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부터 계속 같은 꿈이다. 이번에도 백혈구들을 피해 달리다 보면 또 그녀가 오늘은 더욱 썩은 얼굴로 날 지켜보고 있겠지...
.....흐흐흐흐흐흐흐흐흐......빨리와...빨리와...
멀리서 다시 예의 그 흐느낌과도 같고 울음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저편에 흰색 원피스 차림의 그녀가 보이기 시작한다.
"으으으..."
성진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온다. 이제 더이상은 싫다.
.....흐흐흐흐흐......빨리와....빨리 오라구.....
어느덧 그녀와 몇미터 간격으로 가까워졌다. 다시 그녀가 고개를 든다. 점점 썩어서 이제 광대뼈가 드러나는 얼굴이 보인다. 눈알은 모두 썩어서 이제 기분나쁜 누런 진물이 흐르는 퀭한 구멍만이 남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성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안돼...안돼...."
성진이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고 한다. 순간 그녀가 뒤로 솟아오르며 멀리 날아간다. 성진이 눈을 크게 뜬다. 다시 달리고 싶지만 이제 온몸이 덜컥 멈추어 움직이지 않는다. 아까까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미친듯 달리던 몸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어떤 강한 힘이 아까까지 그를 달리게 했다면 이번엔 움직일 수 없게 잡고 있다.
성진이 안타까워할수록 그녀는 그를 노려보는(노려보고 있다고 생각되는..)눈에서 썩은 물을 흘리며 더욱 멀리 날아갈 뿐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곳에서 희미한 웃음소리와 함께 멀어져만 가는 그녀의 저주의 음성이 들려온다.
성진은 고개를 내저으며 벌떡 일어났다. 캄캄한 자신의 자취방 안이었다. 시간이 꽤나 늦었다. 그날부터 지겨울 정도의 같은 꿈이 반복된다. 미친듯이 머리를 감싸쥔 채 소리를 질러대는 성진...
"더이상은...더이상은 안돼!"
고함을 지르는 성진....갑자기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뚝 멈추더니 성진은 고개를 아래로 숙인다. 적막이 어두운 방을 감싼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성진...
어느순간 그의 입가에 냉소가 감돈다.
"빨리 끝내야지....안그래?"
그의 올라간 입꼬리에서 마치 누군가에게 묻는 듯한 섬뜩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다시 준비를 시작한다.
16. 편집증
수혁의 머릿속에 아직까지 노인이 남긴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악기에 새겨져 있던 붉은 글자들...일단은 별개의 사건이기 때문에 자신이 굳이 현장에 가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목을 잘랐다는 수법이 비슷했고 그외에도 어딘가 모르게 자신이 맡은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부르짖음이 수혁의 마음속 한구석에서 계속 울려오고 있었다. 결국 수혁은 사건담당 김형사와 함께 그곳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생각같아서는 노인의 말대로 악기들을 다 부셔버리고 싶었지만 증거물보존을 위해 박성진을 검거하고 그에 대한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부술 수 없었다.
임수민이 매장되어 있던 곳 바로 위에 시체는 놓여 있었다고 했다. 부검소로 옮겨진 시체는 끔찍한 살해방법 외에는 다른 특별한 사항이 없었다. 다만 목이 잘리는 방법이 비교적 깔끔했던 다섯 명의 시체들과 달리 이 시체는 목을 자르다 못해 거의 찢어버렸다는 것(아마도 목에 칼을 꽂은 뒤 천천히 칼을 돌리다 목을 베어버린 듯했다.), 그리고 온몸의 팔과 다리를 잘라 오른쪽, 왼쪽 위치를 바꿔 놓은 것이 다른 시체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동일범의 소행으로 가정한다 해도 특이한 부분이었다.
시체의 사진들을 바라보던 김형사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으으..끔찍하군..."
"..."
말없이 김형사에게서 사진을 넘겨받아 응시하는 수혁. 그의 마음 속에서 박성진이라는 편집증 환자의 비중이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씹어뱉듯 그가 입을 열었다.
"살해수법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더욱 잔인해져가고 있어."
"음?"
"그리고 얼마전 발견된 다섯명의 시체가 죽은 뒤 범행이 길지 않은 간격으로 이루어졌어...또한 누군가 시체를 매장시킨 장소에서 같은 범행이 이루어졌지. 한편 죽은 사람은 수민이 매장되어 있던 곳에 누워 있었어. 이런저런 점 등을 비추어보면 물론 다른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이건 그제 발견된 다섯명의 시체를 만들어낸 사람의 소행 같네...""
수혁의 말에 김형사가 물었다.
"그러면 자네가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는 그 학생 말이야?"
