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 마르 13,24-32
연습 없는 우리 인생
교회 전례의 주기는 12월 초, 대림 첫 주일에 시작하여 그 다음 해 11월 말,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끝납니다. 전례주년이 끝나가는 시기, 곧 오늘과 같은 날에는 미사에서 복음으로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유대인이었고, 그들이 세상 종말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은 당연히 유대교 묵시문학의 언어를 상기합니다. 묵시문학은 기원 전 2세기 유대인들이 만든 문서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 문헌에 익숙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세상의 종말을 말할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그 문헌의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세상의 종말에 큰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입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등이 모두 유대교 묵시문학의 주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미래가 가깝다는 사실을 말하는 주제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봅니다. 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세상 종말의 ‘시와 때’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씀하셨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기원 후 66년,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전쟁은 4년 뒤, 유대인들의 완전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들의 수도 예루살렘은 폐허로 변했고, 예루살렘의 성전도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유대인들의 참패와 예루살렘 및 성전의 파괴를 겪으면서 그것이 세상의 종말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느님이 주시는 새로운 미래를 보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려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며, 건강식품과 보약을 먹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의 지혜와 노력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려 합니다. 그것을 잘하는 사람을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미래를 살자는 운동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신앙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입신양명하여 재물과 권력을 얻어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이 다가 올 때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라고 기도하며, 하느님이 원하시는 미래가 당신 안에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초능력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열려라 참깨!’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고 인간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일만 실천하며 살았던 생명이 겪는 종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곧 자기의 현세적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이 세상은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참다운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 | | ⓒ박홍기 |
하느님의 일만이 세상과 시간을 넘어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던 대자연에 아름다운 단풍이 들더니 어느덧 낙엽되어 떨어지고, 우리의 발에 밟힙니다. 우리의 삶도 늘 푸르지만 않습니다. 단풍도 들고, 낙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소중히 생각했던 우리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삽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신 그만큼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고, 명예를 얻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대 과업이나 보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선한 시선과 몸짓, 조금 더 관대하고 자비롭고, 사람을 살리는 몸짓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도 없고, 하느님에 대해 논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관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찰하고 논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나의 나라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내가 구상하고 내가 실현하는, 나의 미래만이 내 인생의 최대 보람이라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미래는 나에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실현하는 나의 미래를 축복이나 하고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내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힘으로 보장하겠다는 환상을 버리고, 하느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미래를 찾아 나서라고 권합니다. 그것은 나 한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나 한 사람을 치장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예행연습이 없습니다. 한 번 주어진 삶입니다. 한 번 하는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부부가 되는 것도,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도 모두 예행연습이 없는 모험입니다. 인간이 하는 소중한 일들은 모두 이렇게 연습도 없이, 준비된 대사도 없이, 보장된 것도 없이 감행해야 하는 모험들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면, 헛되고 헛된 모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사는 일도 하나의 모험입니다. 우리가 보고 확인할 수도 없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그 모험의 결말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하느님이 주실 미래를 택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현재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삽니다. 하느님이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사는 사람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하실 자비로운 일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빕니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기에 우리에게는 어려움, 곧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도 그리스도신앙인인 우리는 압니다. 그것이 자녀인 우리가 하느님의 자유를 사는 길이고, 또한 하느님의 미래를 우리 안에 영접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희망할 수 있는 마지막
