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사58:6~11
유대교에서는 예로부터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를 중요한 경건생활의 덕목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구제는 다른 사람을 향한 영성을 나타내준다고 여겨졌습니다.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쩨다카라고 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구제를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함께 가르칩니다. 그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웃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웃으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영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져서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 3번씩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금식은 자신을 향한 영성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행위가 바로 금식입니다. 유대교에는 금식의 절기가 따로 정해져 있지만, 이 외에도 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했습니다. 이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간 날(목요일)과 내려온 날(월요일)을 기념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은 경건생활의 덕목 이 세 가지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6:1~18). 그래서 유대인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이것들을 다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꾸짖으신 것은 구제, 기도, 금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동기를 꾸짖으신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경건생활들이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벤트처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꾸짖으신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이 세가지는 모두 철저한 ‘자기부정’(포기) 정신에 기초한 덕목이자 경건의 생활이었습니다. 구제는 자기 소유를 포기해야 가능하고, 기도는 자신의 뜻을, 그리고 금식은 자신의 육체적 신뢰를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렇게 자기를 부정하고 포기해야 하는 경건생활의 덕목을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이벤트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구제도 기도도 금식도 모두 자신을 꾸미기 위한 장식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삼은 외식하는 신앙인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은 보이기 위한 이벤트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을 자꾸 이벤트화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알리고, 인정받고, 과시하기 위해 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이 옛날에 변해갔던 과정을 교회도 거쳐가는 거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금식(禁食)에 대한 말씀입니다. 금식은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삶에 필요한 다양한 것들을 일정기간 고의로 절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금식은 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금식을 히브리어로 ‘춤또는 촘’(צוּם)이라고 합니다. 이는 ‘(입)을 덮어씌우다.’는 뜻이다. 여기서 ‘애통하다,’, ‘슬퍼하다.’, ‘괴롭게 하다.’는 뜻이 나왔습니다. 또한 ‘아나 네페쉬’(אנה נפש)라고도 한다. ‘자기의 영혼을 괴롭히다.’는 뜻이다. 내적 갈등과 고민을 보여주는 ‘슬픔과 괴로움’이 이 두 단어의 공통적인 이미지입니다. 헬라어도 비슷한데, 금식을 헬라어로 ‘네스티스’(νηστις=νη+εσθιω)라고 합니다. ‘먹지 않는다.’, ‘먹을 수 없다.’는 뜻이다. 슬픔 때문에 괴로움 때문에 먹을 수가 없는 겁니다.
금식에 대한 구약의 언어 히브리어나 신약의 언어 헬라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것은 슬픔과 괴로움을 촉발시킨 동기가 ‘먹지 않음’(금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금식이 본문에서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생명회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6). 이를 종합해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금식은 회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금식이 회개를 동반하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레16:29~31, 삼상7:6, 삼하12:16,17, 욘3:5~8, 슥8:19 등). 금식이란 하나님께만 집중하기 위해 생존의 조건인 먹고 마시는 것까지 끊는 것입니다. 먹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만나기 위한 우리의 절박한 추구를 표현하는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박하니까 결박과 멍에가 끊어지는 생명의 회복이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적 차원과 회개를 넘어서 금식을 관계적인 차원(사회적 책임)으로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1요4:20, 5:1,2).
흔히 우리는 ‘좋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이 말이 통하지 않는거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배가 얼마나 좋고 중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예배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가증하게 여기시고, 하나님께 견디기 어려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사1:1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드려야 하나님이 그 찬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려야 그 기도를 받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찬양을 하고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외면하여 듣지 않으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사1:15).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식은 경건생활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본문 5절을 보면 ! “......그의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금식도 할수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금식하고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할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을까? 본문을 통해 두가지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하나는 ‘풀어주는’(자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눠주는’(사랑)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6).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7).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특히 굶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고 말합니다. 노숙자 사역 이야기.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는’ 삶이 참된 금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약의 마태복음 5장 25절에서 나오는 〈양과 염소〉이야기에서 나오는데,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 찾아보는’ 것이 참된 금식이라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금식의 정신은 종교적인 의례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한 편에서는 독초인지 알면서도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자녀에게 그 독초를 먹일 수밖에 없는 부모가 있고, 설사약 하나를 먹지 못해서 수 초(秒)마다 죽어가는 많은 아이들이 있다. 손으로 만지지도 못할 더러운 물을 마시고 기생충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의 손을 내미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입니다. 지독한 가난이라고 하는 멍에, 질병이라고 하는 사슬에서 해방시켜주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자녀로 삼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할수 있는대로 이웃을 어려운 처지에서 구해내는 것입니다.
굶고 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아픈 사람을 찾아가 위로하는 것입니다. 잠언서에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19:17)고 했고, 또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가난한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주님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돌보는 것이 주님을 돌보는 것이고,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들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잘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드리는 금식이라야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금식이라는 의미입니다. 금식을 하되 금식의 정신이 생활 속에 배어들게 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하는 핵심입니다. 또한 이것은 신앙생활의 핵심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영역은 사실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서 사람의 마음에 관한 영역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칼보다 사람을 많이 죽이고 있는 것은 총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독한 말인거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이걸 많이 경험하셨을 겁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경험한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결박을 풀어주고 자유케 해준다면 그것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것은 말을 통해 들어주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의 말, 자비로운 말, 그 말과 함께 그 사람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줄 때 그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들이 있습니다. 8절에서 1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다른 책을 보니 성경에서 하나님의 복이 이렇게 무더기로 표현된 부분을 성경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금식의 정신이 생활에 베어들게 하는 사람, 즉 신앙이 생활 속에 베어들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보물창고를 열어두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금식을 영어로 ‘Fast’라고 하는데, 기본적인 뜻이 ‘빠른’, ‘빨리’입니다. 빨리 응답해준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태도로 사는 삶, 그리고 그것과 함께하는 금식은 강력한 믿음의 무기이고, 축복의 통로라고 할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주변 작은 곳에서부터 가족부터 또 작은 자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아래 거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