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축산의 육이당(와)기
巖棲先生文集卷20
六怡窩記
退陶先生有同母兄五人。而先生爲之季。伯氏早卒。仲氏大憲公熸於黨禍。惟察訪公與之老白首焉。先生甞曰吾有一兄而未能盡爲弟之道。此雖先生自道之辭。而其有天倫之至傷可知也。夫以先生盡性之德因心之行。而天又畀之以曠古難得之氣類。而終不得全其旣具之樂。此聖人所謂不能。而天地之所以有憾也。禮州有故處士李公中立。先生第二兄訓導公之十二世孫。而孝友齋諱華永之子也。承襲家庭。早知力學事親。有絶人之行。及先公沒而公之年未弱冠矣。有同母弟五人而公爲之長。五人者皆煢然幼也。公撫之甚恩。同卓而息。聯被而寢。隨才施敎。各有業就。其尤有姿志者。爲之縱學而資遣之。不使家累亂其心。於是名其所居之室曰六怡窩。嗚乎。公之所得於天畀之氣類。適與先生相似。而其能盡其爲兄之道。視先生爲無憾者何哉。昔李令伯使於吳。吳人多欲爲人弟。而令伯獨願爲人兄。爲其奉養之日長也。然則先生所以有憾者。以其爲弟之短。而公之所以無憾者。以其爲兄之長也歟。夫以公之所處。如此其難且幸也。而乃不得其年。遂與其可以長者而奪之。終亦不能竟其志而全其樂焉。此則雖欲不憾於天地。不可得也。公有二子。而嗣子炳國。潔行而好文。方知名士友間。公之長其在此矣夫。炳國君遠馳書于予。介南君養叔而求記其窩。予聞而嘉之。爲書其所感如此。至於公敦行力學之實。已有能言者發之。茲不詳著云。
六怡窩記 육이와기
퇴계(退溪) 선생에게는 같은 어머니에서 난 형제가 다섯 사람 있었는데, 그 중 선생이 막내이다. 백형은 일찍 세상을 마치고, 중형 대사헌공은 당화(黨禍)에 돌아가시고, 오직 찰방공(察訪公)만 선생과 함께 늙어 백발이 될 때까지 살았다. 선생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한 분의 형님이 계시는데 능히 아우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고 하셨으니, 이는 비록 선생이 스스로 하신 말씀이지만 그 말씀에는 천륜에 바탕한 지극한 상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타고난 본성을 극진히 하는 덕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우애의 행실에다 하늘이 또 고금에 얻기 어려운 기류(氣類)를 선생에게 부여하였건만, 끝내 이미 갖춘 즐거움을 온전히 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성인이 이른바 능하지 못한 것이고 천지에 한스러운 마음이 있는 까닭이다.
예주(禮州)에 고(故) 처사 이중립(李中立) 공이 있었는데, 퇴계 선생의 둘째 형 훈도공(訓導公)의 12세손이고 효우재(孝友齋) 휘 화영(華永)의 아들이다. 공은 가정의 서업(緖業)을 계승하여 일찍부터 학문에 힘쓸 것을 알았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 남이 미치지 못할 효행이 있었다. 선친이 돌아가셨을 때 공의 연령이 아직 약관(弱冠)이 되지 않았고, 같은 어머니에서 난 아우가 다섯 사람 있었는데, 공이 맏이이고 다섯 아우는 모두 외로운 처지에다 나이가 어렸다. 공은 아우들을 보살피기를 매우 은혜롭게 하여, 밥상을 함께하여 먹고 이불을 함께 덮고 자며 재능에 따라 가르쳐 각기 본업이 성취됨이 있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자질과 뜻이 있는 아우에게는 마음대로 배우도록 하여 학자금을 주어 보내 집안일로 그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다. 이에 기거하는 집을 ‘육이와(六怡窩)’라고 명명하였다.
아, 공이 하늘에서 부여한 기류(氣類)를 얻은 것이 마침 퇴계 선생과 서로 비슷하나, 능히 형으로서의 도리를 다한 점에 있어서는 퇴계 선생과 비교하여 한스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옛날에 이영백(李令伯)이 오(吳)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오나라 사람들이 형제 가운데 아우가 되고자 했던 이가 많았으나, 영백이 유독 형이 되기를 원했던 것은 조모를 봉양할 날이 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퇴계 선생이 한스러운 마음이 있었던 까닭은 아우가 된 날이 짧았기 때문이고, 공이 한스러운 마음이 없었던 까닭은 형이 된 날이 길기〔長〕 때문이리라.
공이 처한 형편이 이처럼 어렵고 또 다행스러웠는데, 그 천수를 얻지 못하여 마침내 ‘공이 길게〔長〕 할 수 있는 것’을 하늘이 빼앗아 가고야 말았으니, 끝내 그 뜻을 다하고 그 즐거움을 온전히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비록 천지에 한스러운 마음을 품지 않으려 해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공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장남 병국(炳國)은 행실을 깨끗하게 하고 문학을 좋아하여 지금 사우(士友)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 공의 긴 것〔長〕이 아마 여기에 있으리라.
병국(炳國) 군이 멀리 나에게 편지를 보내 남양숙(南養叔) 군을 통하여 육이와에 기문을 지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내가 듣고 아름답게 여겨 느낀 것을 적기를 위와 같이 하였다. 공이 행실에 돈독하고 학문에 힘썼던 실상에 대해서는 이미 말에 능한 사람이 밝힌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상세히 드러내지 않는다.
