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총재 부친 이홍규 옹 친일행적 논란전모
<해방 56년 특별기획> 다시 친일파를 말한다
구영식 기자
민주당 당보를 통해 촉발된 이회창 부친의 친일행적 논란은 정확한 근거(fact)가 제시되지 않은 채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이홍규 홍의 친일행적 논란은 내년 대선에서 이회창 총재의 또 다른 아킬레스건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본지는 그동안 '말' 로만 떠돌던 '이 총재 부친이 일제 검찰서기로 근무했다' 는 것을 증명해 주는 조선총독부 근무기록과 해방 직후 미군정청에 의해 검사로 발령된 기록인 '임명사령 제64호'를 입수했다.
이회창 총재의 부친인 이홍규 옹의 친일행적 논란의 역사는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신한국당 경선과정에서 이 총재의 경쟁자들 중 일부가 이 문제를 은밀하게 조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곳은 역시 당시 야당인 국민회의였다. 당시 야당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증언해 주었다.
“1997년 7월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이회창 총재가 대선후보로 확정되자 야당에서는 세 가지 카드를 준비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판결과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 그리고 부친의 친일행적 의혹 등이었다. 당시 당 지도부 중에는 부친의 친일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모 의원이 대정부질의에서 당과 사전에 상의하지 않은 채 이 총재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 카드는 쓸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조사는 많이 한 것으로 안다.”
“이 총재 부친은 일제 치하에서 동포들로부터 존경받았던 검사”
1997년 대선 당시 잠복해 있던 이 총재 부친의 친일행적 논란 문제에 대해 지면을 통해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은 자민련의 당보였다. 1997년 9월호 『자민련보』는 4면과 5면에 걸쳐 「이회창을 검증한다」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특혜는 법대로 의무는 멋대로, 남의 자식 법대로 내자식 맘대로’라는 인상적인 제목을 단 이 기사에서 자민련은 병역면제, 부모·본관 변경, 수임료 탈세, 재산비리, 경선자금, 형의 이중국적 등과 함께 ‘부친의 친일행적’을 일곱 번째 의혹으로 제기했다.
“부친 이홍규 옹은 1929년 경성법전을 졸업하고 일제의 검찰청 서흥지청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해방 직후 광주지검 검사로 특임된 인물이다. 모 의원에 따르면 광주에 거주할 때 이씨집과 앞뒤집에 살았다고 하는데, 이회창의 집은 일본말을 상용어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 부친이 일본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다는데, 그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에 신한국당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민련이 제기한 의혹들에 대한 반박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다. 신한국당은 다른 의혹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근거를 대가며 반박했지만 유독 이 총재 부친의 친일행적 의혹에 대해서만은 “허무맹랑한 풍설”이라고 일축했다. 이규양 당시 자민련 부대변인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시 그 문제와 관련한 제보들이 있었다”고만 짧게 언급했다.
그런데 2000년 9월 26일 경기도의 한 도의원에 의해 이홍규 옹의 친일행적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김용운 도의원(하남시)은 ‘반통일세력의 원류인 친일반민족세력에 대한 경기도 차원의 대응 가능성’을 묻는 도정질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같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조차 민족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과 남북한 간의 화해와 협력관계의 조성에 비협조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민족통일 분위기를 희석시키고 관계발전에 제동을 거는 정치적 행보로 일관해 왔다는 사실의 기저적 원인에 대해 역동적으로 접근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자료에 의하면 ‘이홍규’라는 인물은 1929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제 검찰계에 투신, 민족의 미래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영달만을 꾀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자 친일분자인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조선총독부의 위상과 독립지사 및 조선인들에게 악독무비했던 일제 검찰의 행적에 비추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해방 이후에 있어서 그는 친일반민족자로서 회개함 없이 곧바로 대한민국 검찰에 들어가 검찰청과 법무부의 요직을 거쳐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장까지 지내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이홍규’의 아들이 바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라는 사실입니다.”
김 의원은 다음날(27일)에도 “이 총재의 부친이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광주검찰청 장흥지소에 재직하며 동족을 핍박했던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사본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청산은 사실규명이 이뤄진 뒤에야 가능한데도 국회 차원에서 누구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아 도의원 신분으로 지난 수개월간의 추적 끝에 밝혀낸 진실을 알리기 위해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권철현 대변인은 김 의원의 의혹제기에 대해 “이 총재의 부친은 일제 치하에서 동포들로부터 존경받는 검사였다”며 “해방 이후 지난 55년간 전혀 거론되지 않던 문제가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일개 도의원에 의해 제기된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논평했다. 하지만 법적 대응은 취하지 않았다.