"이렇게 보통 시체를 토막내는 것도 아니고 가지런히 왼쪽과 오른쪽 팔다리를 잘라서 진열해놓을 정도면...보통 정신병자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짓이야. 예전에 편집증 환자에 대한 정보를 잠시 찾아본 적이 있는데...억눌린 욕망이 클수록 한번 분출되기 시작하면 끝없이 퍼져나간다고 하더군...그리고 나름대로의 합리화 이유를 붙이는 거야. 그 이유는 여러 방향으로 형성되지...특히 그녀석같은 경우엔..."
한숨을 쉬며 수혁이 말을 끝맺는다.
"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아. 그 오유진이란 여성에 대해서 말이야...아마 환상속에서 만들어낸 오유진의 귀신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다섯명을 죽이고...그자리에서 또 한명을 죽이다니...내생각엔..앞으로 계속 또다른 희생자가 발생할 소지가 있어. 젠장...빨리 그놈을 잡아야돼. 그리고 죽었든 살았든 유진이란 여자도 찾아야 하고..."
17. 증거물
성진은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믿을 만한 법의학자의 자문까지 얻어(수혁이 한 말과 거의 비슷했다.) 금번 사건이 나머지 다섯명의 살해 사건과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심증을 얻은 강력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여섯명째의 살인...더이상 피해를 막기 위해 그 미친놈을 빨리 잡아오라는 반장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경찰들은 성진의 집과 학교 및 평소에 자주 다니는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행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자취방 안에 어제까지 집안에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성진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강의를 들었다는 강의실의 공대교수 및 학생들도 강의시간 중 성진이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뭔가에 쫓기듯 달아나버렸다는 말 뿐이었다. 두 팔과 목이 잘린 시체가 수민이 매장된 곳에서 발견된 날의 일이었다. 성진의 살인사실을 알 리가 없는 한 학생이 수혁에게 물었다.
"그냥 착한 녀석인줄만 알았는데...그런 편집증을 앓고 있었다니...의외네요. 그런데 그녀석이 무슨 짓을 한거에요?"
한편 수혁의 주장으로 다섯명이 매장된 곳 부근에 형사들이 잠복했다. 어쨌든 정신병자의 행동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수민이 묻힌 곳에서 또다른 범행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해 볼 때 또다시 그곳 주변에서 범죄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형사들이 잠복하는 동안에 수혁은 성진이 자취한다는 옥탑방을 다시 찾았다. 뭔가 찾아볼 게 있었기 때문이다.
딩동~
"네 누구세요?"
"예 연락드린 정수혁 형사라고 합니다."
"기다리세요.."
수혁은 아주머니의 안내를 따라 3층집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창고같아 보이긴 하지만 그나마 깨끗한 옥탑방 건물이 얌전히 세워져 있었다.
"저기가 그 총각 자취하는 방이에요. 항상 예의도 바르고 착한 총각이었는데...왜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며칠전 밤에 말도없이 나가서 아직까지 안들어왔어요. 에휴...대전에선가 맨몸으로 올라와서 아르바이트하면서 학비까지 버는 성실한 총각이었는데.."
아주머니께 감사하다고 말한 뒤 수혁은 옥탑방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크지 않아서 낮인데도 방안은 어두컴컴하다. 수혁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것저것 복잡한 잡동사니들이 방구석에 굴러다니고 창문 아래 컴퓨터가 놓여 있다. 컴퓨터 아래 설치된 키보드가 눈에 띈다.
"키보드라..."
dirty와 약쇼...모티브는 키보드였다. 용의자가 가지고 있었던 키보드는 중요한 증거품이 될수도 있었다. 수혁은 성진이 쓰던 키보드를 집어들었다. 어디선가 비린내가 나는 것 같다.
"음? 뭐지?"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젓는 수혁은 혹시 뭔가 또다른 단서가 될 게 없을까 하여 주위를 둘러본다. 컴퓨터, 책상, 작은 책장, 책장에는 이런저런 많은 책들이 끼워져 있다. 대부분 음향시스템 조정에 관한 책이다. 성진이 엔지니어 쪽에 상당한 실력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정신은 이상해도 꽤나 잘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수혁은 책장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진이 평소에 잠을 자는 듯한 매트리스가 놓여 있다. 비닐로 싸여 있는 매트리스는 주인이 평소에 꽤나 뒤척여대는 듯 움푹 들어가 있었다. 매트릭스를 지나치는 수혁의 눈에 이상한 뭔가가 잡혔다.
매트리스 구석에 급히 치우다 미처 지우지 못한 붉은 흔적이 보였다.