하루를 살아가면서 내일 뭐해야 하고, 다음 주까지 무엇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은 참 많이 하지만,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할지 상상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당연하게 맞이할 순간이고 피할 수 있는 때가 아님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일이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현실이 분주하고, 지금의 고민으로도 충분히 바쁘기에 그런 일은 말 그대로 먼 미래의 일로 여깁니다. 혹은 어떤 사람에게는 막연한 두려움이나 그저 피하고 싶은 마음에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는 일을 싫은 일이 됩니다. 이유가 어떠하든 우리는 분명히 찾아올 그때, 어찌 보면 지금보다 더 중요한 그 순간을 전혀 준비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라고 해서 마지막 순간을 자주 의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다음 주까지 보내야 할 원고 때문에 신경이 쓰이고, 오늘 급하게 참석해야 하는 회의나 모임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직 살아온 시간만큼 살아갈 날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일상에서 전혀 의식하지 않으며 매일을 맞이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각자의 마지막 순간, 하느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갈 그때는 분명 현실이고 시나브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언제일지,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물론, 몇 가지 상상해 볼 수 있는 장면도 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나 할머니, 혹은 다른 이웃 어른들의 마지막 순간을 알고 있기에 똑같지는 않아도 나도 그런 모습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란 사실 말입니다. 그때 우리 몸과 마음에는 어떠한 변화들이 먼저 올 것입니다. 조금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고 아주 천천히 찾아올 수도 있지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면, 하느님을 만날 순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 개인의 삶을 놓고 보면 이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흐름입니다. 하지만 무섭기도 하고 피하고 싶으며, 이러한 이야기가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일을 불편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요?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반드시 맞이해야 하는 그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런 방법을 듣게 된다면 우린 정말 다행이고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 | | ▲ '세상의 종말, 묵시록', 루카 시뇨렐리.(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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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바로 그 사실을 전해 주는 말씀입니다. 물론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의 마지막 순간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관한 말씀이지만, 그것이 개인적 차원이든, 온 우주적 차원이든 우리가 ‘무섭지만 피할 수 없다’는 그 모순적 상황을 극복하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십니다. 복음은 독특한 문학 양식인 묵시문학적 표현을 통해 그 마지막 순간의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르 13,24-25)라는 표현은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암시적으로 그리고 있기에 이를 두고 우리가 영화의 예고편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맞이하게 될 세상 마지막 순간을 소개해 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순간으로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7)하고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창조로 장엄하게 시작한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는 성자의 재림으로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는 반드시 찾아올 그 마지막 날이 공포와 두려움의 순간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상 완성의 순간임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렵지만 피할 수 없는’ 그날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멸망으로서의 종말이 아니라 완성으로서 구원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복음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이든, 이 세상의 마지막 때든 우리는 알 수 없는 그때를 두려워하고 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알지 못해 불안하고 무서운 그때를 우리의 주님과 함께 마무리 한다는 사실을 복음으로 먼저 들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 그때는 찾아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마르 13,28)는 것처럼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우리가 먼저 깨닫고 준비할 수 있기를 바라시고 그때에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님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듣지 않은 사람들처럼 공포와 두려움으로 그날을 피하는 사람들이 아닌, 희망과 기대 속에서 적극적으로 그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 마지막에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 32)고 이야기 합니다. 천사와 예수님도 모른다는 그때를 어떻게 인간이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와 시간을 구체적으로 특정해서 말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종종 들리는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거짓말에 속지 말고 우리는 복음이 전해 주는 위로 안에서 오늘의 하루를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님
[생활 속의 복음] 진정한 영웅들
지난 한 달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강론 중에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말은 하지 않고 복음에 충실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역사 교과서 문제는 관계자와 학자들의 충분한 협의를 거쳐서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하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다양한 관점으로 역사를 서술해 자유, 정의,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대한민국의 민주 시민을 양성하겠다는 환희의 소식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외침은 메아리가 돼 돌아왔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헌법 1조 1항과 2항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물론이고 초등학생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얼마나 멋지고 정확하게 민주주의의 기본을 규정한 내용입니까!
국민의 뜻으로 국민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출발점이라 하니 정말 좋습니다. 이번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보면서 그런 기본이 소수에 의해, 정치적인 이유로 외면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어두운 터널을 들어서는 느낌은 저만의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칠레의 피노체트, 우간다의 이디 아민, 리비아의 카다피 등이 생각납니다.