일제 검찰 근무에 대한 ‘최초의 사실확인’
그러다 최근 민주당이 8·15 광복 특집 당보에서 김희선 의원과의 인터뷰내용을 실으면서 이 총재 부친의 친일행적 논란이 또다시 일어났다. 독립운동가의 자손인 김 의원은 당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총재 부친이 일제 말기에 검찰서기를 했다면 독립투사를 탄압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며 “이 총재는 대통령에 출마하기 전에 부친의 일제 하 친일행적에 대해 국민 앞에 솔직히 고백하고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이 총재는 7월 27일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여당이 나에게 정계은퇴하라는 것은 참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으나 부친이 친일파 행각을 했다고 한 데 대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대선 때도 부친이 일본옷을 입은 사진이 있니, 없니 하며 친일행각을 얘기하다 조사해 보니 별게 없어 잠복한 것을 다시 꺼내 논란을 빚은 데 대해 자식으로서 부친께 욕을 먹이는 것 같아 죄송스럽다.”
기자는 지난 8월 3일 경기도 하남시에서 김 의원을 만나 그가 발굴한 ‘중요한 자료’ 두 건을 건네받았다. 하나는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정청의 ‘임명사령 제64호’이다.
기자가 입수한 1930년부터 1940년까지의 조선총독부 관서직원록은 이 총재의 부친이 조선총독부 소속관서 중 하나인 조선총독부 재판소 검사국에서 서기로 근무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말’로만 떠돌던 이 총재 부친의 일제 검찰 근무에 대한 최초의 사실확인 자료이다.
조선총독부 관서직원록은 조선총독부에서 매년 발행하던 정기간행물이었다. 기자가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등 주요 국내도서관을 뒤져 본 결과 1940년 이후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았다. 11년간의 조선총독부 관서직원록에 따르면 이홍규 옹의 첫 번째 근무지는 해주지방법원(황해도 해주군 해주면 소재) 검사국 서기과였다. 1929년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대 법대의 전신)를 졸업한 바로 이듬해 조선총독부 소속관서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홍규 옹이 조선총독부 소속관서에서 근무한 최초연도는 1930년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1930년 조선총독부 관서직원록의 한자표기에 오류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홍규 옹의 한자표기는 ‘李弘圭’인데 1930년 기록에는 ‘李弘奎’로 적혀 있다. 그런데 1931년 기록에는 같은 근무지(해주지방법원)임에도 불구하고 ‘李弘圭’로 되어 있다. 기자는 이것을 표기상(또는 인쇄상)의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홍규 옹이 조선총독부에 들어간 해는 1930년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일제 하 사법제도의 근간은 조선총독부 소속관서 중 하나인 조선총독부 재판소였다. 재판소는 다시 고등법원과 고등법원 검사국(현 검찰청)으로 나뉘는데 고등법원 검사국 아래에는 지방법원 검사국, 지방법원 지청 검사분국 등이 있었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 사법통계를 보면 조선인 출신 판사와 검사는 각각 평균 30여 명과 10명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판사나 검사 아래 직급으로는 사법관시보, 서기장·통역관, 서기·통역생, 판임관견습(判任官見習) 등이 있었고, 조선인 출신이 가장 많았던 직급은 서기와 통역생이었다.
일제 하 관료임용은 고등문관시험과 보통문관시험을 통해 이뤄졌다. 고등문관시험은 행정과와 사법과로 나뉘는데 지금의 행정고시와 사법고시에 해당한다. 행정과에 합격하면 군수 등의 자리에 임명되었고, 사법과에 합격하면 사법관시보를 거쳐 검사나 판사로 임용되었다. 하지만 조선인 판사나 검사는 그 수가 매우 적었다. 판사나 검사보다 낮은 직급(예를 들어 판임관견습이나 서기 등)들은 보통문관시험이나 그에 준하는 간단한 시험을 치러서 임용되었다고 한다. 박은경씨의 박사학위논문(「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조선인관료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판사나 검사의 경우 직접임용보다는 재판소 서기를 거쳐 임용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10급 판임관견습으로 들어가 7급 서기까지 승진
이 총재 부친은 조선총독부에서의 첫 근무를 ‘판임관견습’으로 시작했다. 당시 그의 월급은 40원. 최초 해주지방법원 검사국 서기과에서 근무하다 1932년(소화 7년) 서기 겸 통역생 승진과 함께 해주지방법원 송화지청(황해도 송화군 송화면 소재)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3년 동안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10급)으로 근무했다.
1935년(소화 10년) 다시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황해도 서흥군 서흥면 소재)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도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했는데 8급으로 진급한 상태였다. 그는 1938년(소화 13년) 7급으로 진급해 광주지방법원 검사국 장흥지청 검사분국(전남 장흥군 장흥면 소재)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2년 동안 근무하다 1940년(소화 15년)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올라왔다. 당시 그의 월급은 70원.