"이...이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자국이었다. 바로 소극장에서 자신이 최초로 탐문 수사를 벌일 당시 발견했던 흔적..그것과 비슷했다. 수혁은 매트리스 옆에 키보드를 내려놓았다. 떨리는 손으로 매트리스에 다가가서 그 흔적을 살펴보려고 매트리스에 손을 대는 수혁...그때 주변에서 알 수 없는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수혁은 흠칫하며 매트리스에 대고 있던 손을 뗐다. 매트리스에 손을 대는 순간 엄청난 현기증이 몰려오며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기 때문이다. 수혁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눈을 크게 뜨며 수혁은 매트리스로 눈을 돌렸다.
"뭐...뭐야..."
수혁은 고개를 흔들며 다시 그 붉은 흔적을 살펴보았다.
......죽고싶어?...............
다시 그 소리가 수혁의 귀에 천둥처럼 울려왔다. 잘못 들은게 아니었다. 그 소리는 매트리스를 자세히 살펴볼 때마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수혁의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수혁의 몸이 떨린다. 어느 순간부터 뭔가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원래 수혁은 겁이 많진 않았다. 그렇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어나가면서 뭔가가 수혁의 기를 빼앗아가는 듯 수혁은 작은 일에도 심하게 놀라고 지나칠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수혁의 손이 떨리며 허리춤의 권총을 향했다. 권총을 빼드는 순간 수혁은 고함을 지르며 뒤로 돌아섰다.
"손들어!"
몸을 돌리며 뒤의 뭔가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권총의 총신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만...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수혁의 눈이 다시 커졌다. 분명히 뭔가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는데... 그때...
............히히히히히히히...........
어딘가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구석에서 들려오는 듯하던 소리가 주변으로 퍼져나가더니 수혁의 온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수혁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기분나쁜 느낌이 머릿속에서 점점 커져 공포로 다가왔다. 아무도 없는 꽉 막힌 옥탑방 안에서 어떤 빠져나올 수 없는것에게 사로잡힌 것 같다는 공포...눈앞에 살인마가 직접 서있는다 해도 이런 알 수 없는 공포 따위와는 비교가 안될 것 같았다. 몸에 점점 힘이 없어진다. 후들거리던 다리가 점점 풀려 힘이 빠지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져왔다.
....히히히히히.......
"에잇....!"
수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을 잃어선 안된다. 살인마의 소굴에서 기절했다가는 나중에 놈이 돌아왔을 때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매트리스 옆에 내려둔 키보드를 챙길 여유도 없이 수혁은 옥탑방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쿠당탕!
수혁은 문을 부수듯이 박차고 달려나왔다.
"휴우...."
고개를 내저으며 수혁은 자신이 방금 도망나온 옥탑방을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복잡한 사건에 증거물을 뒤지러 들린 이 방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수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방을 벗어나자 귀를 터뜨릴 듯 귓속을 후벼파던 웃음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다시한번 그 옥탑방 건물의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빨리 다시 들어오라는 듯이 큰 입을 벌리고 있는 방문이 보였다. 수혁은 치를 떨었다.
"이런데에 사니까 정신이 나갈수밖에 없지....제길..."
수혁은 고개를 흔들며 옥상에서 내려갔다. 그런 수혁의 뒷모습을 옥탑방 건물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18. 6. 27 저녁 12시 30분
"아싸 좋고!"
"백마~아 가아앙~ 다알~ 밤에~~ 물새~ 가아~"
두명의 취객이 만취한채 비틀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다. 어깨동무를 한 채 서로의 우정을 한껏 과시하며 걷는 그들의 입에서 지독한 술냄새가 풍겨난다. 다른 사람이 지나간다면 코를 쥐고 그들을 기분나쁜 눈으로 바라보겠지만 으슥한 골목에서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따위는 없다. 서로 취한 그들이 자신들의 입에서 풍겨나오는 술냄새따위를 느낄리도 없다.
흐트러진 양복 차림...아마 술집에서 나와 지름길을 지나서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들은 지름길을 택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다. 그들의 전방 20미터 정도에서 뭔가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난다.
멀리 구석진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어떤 그림자가 있다.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주머니에서 천천히 회칼을 꺼내드는 그림자. 아직 마스크는 쓰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반짝이는 회칼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무서운 웃음이 스쳐지나간다.
쳐진 눈매와 둥그런 얼굴...아마 칼을 들고 냉소를 짓지 않고 있다면 상당히 순하고 착해 보일 듯한 모습이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제단에 바칠 희생물을 앞에 둔 인신공양의 집행자처럼 잔인해 보일 뿐이다.
첫댓글 .. 술을 마시고나선 지름길로 다니지 말자...이번 편의 교훈..회칼의존재감이 웨이리도 무서운지..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