너무나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으며 희망을 품어보려 합니다. 민족 간의 갈등, 신분ㆍ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점을 해결한 옛사람들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먼저 관심이 가는 영웅은 기원전 8세기 인물로 추정되는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입니다.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평민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전쟁에만 집중했던 민족을 빈부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조카인 칼리라우스 왕을 도와 28명의 원로원을 선출해 공화정을 실시했습니다. 토지 분배제도로 빈부의 차이를 없애고, 사회적 범죄이자 병폐인 교만, 시기, 사치를 근절했습니다. 마을이나 소규모 공동체의 공동 저녁 식사 제도를 만들어 대화와 나눔의 문화를 정착시켰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문자로 법제화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정치적 권력을 나눴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 평민으로 태어나 훌륭한 덕을 토대로 왕으로 추대된 누마 폼필리우스가 있습니다. 로마의 창건자인 로물루스가 갑자기 사라지자 여러 악성 소문들 때문에 로마 족과 사비니 족으로 구성된 공동체는 분열과 파괴의 위험에 처합니다.
그런 위기에 등장한 인물이 사비니 족 출신이며 시골에 살고 있던 바로 누마입니다. 그런데 그를 왕으로 추대한 세력은 사비니인들이 아니라 로마인들이었습니다. 두 민족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그는 모든 계층과 민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왕 주변에 있던 호위 군단을 해산시켰습니다. 또 길드(상공업자 조합)와 노동조합을 구성해 민족 간 계층 간 조화를 이루도록 했습니다. 그는 전쟁의 시대를 종결시키고 평화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군중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그리스도인) 헌법 제1조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실천 기준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다른 조건이 덧붙여질 수 없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므로, 다른 종교를 믿기 때문에, 피부색이 달라서, 다른 취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등의 조건을 내세우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제직, 예언직, 왕직은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으로 정리됩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처럼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날 것입니다(다니 12,3). 좌절하지 말고 함께 어둠을 극복합시다. 사랑으로 빛이 됩시다. -박재식 토마스 신부님
[아! 어쩌나] 318. 착하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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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교우 중에 심성은 착하신데 성격이 아주 완고한 분이 계십니다. 본당 신부인 제게는 잘하시는데 아랫사람들에게는 아주 엄해서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와 단둘이 있으면 아주 어려워하시고 제 눈치를 보시기도 해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왜 그러시는 건가요?
답: 대개 그런 분들은 어린 시절 아주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서로 웃음을 교환하고 편안한 감정을 교류해야 하는데 눈치를 보거나 혹은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성장 과정이 그리 좋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가정 교육을 잘 받았다는 것은 부모와 자식 간에 감정적 교류, 대화의 시간이 많은 것으로 알 수 있는데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전혀 없었거나 혹은 자식의 잘못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노여워하였을 경우 아이들은 대개 눈치꾸러기가 됩니다. 부모의 표정을 살피고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한 신경증적인 어른이 된다는 것입니다. 윗사람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사람들,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은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윗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성장이 멈춘 신경증 장애인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고지식할 정도로 착하게 사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들이 가진 도덕관이 어른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수준의 도덕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마치 엄마에게 야단맞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이런 분들은 자신들이 가진 도덕적 자아가 아주 잔인하거나 혹은 아주 엄하고 쌀쌀맞습니다. 내가 나를 감시하는 자아가 너무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 안의 초자아도 성장해야 하는데 너무 지나치게 엄한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초자아 성장을 막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자기가 자기를 왜 싫어하겠는가 반문할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고 끊임없이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고 자신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혐오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 초자아를 하느님께 투사해서 하느님이 자기를 싫어하시고 심지어 미워하셔서 절대로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공포스러운 종말론이 주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죽어서 하느님으로부터 처벌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희생을 많이 하는데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이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의 눈치를 보면서 하므로 겉으로는 신심이 두터운 사람으로 보일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분들은 어떤 묵상을 해야 하는가? 몇 가지 묵상 자료를 올립니다. 지금까지 내가 진실로 사랑한 것은 무엇인가? 부모님이 좋아하신 것이 아닌 자신이 좋아한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대개 이런 분들은 자기 욕구를 혐오시하고 억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더 높은 차원으로 가도록 이끌어준 것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혹은 내 영혼을 감옥 안에 가둔 것은 누구인가? 언제부터 왜 그랬는가? 내 마음에 기쁨을 준 것은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기분이 좋은가? 혹은 무엇을 가졌을 때 즐거운 마음이 드는가? 살아오면서 몰입한 것이 무엇인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빠져든 것은 무엇인가? 만약 그런 것이 없고 그런 적이 없다면 언제부터 왜 그런 것인가?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은 자신에 대한 것인데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자기 안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에너지를 자기 인생을 만드는 데 사용하지를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교황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18. 제4장 - 통합의 생태 ① 생태의(자연) 환경요소, 경제요소, 사회요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상호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재앙은 두 개의 별도의 재앙, 환경의 재앙과 사회의 재앙이 아니라 하나의 재앙이다.