여기까지가 이홍규 옹의 11년간 조선총독부 근무기록이다. 그의 근무경력 가운데 1940년 광주지방법원 검사국 근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사상담당(현 공안검사) 검사 밑에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주와 광주 두 곳에만 사상담당 검사를 두었다고 한다. 그 배경에 대한 한 역사전문가의 설명이다.
“당시 광주는 신민회 결성 등으로 조국독립 투쟁 열기가 가중되고 있었다. 또한 광주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지역이었고 곡창지역인 군산·이리·전주 등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일제 지주들의 횡포와 강요에 시달리던 소작인들의 울분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옛 서당을 이용한 야학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일제 총독부는 유독 전주지방경찰청, 광주지방검찰청에 사상담당을 두어 당시 수많은 사상가와 독립운동가, 종교인, 야학당 관련자들을 무참히 고문했다.”
김용운 의원도 “이홍규씨는 1930년 일제 검찰계에 투신한 이후 최말단에서 고속승진을 한 대표적인 조선인”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인으로서 이씨가 고속승진을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조선인 핍박 및 독립운동가 체포와 같은 친일 매국행적을 했거나 그 공로로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포상을 받았을 수도 있다. 당시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가장 악명 높았던 대상이 조선인 일제 검찰서기였음을 감안한다면 고속승진을 한 이씨가 어떤 짓을 자행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홍규 옹이 ‘마루야마’(丸山)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설이 있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창씨개명이 1939년부터 공식화되었는데 1940년 이후 조선총독부 관서직원록이 없어 현재로선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또한 이홍규 옹이 “어린 이회창 총재와 함께 기모노를 입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남아 있다”는 설도 나돌고 있다. 심지어 “이 아무 전 부총리 개인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모 사회단체 사무총장이 보관하고 있다” “민주당의 전직 고위간부가 가지고 있는 걸 봤다”는 등의 확인할 수 없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설들은 현재 정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리고 일제 검찰에 근무했다는 것만으로 이홍규 옹이 친일을 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조선총독부 소속관서의 하급관료로서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 복무한 점만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상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독일재판소 구내에는 나치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을 애도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재판관의 반성과 사죄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에 못지않게 나치 하의 사법관료(재판관 및 검찰관)의 나치 악법 적용자와 집행자에 대한 숙청이 있었다. 이것이 독일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다. 우리는 그 정반대로 일제 사법관료가 사법권의 주역이 되는 친일파 세상이 되었고, 군사독재의 법기술자가 여전히 사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1945년 미스터리’ : 서울지검이냐 순청지청이냐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미군정청 문서에서 발견되었다. ‘임명사령 제64호’(APPOINTMENT NUMBER 64)라고 이름붙여진 이 문서는 일종의 인사명령서이다(작성일자는 1946년 1월 3일). 임명권자는 아놀드(A. V. ARNOLD) 미 육군소장. 그는 당시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1945년 9월 11일 조선총독부를 미군정청으로 공식 개칭하면서 아베 총독을 해임하고 임명된 최초의 미군정청 장관이다.
아놀드 소장은 1945년 11월 「미군정의 현재와 장래에 대한 제반문제에 관하여」라는 장문의 담화를 발표한다. 일제 하 친일관료들이 해방 후에도 국가기구에 충원될 수 있었던 배경을 보여주는 담화내용의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중대한 것은 일본정부와 협력한 조선인의 임용이다. 미군정은 다수의 충실한 조선 애국자가 일본인에 의해 부단히 박해, 투옥,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는 바이다. 그러나 조선인의 전부가 자기 자신과 처자를 살리기 위해서 일상생활에 있어서 일본인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정청 미국관리는 조선 민중의 어떤 사람이 적극 협력자이고, 어떤 사람이 사실상 반역자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을 발견하고 그 임용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각 부문에 봉사할 유능하고 우수한 사람이 극히 부족해 조선인은 이러한 친일협력자로 하여금 조국에 봉사하고 전 민족의 이익을 위해 그들이 일본인에게서 습득한 지식과 기능을 이제 조선에 발달시키는 적당한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이 곤란기에 있어서 조선인은 모든 유능한 인물을 적당히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군정청의 ‘임명사령 제64호’에 의하면 ‘아래의 인물을 1945년 12월 20일부로 조선정부 법무국 별기부서에 임명하고 직권행사의 권한을 부여한다’며 이렇게 적고 있다.
‘이홍규 광주지방법원 순청지청 검사(Prosecutor, Sunchon Branch Court of District Court of Kwangju).’
