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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洪汝河)1620년(광해군 12)~1674년(현종 15)
木齋先生文集卷之五 / [記] / 山陽書堂立社呈文 代儒生作 *중간본<呈牧伯文>
伏以民等所居縣中。故有寓庵洪先生者。諱彥忠。字直卿。燕山朝直節名臣也。先生自早歲。文章節行。著稱于時。與朴挹翠誾,鄭虛庵希良,李容齋荇。定交齊名。時人稱爲四傑。嘗在湖堂。同朴誾應旨封章。陳燕山闕失。燕山主大怒。幾陷不測。竟被逮於甲子之禍。度必不免。自撰墓銘而行。是時。燕山盡磔戮一時名流。其餘十輩。拘諸巨濟島中。而將殺之。先生三昆季與其中。島中日相驚。傳言賜藥已至。李公長坤脫身逃竄。於是諸公惶窘不知所出。密爲賃舟汎海之計。先生聞之。歎曰。君命天也。天可逃乎。臣子之義。有死而已。嚴責子弟。使不得預汎舟之謀。俄而。中廟反正。先生遂得放還。然念委質之義。不應中廟之徵。不幸年三十六以卒。事具載東文選,輿地志。先生之出處大致如此。而挹翠朴公。竟被戮死。虛庵鄭公。託跡方外。容齋李公。際會聖后。致位廊廟。然跡其出處完節。論者於四傑之中。以先生爲稱首焉。先生咸昌人。卜居于本縣南茂林部曲道淵村。自銘中所謂卜于古縣。茂林之鄕。靑山在上。灣碕在下者也。芳躅未遠。風烈彌彰。後學追慕。久而益篤。咸願建院。而俎豆之。亦嘗稟定於儒林宗師。邇來十年之間。鄕議再完。而連歲大扎。未遑鉅役。近者竊聞。朝家新頒事目。凡有書院創建。切勿輕許。出於愼重之至意也。民等。一縣儒品。大小齊會。仰遵朝憲。俯協輿議。因以本縣書堂。自有齋室。只造一二間廟屋。功力易就。故卽其地。定爲鄕賢之祠。將以八月之初。鳩材始役。民等各出米布。期於集事。而燔瓦運材。須藉若干丁夫。況復事關風敎。不可不仰達於仁聽。伏願二天城主。嘉前輩之遺烈。恤民等之誠懇。特許於本縣一面洞內。各出丁夫數名。以助運輸。則人心感奮。功力亟竣。其永有辭於後矣。
목재집 제5권 / 설(說)/ 산양서당에 사당을 세우고 관청에 보낸 글 유생 대표로 짓다. 〔山陽書堂立社呈文 代儒生作〕
삼가 생각하건대 저희들이 사는 현(縣)에 고(故) 우암(寓庵) 홍 선생(洪先生) 휘 언충(彥忠), 자 직경(直卿)은 연산조(燕山朝)에 곧은 절개로 이름난 신하입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문장과 절행(節行)으로 당시에 칭송이 자자했으며,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ㆍ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ㆍ용재(容齋) 이행(李荇)과 함께 사귀면서 명성을 나란히 해 당시 사람들이 사걸(四傑)로 칭송했습니다. 일찍이 호당(湖堂)에 있을 때 박은과 함께 응지(應旨) 상소를 올려 연산군의 허물을 아뢰었습니다. 연산군이 대로하여 일이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마침내 갑자년의 화를 입었는데, 헤아려 보니 필시 화를 면하지 못하겠기에 스스로 묘지명(墓誌銘)을 찬(撰)하고 떠났습니다.
이때 연산군은 일시의 명사(名士)들을 다 죽였으며, 나머지 10여 명은 거제도에 유배 보내 죽이려 했는데, 선생의 삼형제도 그 속에 포함되었습니다. 섬 가운데서 날마다 전해지는 말에 놀라다가, 사약(賜藥)이 이미 이르렀다고 하자 이장곤(李長坤)은 몸을 피해 유배지를 달아났습니다. 이때 제공들은 두려워 어쩔 줄 모르다가 몰래 배를 임대하여 바다로 나가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선생이 듣고 탄식하기를, “군주의 명령은 하늘과 같으니, 하늘을 피할 수 있겠는가. 신하의 의리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고 자제들을 엄하게 꾸짖어 배를 임대하려는 계획을 사전에 그만두게 했습니다.
