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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식당 설겆이 10년만에 사장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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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7 흑룡강신문 | |
아이들을 떠나 찾은 한국
17년 전 두 아들을 떼어놓고 한국행을 택했던 중국조선족 윤애자(49·사진), 서울의 중심가를 빗겨난 구로구 대림역전 어느 모퉁이에 그가 운영하는 '윤춘희 구육성'이라는 식당이 있다.
작지만 따뜻한 곳, 70㎡ 남짓한 규모에 10여개 테이블(밥상)을 갖춘 이곳은 여느 식당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난 1991년 윤모가 처음 한국땅을 밟을 당시에는 자신이 이런 식당의 주인이 될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에 도착한 윤모의 첫 직장은 서울 도봉구 도봉산입구에 있는 갈비집이었다.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43만원을 받았다.
한국에서 살면서 외래어에 발목이 잡혔다. 한국 식당에서 많이 사용하는 '냅킨', '쿠킹포일' 같은 생소한 외래어는 따로 공부를 해야 했다. 처음 듣는 한국 채소나 요리 이름에도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모르는 것은 공부를 하면 됐고 조선족 특유의 억양은 연습해서 고칠 수 있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윤모는 식당 일을 그만두고 이른바 '노가다'라 불리는 건설현장에 뛰어들었다. 현장에서 수도꼭지 다는 일부터 지게를 짊어지고 모래를 나르는 일까지 힘이 닿는대로 일했다. 일당은 3만원. 휴일은 비오는 날 뿐이었다. 그땐 참 지독하게 일만 했던 것이다.
일할 땐 지독했지만 사람에게는 약했다. 한번은 장비를 구입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현장 소장에게 힘들게 번 돈 150만원을 빌려줬다가 못 받을 뻔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요
그후 윤모는 서울 신사동, 서초동, 역삼동 등에서 갈비집과 일식집을 전전하며 악착같이 일을 했고 그러던 중 1994년 기회가 왔다.
역삼역 근처 프렌차이즈 일식집에서 일을 시작할 때다. 놀랍게도 윤모가 일을 시작한 지 한달만에 매출이 25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올랐다. 고객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손님의 특징을 파악하고 알맞은 메뉴를 권한 결과였다. 윤모 생각에 룸을 찾는 손님은 비싼 메뉴도 부담을 갖지 않는 손님들이었다.
기존에 많이 팔리던 싼 메뉴 대신 4만 5000원짜리 메뉴를 권한 결과 한달만에 매출이 두배로 오른 것이다. 한국에 들어와 성실하게 일하며 얻은 노하우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윤모의 활약이 알려지자 본사에서 전무가 찾아와 "윤주임님, 윤주임님"하며 깍듯이 대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역 인근에 있는 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윤모에게는 식당운영의 노하우를 익힌 값진 시간이었다.
작아도 정 나눌 수 있는 식당
윤모는 그후 갈비집에서 동료, 주방장들과 일하면서 크지는 않더라도 아기자기하게 꾸려나갈 수 있는 가게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꼭 식당을 차려 손님들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드려야겠다는 윤모의 바람은 2001년도 서울 구로구 가리봉 시장에 식당을 차리면서 이루어졌다.
테이블이 4개뿐인 작은 가게였지만 윤모는 개의치 않았다. 그동안 일하면서 배운 노하우와 몸에 밴 성실함으로 2002년 5월에는 지금의 식당으로 확장, 이전할 수 있었다.
지금은 친정어머니도 와서 같이 살고 있고 무엇보다 어릴 때 사랑을 못 줘 늘 미안하고 가슴아팠던 둘째 아들이 함께 있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베푼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예요
그렇게 윤모는 어엿한 사장님이 됐다. 성공의 비결을 물으니 "항상 손님에게 친절했던 것밖에 없어요. 인사 밝게 하고 식당에 와서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을 뿐이예요"라고 대답한다.
성실함 그리고 힘든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긍정적인 마인드가 윤모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는 전부다.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나눔의 기쁨이다. 윤모의 소식이 전해지며 윤모를 찾는 중국 조선족들이 늘었다.
설날에도 '윤춘희구육성'은 문을 닫지 않는다. 명절이라도 집에 갈 수 없는 조선족들이 고향음식을 먹으러 오기 때문이다. 손님의 70%가 중국 조선족이다.
"17년동안 고생한 걸 어떻게 다 말하겠어요. 앞날을 바라보며 살아야지요. 희망이 없으면 살 의욕도 없어지므로 스스로에게 기회와 용기를 주세요."
그도 힘들 때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할가"라는 생각에 포기하고싶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났겠지"라고 생각하며 살아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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