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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설명
백운정(白雲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이 그의 아버지 청계(淸溪) 김진(金璡, 1500~1580)으로부터 땅을 받아 세운 정자로 반변천 강 언덕 위에서 내앞마을과 개호송 숲이 한 폭의 경관으로 조망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전통적 유교문화 경관을 체험할 수 있는 탁월한 조망점 역할을 하고 있는 정자이다.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씨족 촌락 마을로 의성김씨 종택을 비롯하여 전적 등 다수의 보물과 고택이 잘 보전되어 있으며, 정약용의 「택리지 발문」에 전통 씨족 촌락으로 소개되어 있고, 약300년 전에 제작된 이종악의 「허주산부군수화첩(虛舟山府君水畵帖/半邊川十二景)」에 ‘운정풍범(雲亭風帆)’이라는 제목으로 마을 풍광 그림이 남아 있는 등 500여 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개호송(開湖松) 숲'은 통례공 만근(通禮公 萬謹)이 조선 성종 무렵에 내앞마을 앞 수구(水口)가 허술함을 메우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8년(1605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운천 김용 선생의 발의로 다시 조성한 숲이다.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라는 문중 규약을 만들어 이 숲을 보호해 왔다고 전한다.
이 숲은 내앞마을의 농경지를 보호하고 바람과 물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수구막이 숲이며, 완만한 모래사장에 달빛이 비추는 ‘완사명월형(浣沙明月形)’ 혹은 소가 누워 풀을 되새김하는 ‘와우형(臥牛形)’으로 알려져 있는 내앞마을 풍수형국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한 비보림(裨補林) 역할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보호하여 온 오랜 역사의 마을 숲이다.
「안동 백운정 및 개호송 숲 일원」은 강 건너편 백운정과 반변천 수중에 조성되어 있는 반월형 섬 위의 소나무 숲인 개호송 숲, 강가를 따라 조성된 내앞마을, 반변천과 강가의 기암과 단애, 천변 숲이 한 눈에 펼쳐져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대표적인 씨족 촌락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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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천집(雲川集) 김용(金涌)생년1557년(명종 12)몰년1620년(광해군 12)자도원(道源)호운천(雲川)본관의성(義城)
雲川先生文集卷之三 / 序 / 開湖種松禁護議序
開湖種松一事。自先世曾有某樹。而野火川漲。蕩然無寸靑者已過十年。爲子孫而居此里者。尙忍何以爲懷。而必恭敬止於何所邪。今與同里諸君子同約。盡發一里下人。種之千餘株。庶幾不廢先人之意。兼贖我輩不得禁護之罪。坐中前府使涌。執酌而更與相約曰。今日之松。種則種矣。此後火燒可畏也。牛羊踐踏可畏也。放火而不知禁。放牛羊而不知禁。則今日我輩之所再種者。亦且蕩然無寸靑矣。其視前日不忍爲懷者。不亦左乎。凡我同里之人。若不思其祖
先則已。苟有恭敬之心。知其不可不繼先人者。則必無不盡其心者矣。凡我同里之人。盍相與勉之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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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근(金萬謹)
조선 전기의 유학. 본관은 의성(義城). 병절교위(秉節校尉) 김예범(金禮範)의 아버지로, 진사(進士)를 지냄.
김예범(金禮範) (1479~1550)
조선 연산군(燕山君)~명종(明宗) 때의 무신. 진사 김만근(金萬謹)의 아들이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조부(祖父)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냄.
김진(金璡) (1500~1580) 청계(靑溪) 선암(仙巖)
조선 전기의 유학. 본관은 의성(義城). 김예범(金禮範)의 아들이며 김성일(金誠一)의 아버지. 기묘명유(己卯名儒)들을 찾아 가르침을 배워 견문을 넓히고 학업에 정진함.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됨.
김정(金珽) (1508~1578) 남계(南溪)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김예범(金禮範)의 아들이며, 김정(金淨)의 문인(門人). 중부 참봉(中部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호은정(壺隱亭)을 지어 놓고 소요함.
김극일(金克一)@1522 (1522~1602) 약봉(藥峯)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김진(金璡)의 아들이고 김성일(金誠一)의 형.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성주 목사(星州牧使)ㆍ밀양 부사(密陽府使) 등을 지냄.
金澈 系
표은집(瓢隱集) 김시온(金是榲)생년1598년(선조 31)몰년1669년(현종 10)자이승(以承)호표은(瓢隱), 도연(陶淵)본관의성(義城)특기사항유직(柳㮨), 김임(金㶵), 유인배(柳仁培), 김응조(金應祖) 등과 교유
지촌집(芝村集) 김방걸(金邦杰)생년1623년(인조 1)몰년1695년(숙종 21)자사흥(士興)호지촌(芝村), 지옹(芝翁)본관의성(義城)특기사항이유장(李惟樟), 박정설(朴廷薛) 등과 교유
고종 | 2 | 1865 | 을축 | 同治 | 4 | - | 후손들이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다. 崇禎紀元後四乙丑開刊 |
경북 안동시 길안면 구수리 松亭송정 숭정처사유허비
제산집(霽山集) 김성탁(金聖鐸)생년1684년(숙종 10)몰년1747년(영조 23)자진백(振伯)호제산(霽山)본관의성(義城)특기사항이현일(李玄逸)의 문인
숙종 | 10 | 1684 | 갑자 | 康熙 | 23 | 1 | 8월 12일, 六代祖 靑溪 金璡의 別業이 있는 英陽縣 靑杞里에서 태어나다. |
숙종 | 19 | 1693 | 계유 | 康熙 | 32 | 10 | 부친을 따라 世居地 臨河縣 川前里로 돌아오다. |
숙종 | 20 | 1694 | 갑술 | 康熙 | 33 | 11 | 從叔父 適庵 金台重에게 수학하다. |
숙종 | 34 | 1708 | 무자 | 康熙 | 47 | 25 | 아들 金樂行이 태어나다. ○ 適庵을 모시고 증조 金是榲의 「瓢隱集」을 교정하다. |
구와집(龜窩集) 김굉(金㙆)생년1739년(영조 15)몰년1816년(순조 16)자자야(子野)호구와(龜窩)본관의성(義城)특기사항이상정(李象靖)의 문인. 이종수(李宗洙), 김종덕(金宗德), 이완(李埦), 이우(李㙖) 등과 교유
金弼秉
김약수(金若洙)
조선 후기의 유학. 본관은 의성(義城). 조선 말의 학자이며 의병장인 김도화(金道和)의 아버지.