얼마 뒤 중종이 반정을 일으켜 선생은 결국 풀려나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신하의 의리를 생각하여 중종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며, 불행히도 36세에 죽었습니다. 선생의 일은 《동문선(東文選)》ㆍ《여지지(輿地志)》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선생의 출처는 대략 이와 같으며, 읍취헌 박공은 끝내 형벌을 받아 죽었고, 허암 정공은 방외(方外)에 자취를 의탁했으며, 용재 이공은 성상(聖上)을 만나 지위가 낭묘(廊廟)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출처와 온전한 절개를 따져 보면 논자들은 사걸 가운데 선생을 으뜸으로 여깁니다.
선생은 함창인(咸昌人)으로 본현 남쪽 무림부곡(茂林部曲) 도연촌(道淵村)에 복거하였는데, 스스로 지은 묘지명(墓誌銘) 가운데 “옛 고을 무림(茂林)에 터를 정하니, 푸른 산이 위에 있고, 물굽이 언덕이 아래에 있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취가 멀리 있지 않고, 성대한 유풍이 더욱 드러나기에 후학들의 추모는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하여 모두들 서원을 건립해 제사 지내고자 하는 뜻을 또 일찍이 유림의 종사(宗師)에게 아뢰었습니다. 근래 10년 동안 향론(鄕論)이 다시 온전하게 갖추어졌지만 연이어 큰 흉년이 겹쳐 큰일을 치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근래에 제가 들으니, 조정에서 새로 반포된 사목(事目)에는 무릇 서원 창건은 결코 가볍게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니, 지극히 신중한 뜻을 낸 것인 줄 알겠습니다.
저희들은 한 고을의 유생(儒生)으로 크고 작은 제회(齊會)에서 우러러 조헌(朝憲)을 따르고 아래로는 여론을 모았으며, 이로 인해 우리 고을의 서당은 그전부터 있던 재실(齋室)에 단지 한두 칸 건물을 짓고자했습니다. 공력(功力)이 쉽게 이루어졌기에 그곳에 가서 고을 어진 사람을 모시기 위한 사당을 정하고, 8월 초에 재목을 모아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저희들이 각자 쌀과 베를 내고 일을 이루길 기약하였으며, 기와 굽기와 재목 운반은 약간 명 정부(丁夫)들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풍교(風敎)에 관계된 일은 사또께 보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감사께서 전배들이 남긴 공을 가상히 여기고 저희들〔民等〕의 간절함을 보살펴서 특별히 우리 현 한 면(面) 동내에 각각 정부(丁夫) 몇 명을 내어 운반을 돕게 해주면, 인심은 감격하고 준공은 빨라져 길이 후세에 칭송될 것입니다.
[주-D001]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 1479~1504. 본관은 고령,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이다. 문집으로 《읍취헌유고》가 전한다.[주-D002]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 : 1469~?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이다.[주-D003] 용재(容齋) 이행(李荇) : 1478~1534.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ㆍ창택어수(滄澤漁叟)ㆍ청학도인(靑鶴道人)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문집으로 《용재집》이 전한다.[주-D004] 갑자년의 화 : 갑자년(1504, 연산군10) 연산군의 생모 윤씨 복위문제로 야기되어 사림들이 화를 당한 이른바 ‘갑자사화’를 가리킨다.[주-D005] 감사 : 원문의 ‘二天’은 감사(監司)를 일컫는 말이다. 