이 문서에는 조병옥 전 내무부장관을 경찰국 조선인 국장으로 임명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홍규 옹이 광주지방법원 순청지청 검사로 임명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자필이력서에 근거한 『한국법조인대관』(1997년 법률신문사 발행)에 따르면 이홍규 옹은 1945년 서울지검 검사로 근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월간조선』 2001년 7월호 「이회창 일가 이야기-’장수·수재’ 겸비의 명가』에도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일제 시대 검찰서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옹은 정부 출범 직후, 법조인이 크게 모자라자, 정부에서 실시한 법관 특임시험에 합격, 서울지검 검사로 임용됐다.”
이른바 ‘1945년 미스터리’이다. 이홍규 옹은 1945년 서울지검 검사였나 순청지청 검사였나? 이회창 총재가 쓴 『아름다운 원칙』을 보면 이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 가족이 순천으로 이사하여 살고 있을 때인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어머니는 내게 가끔 외가댁으로 심부름을 보내셨다. 쌀을 얻어 오는 일이었다.”(25쪽)
이 총재가 초등학교(광주 서석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가 바로 1945년이다. 1945년에 가족이 이사해 순천에 살고 있었다는 것은 미군정청 인사발령 내용(순천지청 검사) 및 시기(1945년 12월 20일)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홍규 옹은 1945년 순천지청 검사로 근무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리고 이홍규 옹이 서울지검에 근무했던 것은 순청지청 검사를 지낸 후였다.
그렇다면 1945년 서울지검 검사를 했다는 『한국법조인대관』의 이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또 이홍규 옹 본인과 이회창 총재는 왜 굳이 이 점에 관해 시원스레 밝히지 않는 것일까. 이 미스터리에 대해 몇 가지 추측을 해 보면 이렇다.
첫 번째는 이홍규 옹이 이미 일제 말기에 검사로 임용되었을 가능성이다. 김용운 의원은 ‘1945년 미스터리’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한국법조인대관』에서의 이홍규씨 경력 가운데 ‘1945년 서울지검 검사’ 근무기록은 실제로는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검사’ 근무기록이라고 판단된다. 곧 해방 후 법무국 검사를 최초로 서임한 날이 1945년 12월 20일이고 이런 내용을 담은 미군정청 ‘임명사령 제64호’가 내려진 날이 1946년 1월 3일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홍규씨가 1945년에 검사였다는 것은 곧 일제검사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씨가 1945년 일제검사였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이씨의 해방 후 첫 근무지가 서울이 아니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이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권철현 대변인이 “이 총재의 부친은 일제 치하에서 동포들로부터 존경받는 검사였다”고 말한 부분이다. 이 발언은 이홍규 옹이 일제검사였음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이홍규 옹이 해방 바로 직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지만 해방이 되면서 임용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1945년 해방이 임박하자 일제는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조선인들을 대거 합격시켰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해방 직후에는 일제 검찰서기도 판검사로 임명돼
두 번째는 이홍규 옹이 해방 직후 미군정에 의해 실시된 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한 후 12월 20일 순청지청 검사로 발령나기 전까지 서울지검에 1∼2개월 정도 잠깐 근무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때는 1945년 9월 8일. 다음날 바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통치권을 접수했고 9월 12일 아놀드 소장이 최초의 군정청 장관으로 취임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미군정시기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을 감안했을 때 임명한 지 1, 2개월 만에 다른 지청으로 발령냈을 것이라는 추측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이 총재의 만화자서전인 『가슴이 따뜻한 사람 이회창 이야기』에서도 “경성법전을 졸업한 뒤 검찰청 직원으로 일했던 그의 아버지는 해방 직후 검사가 됐고 초임지로 전남 지역에서 근무하였다”(3백1쪽)며 해방 직후 첫 근무지가 ‘전남 지역’이라고 밝히고 있다.
세 번째는 이홍규 옹이 10여 년의 일제 검찰서기 경력을 인정받아 미군정시기에 검사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이다. 『법조비화 100선』에서 김이조 변호사는 해방정국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 판검사가 1945년 10월 12일 일시에 물러나고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응급조치로서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이며 해방 당시 7년 이상 법원 또는 검사국의 서기로 근무한 자를 판검사로 임명하였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자, 만주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또는 1945년 8월 15일 3과목의 조선변호사시험을 치르다가 만 응시자도 일부 사법관 시보로 채용한 바 있었다.”
이러한 해방정국을 고려했을 때 이홍규 옹이 해방 직후 미군정청에 의해 검사로 발령받았다는 것은 어떤 ‘배경’이 작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여하튼 정확한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이회창 총재 부친의 친일행적 논란은 내년 대선에서도 뜨거운 감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사실’에 근거한 친일논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선 국면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정치적 소재로 활용해서도 안 된다. 친일문제는 정쟁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청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 183 호 2001 년 9 월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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