맑은 정신으로 우리의 공동 가정(하늘, 땅, 물, 생명, 사람, 사회,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은 보면 가히 ‘재앙’(위기)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회칙 제1장). 교회는 인류가 제기하는 고뇌에 찬 물음에 응답할 사명을 가진다. 하느님께 대한 교회의 신앙 때문이며(제2장), 게다가 “인류를 자멸하지 않도록 보호해야”(79항) 하기 때문이다.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회칙은 ‘십자로’에 도달한 인류가 가야할 길을 찾는 대화와 토론에 협력을 아끼지 않으려 한다. 교종은 재앙의 근본원인으로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는 무차별적이고 일차원적인 과학기술주의와 과도한 인간 중심주의를 꼽으며, 실천적 상대주의와 고용의 문제, 새로운 생물학적 과학기술의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그 윤리적 함의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뜻을 밝힌다(제3장).
이제 회칙은 재앙에 직면한 인류가 가던 무모함의 길을 잠시 멈춰 통합의 생태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제4장). ‘생태’라는 용어 그 자체로 이미 ‘통합’이란 의미를 담고 있음에도, ‘통합’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재앙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접근 방식이 단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경계하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다. 하나의 (통합) 생태는 (자연) 환경,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의 요소들을 갖고 있는데, 이 요소들은 불가분의 상호 작용을 하며, 인간 차원과 사회 차원을 분명하게 존중한다. 회칙이 강조하는 것을 요약하면서 우리 모습을 성찰한다.
생태의(자연) 환경 요소 : 자연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작용뿐만 아니라, 사회의 체계들(경제, 행동양식, 실재를 파악하는 방식들)과 자연계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고려해야 한다. 자연은 사회와 분리될 수 없으며 단순히 사회의 무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자연을 구성하고 있으며,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자연 생태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연) 생태계라는 실재를 기반으로 해서 살고 행동한다(139-40항 참조).
생태의 경제 요소 : (자연) 환경 보호는 발전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발전 과정을 통합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생태는 경제의 요소를 지니게 된다. 또 그 때문에 경제학은 경제 성장만을 위해 절차를 단순화하고 생산비용을 줄이고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상이한 여러 지식들을 함께 고려하는 인본주의를 따라야 한다. 즉 사람과 사회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경제가 되어야 한다(141항 참조).
우리도 어떤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환경영향평가라는 것을 시행해야 한다. 회칙은 이를 ‘환경충격평가’라고 부른다. 회칙은 이 충격 평가를 위해 연구자들의 합당한 역할, 다양한 연구의 상호 작용 촉진과 폭넓은 학문적 자유 보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의 이 환경충격평가는 대부분 ‘경제적 관점’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표적 사례로, 4대강 사업, 동계올림픽 경기장 건설, 핵발전소 건설, 케이블카 사업 따위를 들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경제 발전에 ‘유용’하다고 하더라도, 자연 환경이 갖는 본래의 가치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윤리 요소’를 고려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실정이다.