후한(後漢) 때 소장(蘇章)이 기주 자사(冀州刺史)로 부임하였는데 그의 벗 가운데 청하 태수(淸河太守)가 된 사람이 있었다. 소장이 청하에 가서 그 비리를 조사하기 전에 술과 안주를 베풀어 대접하자 그 친구가 기뻐하면서 “다른 사람은 모두 일천(一天)이 있는데 나만 홀로 이천(二天)이 있구나.”라고 한 말이 있다. 《通鑑節要 卷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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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齋先生文集卷之六 / 上樑文 / 寓庵洪先生立祠上樑文
誦其詩讀其書知其人。寔資尙友。國有學州有序家有塾。皆以明倫。爰創一畝之宮。庸揭百世之範。恭惟寓庵先生。古之烈士。傑然一時。味已辨於取熊。生有不爲。死有不避。詞競傳於賦鵩。命何其短。意何其長。事君無改節之心。奉天有不讎之義。鄕先生歿可祭社。其在斯人。至今日始議作堂。蓋亦有待。眷茲近喦書室。寔惟商嶺奧區。旣衍旣原。卽水抱山環之地。宜絃宜誦。抑冬溫夏涼之天。秀氣攸鍾。北盤黛美之嶽。芳塵可挹。南眺謝家之山。距先生之故居。若是近也。因講堂之舊貫。庶易就乎。鄕老出力而鳩材。多士釋經而敦事。齋廬庖湢之備設。益恢申侯之舊規。尸祝薦祼之縟儀。聿遵厓門之正論。儼輪奐而創構。面勢甚尊。精肸蠁而降歆。苾芬旁達。茲歷吉日。將擧脩樑。恭殫蛾術之誠。敢陳燕賀之唱。兒郞偉拋樑東。看取初昇曉旭紅。年富學人如此日。功程脩遠更昭融。兒郞偉拋樑南。十里靑山著寓庵。欲學丈夫風節事。請君莫向利名酣。兒郞偉拋樑西。指路漳州莫使迷。平正一條堪踏去。休論適國有千蹊。兒郞偉拋樑北。環繞列星控紫極。三十輻共一轂然。心體如之須默識。兒郞偉拋樑上。一片靈臺涵萬象。聖賢辛苦說明誠。盡與斯人除慾障。兒郞偉拋樑下。夏誦冬絃集儒雅。大學始敎必由茲。美俗薰陶民自化。伏願上樑之後。文風丕振。正道乃行。建學立師。想成均敎育之制。樂群敬業。資麗澤講習之功。人慕節義之風。家興禮讓之俗。爲臣作忠。爲子作孝。有餘力以學文。不肅而成。不勞而能。詎見遷於異物。
목재집 제6권 / 상량문(上樑文) / 우암 홍 선생을 입사한 사당의 상량문〔寓庵洪先生立祠上樑文〕
시를 외우고 글을 읽어 그 사람을 알아 옛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벗함의 바탕이 되고, 국(國)에는 학(學)을 두고, 주(州)에는 서(序)를 두고, 가(家)에는 숙(塾)을 둠은 모두 인륜을 밝히기 위함이었네. 이에 한 이랑의 사당을 세우니, 이로써 백세의 모범을 드리웠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암(寓庵) 선생은 예전의 열사(烈士)로 일시에 준걸스러운 분이네. 맛으로는 의리를 분별할 줄 알아, 살아서는 하지 않는 일이 있었고, 죽음을 피하지 않아 사(詞)는 복조부(鵩鳥賦)를 읊어 전한 것보다 소문이 났네. 목숨이 그렇게 짧은데도, 뜻은 어찌도 그렇게 장구(長久)하게 품으셨던가. 임금 섬김엔 절개를 고치려는 마음이 없었고, 하늘의 뜻을 받듦엔 원수를 두지 않으려는 의리를 지녔네. 마을의 어진이가 죽으면 사당에 모셔지며 이 분도 거기에 해당하기에,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사당 지을 의논을 하니 기다림이 있은 것이네.
돌아보니 이 근암서원(近嵒書院)은 참으로 상산(商山) 고갯마루 그윽한 구역에 있네. 낮은 언덕과 진펄이라 강물이 감싸고 산이 에둘렀으며, 거문고 타고 글 읽기에 마땅한지라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하네. 빼어난 기운 모여 들어 북으로 예쁘게 화장한 눈썹 같은 산들이 웅크리고 있고, 향기로운 자취 손에 닿을 듯 남으로 사씨(謝氏) 집안의 산을 조망하네. 선생의 옛집과 거리가 이처럼 가깝고, 강당은 옛 일을 인하여 그대로 따랐기에 쉽게 이루겠구나.
마을 어른들은 힘을 보태고 재물을 모으며, 많은 선비들도 책을 내려놓고 일을 돕네. 재실ㆍ부엌ㆍ목욕탕을 갖추니, 신후(申侯)의 옛 모범을 더욱 넓히네. 축문 읽고 천관(薦祼)하며 성대히 제사 지내며, 이에 서애(西厓) 문하의 정론(正論)을 준수했네. 엄연히 빛나고 새롭게 얽었기에 지세(地勢)도 매우 받들고, 정결하게 제사지내 내려진 복이기에 향기가 널리 퍼지네. 이에 길일을 지나, 긴 들보 올리기를 시작하네. 공경히 아술(蛾術)의 정성을 다하고, 감히 연하(燕賀)의 잔치 노래를 짓네.