척암집(拓菴集) 김도화(金道和)생년1825년(순조 25)몰년1912년자달민(達民)호척암(拓菴)본관의성(義城)특기사항유치명(柳致明)의 문인. 강건(姜楗), 김흥락(金興洛), 유도성(柳道性) 등과 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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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서원(臨湖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김용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출처] 『安東의 書院』⑸ - ▣사빈서원(泗濱書院) ▣화천서원(花川書院)|작성자 ohyh45
임호서원(臨湖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790
김 용(金 涌)
1707년(숙종 33)
1707년(숙종 33)에 창건되어 김용(金涌)을 제향하여 오다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임천서원(臨川書院) 구지(舊址) 옆에 강당을 세워 김용을 제향했는데, 1981년 현 위치로 이건했다. 현재 임호서당(臨湖書堂)이라는 현판이 강당 내부와 외부에 게판되어 있다.
1)김용(金涌)1557~16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예범(禮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진(璡)이고, 아버지는 찰방 수일(守一)이며, 어머니는 사과(司果) 조효분(趙孝芬)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해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봉교(奉敎), 성균관의 전적(典籍)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正言)·헌납(獻納)·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 등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수행해 많은 활약을 했으며, 교리에 재임 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겨 그를 후원하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해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옮겨졌다. 이 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중앙 관직과 지방 관직을 전전하였다.
일시 제용감정(濟用監正)·세자필선(世子弼善)·집의(執義) 등 중앙 관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지방 관직을 지내면서 오직 백성의 보호와 학문의 진흥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냈다. 그 후 1616년 60세의 나이로 여주목사로 나갔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자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죽었다.
안동 임호서원(臨湖書院)·묵계서원(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천집 雲川集≫·≪운천호종일기 雲川扈從日記≫(보물 제484호) 등이 있다.
강당으로 쓰이는 임호서당과 아양루(我洋樓)가 1921년 건립된 후 1981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사주문으로 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경내에는 강당과 동재가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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瓢隱先生文集卷之四 / 附錄 / 祭文[門人南夢賚]
南夢賚 | 1620 | 1681 | 英陽 | 仲遵 | 伊溪 |
嗚呼。
緬惟先賢。事業不淺。達者兼濟。窮則獨善。今我先生。無愧前修。生榮死哀。餘外何求。然小子慟。猶不自已。叙公平生。
敬質神理。阿好曲諛。非所知也。惟公氣度。卓犖高雅。禀精山嶽。無纇璠璵。志學初年。游刃羣書。旣博以約。餘事文章。
君民有志。亦陋漢唐。嗟生不辰。遭世罔極。歲在困敦。事不忍說。何心斯世。路亦崎側。卷而懷之。恥復自衒。睠彼山林。
聊適我願。綸巾野服。大瓢靑溪。䟽泉爲池。種蔬成畦。穠春素秋。花朝月夕。把酒吟詩。情高意逸。舞衫斑爛。謝家寶樹。
摳衣出入。冶門鎔鑄。鬼秘神彰。延平身世。弄丸探眞。康節心契。游心千古。俯視塵紛。富貴何加。於我浮雲。流光荏苒。
素髮星鮮。鶴瘦鸞峙。地上神仙。王曰懷哉。遺逸之賢。乃詢乃訪。一命以先。寤言永矢。確乎不拔。黃鍾未奏。豫章誰伐。
迨其季年。行安學成。外鋤城畛。內就高明。德符儀容。道體動靜。左右圖書。前後賢聖。一味優游。樂而忘憂。不出戶庭。
聲聞四流。高山仰止。遠敬近惠。士林傾心。侯伯擁篲。南鄕北斗。小魯泰山。庶可矜式。寬鄙廉頑。天胡不憗。鳳兮云逝。
禪窓一夜。少微收彩。嗚呼先生。而止於斯。一寄一歸。誰實尸之。盈虛消息。屈伸吸呼。長嘯倚空。與化爲徒。古今一息。
物我同歸。窮通不計。短長焉知。小子晩生。猶及登門。累陪杖屨。幾接溫溫。申以婚姻。情義益親。嶺樹秦雲。山川或間。
長書短札。誠意未散。昔在丁未。先考禍延。罪逆殘喘。無望生全。每於訊便。反覆敎詔。曰無傷生。爲君子笑。自惟無狀。
多不及禮。苟存視息。而及三歲。倘不死滅。或可卒業。何意今朝。又訣終天。失聲長呼。淚落如泉。儀刑永隔。考德無期。
何所依歸。余懷之悲。山瓢代酹。野䔩幷設。掩涕緘辭。遠寄誠血。不亡者存。庶幾來格。嗚呼哀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