생태의 사회 요소 : (자연) 환경과 사람의 삶의 질에 중요한 결과를 낳는 것은 사회 제도이므로, 생태는 필연적으로 사회(제도)의 요소를 갖게 된다. 가정에서부터 국제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제도는 인간관계들을 규정하므로, 중요한 것은 모든 사회 ‘제도의 건전성’과 ‘유효성’이다. 낮은 수준의 건전성과 유효성(제도의 불안정함)은 불법의 일반화를 불러오는데, 회칙은 특히 이를 우려할 만한 현상으로 제시한다. 낮은 수준의 제도적 유효성은 소수에게는 혜택을, 절대다수에게는 고통을 안겨주고, 불법과 탈법의 일반화는 사람과 사회와 자연을 지속적으로 황폐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42항 참조).
대표적 사례로 최근의 ‘노동 개혁’을 들 수 있다. 노동 개악이라는 비판을 받는 배경에는 제도의 건전성과 유효성에 대한 경험상의 회의가 자리하고 있다. 소수 기업의 경제적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절대다수 노동자의 삶의 질을 황폐화시킬 것이라 우려하는 것은 지난 수십 년 우리의 노동 정책(제도)이 (대)기업 편향적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노동 개혁이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명분을 내세워 또다시 ‘노동’과 ‘사회’의 희생(양보)을 제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그 제도의 불건전성 때문이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
2015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다니12,1-3 히브10,11-14.18 마르13,24-32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연중 제33주일, 교회력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쏜살갈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대림에 성탄시기가 어제인 듯 했는데 벌써 전례력으로 한 해도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참 어수선한 세상입니다. 도대체 인류의 진보가 가능한지 묻게 됩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악순환의 반복되는 야만의 역사입니다.
어제는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 다발 테러로 127명이 사망했고 프랑스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서울 광화문 한 복판에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이후 10만의 최대인파가 운집하여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들은 집회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노동개혁에 반대하고, 청년실업 문제, 쌀값 폭락, 빈민 문제 등의 해결책 마련을 요구했습니다.
모두가 절박한 요구들입니다. 둘 다 종말의 표징들처럼 불길한 느낌이 드는 사건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하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심각하게 자문하게 됩니다.
세상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모두 오늘 복음의 무화과 나무의 비유처럼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우리의 문 가까이에서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역사를 잊었기에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만 반복되는 역사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늘 새롭게 역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회개한 이들의 공통적 물음이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 셋으로 귀결됩니다.
첫째, 참되게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참된 삶, 진실한 삶입니다. 하느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려가는 믿음의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로 바치시고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변호하고 계십니다. 하여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진 우리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기에 비로소 참되게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새롭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을 때, 주님의 말씀과 하나되어 살 때 참된 삶에 튼튼한 영혼이요, 두려움도 불안도 사라집니다. 깊은 안정과 내적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희망이 있을 때 착한 삶, 선한 삶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미래요 희망이 될 때 항구하고 충실한 삶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평화와 기쁨이 뒤따릅니다. 희망을 잃어 절망할 때 저절로 거칠어지고 악해지는 심성입니다. 새삼 희망과 선善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이 우리의 희망을 붇돋아 줍니다.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끝은 시작입니다. 죽음은 새생명의 시작입니다. 현세의 삶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이 새롭게 시작됨을 보여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 역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 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신화적 표현안에 담긴 주님의 진실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런 궁극의 희망,하느님이 계시기에 늘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셋째,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할 때 아름다운 삶입니다. 사랑을 하며는 예뻐진다는 대중가요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갈림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윤을수 신부님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하느님’과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진정 항구히 사랑할 때 행복한 삶이요 아름다운 삶입니다. 하여 며칠간 수녀님들께 고백성사 때 드린 보속에 만족했습니다.