어기영차 들보 동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東
보라, 새벽의 붉은 태양 처음 솟아오름을 / 看取初昇曉旭紅
나이 젊은 학자들은 이 태양과 같으니 / 年富學人如此日
갈 길이 머니 거듭 밝히고 녹여야 하네 / 功程脩遠更昭融
어기영차 들보 남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南
십리 청산은 우암을 밝게 드러내니 / 十里靑山著寓庵
대장부의 풍모와 절개를 배우려거든 / 欲學丈夫風節事
청컨대 그대들은 이익이나 명예를 탐하지 말라 / 請君莫向利名酣
어기영차 들보 서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西
장주로 가는 길 가르켜 주어 헤매지 않게 했으니 指路漳州莫使迷
평평하면서도 곧은 한 갈래를 내달려야지 / 平正一條堪踏去
국도로 가는 데에 천 갈래 길 있다고 말하지 말라 / 休論適國有千蹊
어기영차 들보 북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北
에워 싼 뭇 별들 북극성을 향하고 / 環繞列星控紫極
서른 폭 바퀴살은 바퀴통 하나를 함께 하듯이 / 三十輻共一轂然
몸과 마음이 그와 같아서 모름지기 묵묵히 알도다 心體如之須默識
어기영차 들보 위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上
한 조각 마음에 만상이 담겨 있기에 / 一片靈臺涵萬象
성현께서 힘들여 명과 성을 말하였으니 / 聖賢辛苦說明誠
이 사람들과 함께 욕심의 장애물을 모두 없애기를 / 盡與斯人除慾障
어기영차 들보 아래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下
여름에는 글 읽고 겨울에는 음악 익히며 아름다운 선비들 모였고 / 夏誦冬絃集儒雅
태학에서의 첫 가르침도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으며 / 大學始敎必由茲
미풍양속으로 훈도하니 백성들 저절로 교화되네 / 美俗薰陶民自化
삼가 바라건대, 상량(上樑)한 뒤에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고, 정도(正道)가 곧바로 시행되어 학교를 건립하고 스승을 모셔 성균관에서 교육시키는 제도를 생각하고, 백성들을 기쁘게 하고 이업을 공경하여 붕우 간에 서로 도와가며 강습하는 공로(功勞)의 밑바탕이 되길. 사람들은 절의(節義)의 풍모를 사모하고, 집안에선 예양(禮讓)의 풍속을 일으켜 신하가 되어선 충성하고 자식이 되어선 효도하기를. 남은 힘이 있어 학문을 익힌다면엄하게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수고롭지 않아도 가능하기에 어찌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전락하랴.
[주-D001] 우암 …… 사당 : 우암은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을 가리킨다. 그의 본관은 부계(缶溪)이며, 자는 직경(直頃)이고, 호는 우암(寓菴)이다. 갑자사화 때 진안으로 유배되었으며, 아버지 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때에 또다시 해도(海島)로 이배되었다. 해도에 이배하던 중 조령에 이르러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사당은 홍언충을 향사한 근암서원 내의 경현사(景賢祠)를 가리킨다. 《近嵓書院誌》[주-D002] 시를 …… 벗함의 : 《맹자》에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시를 낭송하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그의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 시대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讀其書誦其詩,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라는 말이 있다. 《孟子 萬章下》[주-D003] 국(國)에는 …… 둠 : 《예기》 〈학기(學記)〉에 “옛날 교육하던 것에는 마을에는 숙이 있고, 고을에는 상이 있고, 지방에는 서가 있고, 나라에는 학이 있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州有序, 國有學〕”라는 말이 있다.