는 러시아 교회와 고국을 위해 계속 일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그는 비소츠키 수도원에 가장 훌륭한 그리스 스타일의 이콘 10개를 보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고백자 성 막시무스의 400장, 교회 예배에 관한 마가복음, 새 신학자 성 시메온 의 강연을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Tomb of St. Athanasius the Elder 성 아타나시우스 대제의 무덤 |
In the year 1401, just before his death, the venerable elder copied, and possibly translated himself, a Church Rule, distributed within the Russian Church under the title, “The Eye of the Church.”
1401년, 그가 죽기 직전에 그 존경받는 장로는 "교회의 눈"이라는 제목으로 러시아 교회 내에 배포된 교회 규칙을 복사하여 아마도 직접 번역했을 것이다.
Saint Athanasius spent his life in constant work with books. He died at Constantinople in old age in the year 1401 (or perhaps a bit later). Russian chroniclers note him as an elder “virtuous, learned, knowing the Holy Scriptures”, to which “at present his writings give witness.” His Life was written in the year 1697 by the hieromonk Karion [Istomin] of the Moscow Chudov Monastery.
성 아타나시우스는 책과 관련된 끊임없는 작업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1401년(또는 그보다 조금 더 늦게)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러시아 연대기 편찬자들은 그를 "유덕하고 학식 있고 성경을 아는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 그의 기록이 그 점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생애는 1697년 모스크바 추도프 수도원의 고위 수도사 카리온[이스토민]에 의해 쓰여졌다.
Tomb of St. Athanasius the Younger 성 아타나시우스 영거(St. Athanasius the Younger)의 무덤 |
Saint Athanasius’s successor and disciple, Saint Athanasius the Younger, successfully directed the spiritual life of the brethren and gave an example by his own God-pleasing life. Saint Athanasius the Younger reposed after a long illness on September 12, 1395. In the ancient manuscripts of the saints it says of him: “Saint Athanasius, abbot of Vysotsky Conception Monastery at Serpukhov, a new wonderworker who reposed in the year 6904 (1395) on the twelfth day of September, a disciple of Saint Athanasius, wondrous disciple of Saint Sergius, who later was at Constantinople and reposed there.”
성 아타나시우스의 후계자이자 제자인 성 아타나시우스 대제는 형제들의 영성 생활을 성공적으로 지도하고 자신의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모범을 보였다. 성 아타나시우스 1세는 1395년 9월 12일 오랜 투병 끝에 선종했다. 성인들의 고대 사본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성 아타나시우스, 세르푸 호프 (Serpukhov)의 비소츠키 개념 수도원 (Vysotsky Conception Monastery)의 대 수도원장, 6904 년 (1395) 년 9 월 12 일에 자리 잡은 새로운 기적의 일꾼, 성 아타나시우스의 제자, 성 세르기우스의 놀라운 제자, 나중에 콘스탄티노플에 있었고 그곳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