[주-D001] 퇴계(退溪) …… 있었는데 : 퇴계의 부친 이식(李埴, 1463~1502)의 부인은 초취(初娶) 의성 김씨(義城金氏)와 재취(再娶) 춘천 박씨(春川朴氏)이다. 김씨는 2남 1녀를 낳았고, 박씨는 5남을 낳았다. 김씨에게서 난 아들은 잠(潛)ㆍ하(河)이고, 박씨에게서 난 아들은 서린(瑞麟)ㆍ의(漪)ㆍ해(瀣)ㆍ징(澄) 그리고 퇴계이다. 《退溪集 卷46 先妣贈貞夫人朴氏墓碣識》[주-D002] 백형은 …… 마치고 : 퇴계의 부친 이식(李埴)의 재취(再娶) 부인 춘천 박씨(春川朴氏)에게서 처음 태어난 이서린(李瑞麟)을 말한다. 이서린은 관례(冠禮)를 하기도 전에 일찍 세상을 마쳤다. 《退溪集 卷46 先妣贈貞夫人朴氏墓碣識》[주-D003] 중형 …… 돌아가시고 : 이해(李瀣, 1496~1550)의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인데, 인종조에 대사헌으로 재임하던 중 이기(李芑, 1476~1552)가 재상이 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논했다가 뒤에 다른 일로 그에게 모함을 받아 고문을 받고 갑산(甲山)으로 귀양을 가던 도중 양주(楊州)에서 죽었다.[주-D004] 찰방공(察訪公) : 제원 찰방(濟原察訪) 이징(李澄, 1498~1582)을 말한다. 이징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이휘령(李彙寧, 1788~1861)의 《고계집(古溪集)》 권6 〈숙조 찰방공 묘갈명(叔祖察訪公墓碣銘)〉에 보인다.[주-D005] 성인이 …… 까닭이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공자가 군자의 도는 넓고도〔費〕 은미함〔隱〕을 말하면서 “부부의 불초함으로도 행할 수 있으나,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능하지 못한 것이 있으며 천지의 큰 것에도 사람이 오히려 한스러운 마음이 있다.〔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 亦有所不能焉,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라고 한 말이 있다.[주-D006] 예주(禮州) : 현재의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의 고려 시대 지명이다.[주-D007] 이중립(李中立) : 1860~1892. 자는 시중(時仲), 호는 육이당(六怡堂)이다. 자세한 행적은 송준필(宋浚弼, 1869~1943)의 《공산선생문집(恭山先生文集)》 권16 〈육이당 이공 묘지명(六怡堂李公墓誌銘)〉에 보인다.[주-D008] 훈도공(訓導公) : 퇴계의 부친 이식(李埴, 1463~1502)의 초취(初娶) 부인 의성 김씨(義城金氏)에게서 난 두 아들 가운데 둘째 이하(李河, 1482~1544)를 말한다. 자는 청지(淸之)이다. 관직은 예천 훈도(醴泉訓導)를 역임하였다.[주-D009] 효우재(孝友齋) : 이화영(李華永, 1843~1876)의 호이다. 자는 순약(舜若)이다.[주-D010] 먹고 : 《암서집》 원문의 ‘식(息)’을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의 이본(異本) 문집 《심재집(深齋集)》 권18의 〈육이와 기〉를 근거로 ‘식(食)’으로 교감하여 번역하였다.[주-D011] 육이와(六怡窩) : 이중립(李中立)의 아들 이병국(李炳國, 1882~1952)이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상원리에 ‘ㅁ’자형 주택을 짓고 당호를 육이당(六怡堂)이라고 하였다. 육이당 뒤쪽으로 영모당(永慕堂)이라 불리는 건물이 있으며, 효우재(孝友齋)라는 현판이 건물 내부에 있다.[주-D012] 이영백(李令伯) : 삼국 시대 촉(蜀)나라 사람 이밀(李密)을 말한다. 영백(令伯)은 그의 자(字)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개가하여 조모 유씨(劉氏)에게 양육되었는데, 조모를 섬기는 효성이 알려져 고을 수령의 천거로 상서랑(尚書郎) 대장군주부(大將軍主簿)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었다. 촉나라가 망한 후 진(晉)나라 황제가 관직으로 부르자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조모를 봉양하는 일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三國志 卷45 蜀書15 鄧張宗楊傳》[주-D013] 옛날에 …… 때문이었다. : 이밀(李密)이 오(吳)나라에 사신을 갔는데, 오나라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도의를 논하면서 “차라리 아우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이밀이 “형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오나라 임금이 “어찌 형이 되려고 하는가?” 하자, 이밀이 “형이 되면 조모를 봉양할 날이 길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니, 오나라 임금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밀을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三國志 卷45 蜀書15 鄧張宗楊傳》[주-D014] 병국(炳國) : 이병국(李炳國). 자는 세경(世卿), 호는 경산(敬山)이다.[주-D015] 남양숙(南養叔) : 남호량(南浩良, 1876~1942)을 말한다. 자는 양숙(養叔), 호는 해봉(海峰),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元邱)에서 살았다. 이병국(李炳國)의 처남이다.[주-D016] 공이 …… 것 : 이중립(李中立)의 행적에 대해서는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1869~1943)이 지은 묘지명 뿐 아니라 족숙 유천(柳川) 이만규(李晩煃, 1845~1920)가 지은 묘갈명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