[주-D004] 한 이랑의 사당 : 덕 있는 선비를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예기》 〈유행(儒行)〉에 “선비는 일묘의 담장과 환도의 실에다 대를 쪼개어 엮은 문을 달고 문 옆에 작은 문을 내며, 쑥대로 엮은 출입문과 옹기로 들창을 달고, 옷은 번갈아 입고 나오고 이틀에 하루치의 음식을 먹는다.〔儒有一畝之宮, 環堵之室, 篳門圭窬, 蓬戶甕牖, 易衣而出, 幷日而食〕”라는 말이 있다.[주-D005] 맛으로는 …… 알아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고기도 먹고 싶고 곰 발바닥도 먹고 싶지만 모두 먹을 수 없다면 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며, 생명도 보전하고 싶고 의리도 취하고 싶지만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을 경우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는 말이 있다.[주-D006] 사(詞)는 …… 났네 : 〈복조부(鵩鳥賦)〉는 가의(賈誼)의 작품이며, 본문은 가의와 관련된 고사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에 가의(賈誼)가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폄척되어 나가 있을 때, 그의 집에 복조(鵩鳥)가 날아 들어왔다. 그는 복조를 상서롭지 못한 새라고 여겨 불길한 생각에 〈복조부〉를 지어 스스로 위로했는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가의가 죽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84 賈誼列傳》[주-D007] 근암서원(近嵒書院)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소재한 서원이며, 1669년(현종10)에 설립되어 홍언충(洪彦忠, 1473~1508)ㆍ이덕형(李德馨, 1561~1613)ㆍ김홍민(金弘敏, 1540~1594) 등을 배향하였다.[주-D008] 낮은 언덕과 진펄 : 오토(五土)의 신(神) 중 하나이다. 오토는 다섯 가지 토지, 곧 산림(山林)ㆍ천택(川澤)ㆍ구릉(丘陵)ㆍ분연(墳衍 언덕과 평지)ㆍ원습(原隰 높은 벌판과 낮은 진펄)을 가리킨다. 춘분과 추분을 지난 무자(戊子) 일을 사일(社日)이라고 하며, 이날 여기에 제사를 지낸다. 《周禮 地官 大司徒》[주-D009] 거문고 …… 시원하네 : 현송(絃誦)이란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는 것을 말한다.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봄에는 시를 외우고 여름에는 거문고를 탄다.〔春誦詩 夏絃琴〕”라는 말이 있다.[주-D010] 사씨(謝氏) 집안 : 진(晉)의 태부(太傅)를 지낸 사안(謝安)의 집안에는 자질이 우수한 자제들이 많았으며, 사령운(謝靈運)ㆍ사조(謝眺) 등의 시인이 배출되었다. 이후 사씨는 왕씨(王氏)와 더불어 명문거족의 대표가 되었다. 《世說新語 言語》[주-D011] 신후(申侯) : 근암서원을 처음으로 창건한 신잠(申潛, 1491~1554)을 가리킨다.[주-D012] 천관(薦祼) : 제사의 절차로 천은 제수(祭需)를 올리는 것을 말하고, 관은 신의 강림(降臨)을 바라며 모사(茅沙)를 담은 그릇에 술을 조금씩 세 번 따르는 것을 말한다.[주-D013] 서애(西厓) : 호가 서애인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을 가리킨다.[주-D014] 아술(蛾術)의 정성 : 아(蛾)는 개미를 뜻한다. 개미는 하찮은 벌레이지만 끊임없이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계속하여 마침내 큰 둑을 만든다. 학문도 그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닦아야 성취가 있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개미는 수시로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배워 익힌다.〔蛾子時術之〕”라고 하였다.[주-D015] 연하(燕賀)의 잔치 : 연하는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목욕할 채비가 갖추어지면 이들이 서로 슬퍼하고, 큰 집이 이루어지면 제비와 참새들이 서로 축하한다.〔湯沐具而蟣蝨相弔, 大厦成而燕雀相賀〕”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본디 제비와 참새가 사람의 집을 자기들의 깃들 곳으로 삼아 서로 축하한다는 뜻이다. 