“피정기간 동안, 늘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이것이 보속입니다.”
자화자찬 같지만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보속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낼 때 저절로 깨끗한 마음에 아름다운 삶이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 말씀도 하느님을 더욱 사랑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궁극의 종말의 날은 하느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오늘 지금 여기서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내일 세상이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어느 현자의 말처럼,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않고 평상심으로 오늘 지금 여기를 살며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신망애信望愛 향주삼덕向主三德과 진선미眞善美의 삶이 일치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1.믿음으로 참되게 살아야 합니다.
2.희망으로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3.사랑으로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신망애信望愛의 하느님, 진선미眞善美의 하느님입니다. 이런 삶 자체가 하느님을 닮아 존엄한 인간 품위의 삶이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신망애의 삶을, 진선미의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시편73,28).
아멘.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7)
The coming of the son of man 희망 속에 하느님을 찾아가는 모험
기원 전 2세기부터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들, 박해 등의 묵시문학의 표현을 애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시대 유대 묵시문학의 언어를 빌어 세상 종말에 대해 전해줍니다(13,24-27참조). 나약한 인간에게 불확실한 미래와 종말은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하는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3장 서두에서 로마 정치권력과 유다 종교권력이 결탁하여 드러났던 타락과 불의를 거침없이 비판하시며 종교권력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의 몰락을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13,31) 하고 말씀하십니다. 곧 세상 권력과 부, 세속적인 유혹들에 맞서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결코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기존 질서의 붕괴, 인간 욕망이 만들어낸 불안한 미래는 하느님 안에서 희망의 표지로 바뀝니다. 우리는 이 희망을 수난을 받고 죽으시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선포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욕구충족과 소유에 매여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거나, 자기 힘으로 미래를 보장하려 하고 자신이 정한 기대치에 도달하려고 몸부림칠수록 실망이 커가고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오로처럼 박해를 받으면서도 모든 일을 하느님 손 안에 미래를 맡길 줄 알아야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인생을 허비하며 지냅니다. 그러나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서 드러났듯이 우리가 하는 걱정의 97%는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지금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실행하기에도 턱없이 시간이 부족한데 근심 걱정과 탐욕 때문에 불안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닥칠까봐 각종 보험에 가입하고, 많은 돈을 저축해놓고도 좋은 일에 쓰는 것에 인색하며, 건강 걱정 때문에 건강보조식품을 챙겨 먹느라 신경을 쏟는 것은 자기만의 헛된 성전을 짓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회적으로 출세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능력을 키우고,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고 자신을 알리는데 많은 시간을 쓰며, 자기 힘으로 안전한 미래를 확보하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신앙인은 인간의 시선이나 기대, 세속의 가치나 재물에 집착해 헛된 성전을 세우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참 희망이며,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 안에 우리의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죽는다면 이미 우리는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있는 참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세상과 시간을 넘어 영원히 존속하기에, 우리는 늘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그분의 눈으로 모든 피조물과 다른 이들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종임을 기억하고 그분께 희망을 두며, 주님께서 부르시고 주시는 미래를 향해 길을 떠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순례는 사랑과 정의의 성전을 세우기 위한 모험입니다.
무화과나무의 가지와 잎의 변화를 보며 여름이 옴을 알아보듯 (13,28) 영의 눈으로 시대 징표를 읽어, 나 자신과 교회공동체, 그리고 이 사회 안에 자리 잡은 헛된 성전을 과감히 허물 때 하느님의 ‘영원한 현재’를 살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지만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두려운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희망의 선물로 다가올 것이며,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누리는 형제애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그림으로 보는 복음묵상] 생명의 신비 | | | |
엄마!
사람이 죽으면 하느님이 생명을 빼앗아 가는거야?
아니란다.
없어지는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주시는 거야.
세상 것은 시간이 지나면 썩어 없어지지만
영원한 것은 변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단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임의준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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