흔히 남이 새로 집을 지은 것을 축하하는 말로 쓰이며, 또는 일반적인 축하의 뜻으로도 쓰인다.[주-D016] 장주(漳州)로 …… 했으니 : 장주는 복건성(福建省)에 있다. 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답한 편지에, “예를 들어 건주(建州) 사람이 천주(泉州)로 가는 길을 모른다고 치자. 그에게 남쪽을 따라 검주(劒州)에서 길을 묻게 해야 할 것이니, 어찌 장주(漳州)를 지나쳐 찾게 할 것인가. 이는 큰 병통이니 알지 않으면 안 된다.〔如建州人, 未識泉州. 須且敎他從南劒州問路去, 豈可敎他過漳州尋耶. 此是大病不可不知〕”라고 한 말이 있다. 《晦庵集 卷39 答許順之》[주-D017] 서른 …… 하듯이 : 이 말은 《도덕경》에 “하나의 바퀴통에 바퀴살 서른 개가 모이지만, 그 쓰임은 바퀴통의 빔에 있다.〔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주-D018] 몸과 …… 알도다 : 우암 선조의 훌륭한 업적을 그대로 잘 따른다는 뜻이다. 원문의 黙識는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말 없이 기억해 두고 배우기를 싫증 내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내게 해당하는가.〔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주-D019] 성현께서 …… 말하였으니 : 《중용장구》 제21장에 “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이라 하고 명으로 말미암아 성해지는 것을 교라 이르니, 성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해진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는 말이 있다.[주-D020] 남은 …… 익힌다면 :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제자(弟子)는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오면 공손하며, 언행을 삼가고 미덥게 하며, 널리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친히 해야 한다. 이렇게 하고도 여력(餘力)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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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齋先生文集卷之七 / 祭文 / 近喦書院漢陰李先生奉安文
盛朝流煕。釀元涵精。維時先生。應期而生。祥順其資。閎偉其器。性理之學。經濟之志。黼黻之文。亦韡其英。陳謨發令。貫我休明。褎然德首。循蹈規矩。殆天降任。太平是輔。運際陽九。海寇以猘。三都浹旬。震驚幽薊。君臣播越。鄙在灣陬。維時先生。誓不全軀。哭秦出師。申胥慨慷。單騎赴虜。志慕汾陽。讓夷卽險。奔走禦侮。從容儐相。折衝樽俎。方晉宗向。譬鄭僑皮。名聞華夏。威讋南夷。匪先生任。國仆誰起。天降先生。意乃在是。黑頭大拜。正色垂紳。巍巍堂堂。爲國宗臣。狂昏顚覆。邪議盈庭。先生曰嘻。我死則寧。賢相有諷。得無傷勇。先生曰否。我心如烘。義有捨生。忠或祈死。倫彝克正。校績愈偉。於戲先生。兩有武文。不爲聲章。不居崇勳。有政有事。有言有烈。具茲衆美。統于大節。粤稽聖制。曷後明禋。遺澤未斬。嗟我邦人。眷茲近喦。溪涵嶽峙。釣游不及。桑梓密邇。維昔寓庵。爰有舊廟。曠世神交。肝膽相照。同堂妥侑。德將在斯。衿紳濟濟。卒度禮儀。假我虔誠。歆我粢盛。勖忠課孝。以永厥聲。
목재집 제7권 / 제문(祭文) / 근암서원에 한음 이 선생을 봉안하는 글〔近喦書院漢陰李先生奉安文〕
성대한 조정의 광휘가 이어져 / 盛朝流煕
원기를 빚고 정령을 길러내니 / 釀元涵精
오직 선생께서 / 維時先生
이때를 맞추어 태어나셨네 / 應期而生
자질은 아름답고 유순했으며 / 祥順其資
도량은 넓고 위대하여 / 閎偉其器
성리를 배웠고 / 性理之學
세상 경영에 뜻을 두었네 / 經濟之志
보불을 이루는 문장은 / 黼黻之文
더욱 그 영기가 빛나 / 亦韡其英
계책을 세우고 명령을 내리면 / 陳謨發令
우리의 밝고 아름다움을 꿰뚫었네 / 貫我休明
우뚝이 덕이 높아지고 / 褎然德首
순순히 도리를 실천하니 / 循蹈規矩
자못 하늘이 큰 책임을 내려 / 殆天降任
태평성대를 돕게 했네 / 太平是輔
나라의 운수가 막혀 / 運際陽九
바다 도적들이 날뛰니 / 海寇以猘
삼도가 열흘 동안 / 三都浹旬
유주 계주처럼 놀라서 떨었네 / 震驚幽薊
임금과 신하가 도성을 떠나 / 君臣播越
비루하게 의주 모퉁이에 있었는데 / 鄙在灣陬
아 선생께서는 / 維時先生
목숨 버리기를 맹세하였네 / 誓不全軀
곡하며 명에 원군 요청할 때엔 / 哭秦出師
강개한 기운 거듭 펼쳤고 / 申胥慨慷
단기로 적중에 달려갔으니 / 單騎赴虜
뜻은 곽분양을 사모하였다네 / 志慕汾陽
쉬운 일 양보하여 험지로 나아가 / 讓夷卽險
침략을 막는 데 힘을 다했고 / 奔走禦侮
접빈사의 역할 묵묵히 수행하여 / 從容儐相
평화롭게 교섭하여 적의 예봉 눌렀네 / 折衝樽俎
바야흐로 진나라 종향이오 / 方晉宗向
비유컨대 정나라 교피이니 / 譬鄭僑皮
명성은 중국에 알려졌고 / 名聞華夏
위엄은 남쪽 오랑캐 두렵게 했네 / 威讋南夷
선생께서 책임을 맡지 않았다면 / 匪先生任
쓰러지는 나라 누가 일으켰으리오 / 國仆誰起
하늘이 선생을 내린 것은 / 天降先生
그 뜻이 여기에 있었네 / 意乃在是
젊은 나이로 재상이 되었으나 / 黑頭大拜
엄숙한 낯빛에 큰 띠 드리우니 / 正色垂紳
높고 당당하여 / 巍巍堂堂
나라의 종신이 되었네 / 爲國宗臣
광해군이 정사를 뒤집어엎어 / 狂昏顚覆
사특한 의론이 조정에 가득하니 / 邪議盈庭
선생께서 이르기를 아 / 先生曰嘻
내 죽으면 편안하리라 하였네 / 我死則寧
어진 재상이 풍간함에 / 賢相有諷
용맹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다 하니 / 得無傷勇
선생께서 이르기를 아니다 / 先生曰否
내 마음은 횃불과 같다고 했네 / 我心如烘
의리는 삶을 버림이 있었고 / 義有捨生
충성은 죽기를 바랐으니 / 忠或祈死
이륜을 바로잡을 수 있었기에 / 倫彝克正
상고한 업적 더욱 위대하네 / 校績愈偉
아 선생은 / 於戲先生
문과 무를 겸하였으면서 / 兩有武文
명성을 생각하지 않았고 / 不爲聲章
높은 공로를 차지하지 않았네 / 不居崇勳
정치와 행사 / 有政有事
공론과 위엄은 / 有言有烈
모든 아름다움을 갖추고 / 具茲衆美
큰 절의를 통괄하였네 / 統于大節
성인의 제도를 상고하건대 / 粤稽聖制
어찌 제사를 소홀히 했던가 / 曷後明禋
남긴 은덕 끊어지지 않았건만 / 遺澤未斬
아 우리나라 사람들이여 / 嗟我邦人
여기 근암을 돌아보니 / 眷茲近喦
시냇물 넓고 산봉우리 우뚝한데 / 溪涵嶽峙
낚시하며 노닐던 곳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 釣游不及
어릴 적 고향과 아주 가깝네 / 桑梓密邇
생각건대 지난날 우암의 / 維昔寓庵
옛 사당이 여기에 있고 / 爰有舊廟
세상에 드문 정신적 교분 맺어 / 曠世神交
마음을 서로 이해하였네 / 肝膽相照
같은 사당에 편안히 모신다면 / 同堂妥侑
은덕이 장차 여기에 남아 / 德將在斯
선비들이 넘치고 넘쳐 / 衿紳濟濟
마침내 예의를 이루리라 / 卒度禮儀
우리의 공경과 정성을 아름답게 여기고 / 假我虔誠
우리의 제물을 흠향하여 / 歆我粢盛
충을 권장하고 효를 권장하게 하여 / 勖忠課孝
그 명성을 영원하게 하옵소서 / 以永厥聲
[주-D001] 근암서원(近嵒書院)에 …… 글 : 근암서원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소재한 서원이며, 1669년(현종10)에 설립되어 홍언충(洪彦忠)ㆍ이덕형(李德馨)ㆍ김홍민(金弘敏) 등을 배향하였다. 한음은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을 가리킨다.《近嵒書院誌》[주-D002] 보불(黼黻)을 이루는 문장 : 임금을 보좌할 문재(文才)를 가졌다는 뜻이다. 보불은 곤룡포에 수놓은 문양을 말한다. 순(舜)이 우(禹)에게 이르기를 “신하는 바로 나의 팔다리요 귀와 눈이니, 종묘의 술그릇〔宗彝〕과 물풀〔藻〕과 불〔火〕과 흰쌀〔粉米〕과 보(黼)와 불(黻)을 수놓아 옷을 만들고자 하면, 그대가 그 대소(大小)와 존비(尊卑)의 차등을 규명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書經 虞書 益稷》[주-D003] 나라의 운수가 막혀 : 원문의 ‘陽九’는 음양도(陰陽道)에서 수리(數理)에 입각하여 추출해 낸 말로, 4500년 되는 1원(元) 중에 양액(陽厄)이 다섯 번, 음액(陰厄)이 네 번 발생한다고 하는데, 106년 되는 해에 양액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엄청난 재액(災厄)을 말할 때 쓰는 용어이다. 《漢書 律歷志 上》[주-D004] 유주 …… 떨었네 : 원문의 ‘幽薊’는 거란(契丹)이 지배했던 유주(幽州)와 계주(薊州)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산서성(山西省)의 북부 일대에 해당한다. 이 지역 전쟁이 많아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칭하는 곳이 되었다. 《四佳詩集 卷44 第20 送上黨韓公奉使朝京 三十首》[주-D005] 뜻은 곽분양을 사모하였다네 : 곽분양(郭汾陽)의 이름은 자의(子儀)로, 당(唐)나라 현종(玄宗)ㆍ숙종(肅宗) 때 사람이다. 한 몸으로 20년간 천하의 안위를 맡아 벼슬이 태위(太尉)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분양군왕(汾陽群王)을 봉하였기에 세상에서 곽분양(郭汾陽)이라 했다. 《舊唐書 卷120 郭子儀列傳》[주-D006] 바야흐로 …… 교피이니 : 진의 종향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 양설힐(羊舌肹)을 가리킨다. 그의 자는 종향, 혹은 숙향(叔向)이며 박학다문(博學多聞)하고 예양(禮讓)으로 나라를 잘 다스려 열국(列國) 사이에 명망이 있었다. 교피는 춘추(春秋) 시대 정(鄭)나라 대부(大夫) 공손교(公孫僑)를 가리킨다. 그의 자는 자산(子産)이며 박흡다문(博洽多聞)하고 정치를 잘 하였으며, 특히 진초 쟁패(晉楚爭覇)의 틈바구니에서 능란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春秋左傳 昭公20年》[주-D007] 용맹을 …… 하니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얼핏 보면 취할 만하고, 자세히 보면 취하지 말아야 할 경우에 그를 취하면 청렴을 상한다. 얼핏 보면 줄 만하고 자세히 보면 주지 말아야 할 경우에 주면 은혜를 상하며, 얼핏 보면 죽을 만하고, 자세히 보면 죽지 말아야 할 경우에 죽으면 용맹을 상한다.〔可以取, 可以無取, 取, 傷廉. 可以與, 可以無與, 與, 傷惠. 可以死, 可以無死, 死傷勇〕”라는 말이 있다.[주-D008] 어찌 …… 했던가 : 원문의 ‘明禋’이란 《서경》〈명인(明禋)〉에 “왕께서 사람을 보내와 은나라 사람들을 경계하시고 나에게 편안히 있으라고 명하시되 검은 기장과 울금(鬱金)으로 빚은 술 두 그릇으로 하시고, 말씀하기를 ‘밝게 공경하노니, 배수 계수하여 아름다이 향례(享禮)를 올린다.’ 하였습니다.〔伻來毖殷, 乃命寧予, 以秬鬯二卣曰, 明禋, 拜手稽首, 休享〕”라는 대목에서 유래하였다.[주-D009] 우암(寓庵) : 호가 우암인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을 가리킨다. 그의 본관은 부계(缶溪)이며, 자는 직경(直頃)이다. 홍귀달(洪貴達)의 아들로 갑자사화 때 진안으로 유배되었으며, 아버지 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때에 또다시 해도(海島)로 이배되었다. 해도에 이배하던 중 조령에 이르러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중종이 불러 직강(直講)을 제수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전재동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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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齋先生文集卷之十一 / 附錄 / 近喦書院常享祝文[金楷]
穎悟之資。篤實之學。修辭立誠。斯文準則。
목재집 제11권 / 부록(附錄) / 근암서원 상향축문〔近喦書院常享祝文〕 [김해(金楷)]
영오한 자질과 / 穎悟之資
독실한 배움으로 / 篤實之學
글을 지음에 성실함을 세웠으니 / 修辭立誠
사문의 표준이 되도다 / 斯文準則
[주-D001] 근암서원 : 경북 문경시 산북면 소재의 서원이다. 1665년(현종6)에 홍언충(洪彦忠)을 입향했고, 4년 뒤에 이덕형(李德馨)을 추향(追享)했다. 이후 1702년 김홍민(金弘敏)과 홍여하를 추향했다. 《商山誌》[주-D002] 김해(金楷) : 1633~1716. 본관은 안동, 자는 정칙(正則), 호는 부훤당(負喧堂)이다. 출사하지 않고 어버이를 모셨으며, 전제(田制) 개혁에 대해 주장한 글이 남아 있다. 《역학계몽복역(易學啓蒙覆譯)》, 《두시주해(杜詩註解)》, 《부훤당집(負喧堂集)》 등의 저술이 있다.[주-D003] 글을 …… 세웠으니 :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덕을 진취시키고 학업을 닦나니, 충과 신이 덕을 진취시키는 것이요, 말을 함에 있어서 그 성실함을 세움이 학업을 보유(保有)하는 것이다.〔君子進德修業 忠信 所以進德也 修辭立其誠 所以居業也〕”라고 하였다. 《周易 乾卦》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전재동 (역)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