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의 사람시리즈-바울㉕
예수께 미친 사람!
참고말씀: 창29:20; 스5:1,2; 느2:17; 요21:15-17; 행21:13; 고후5:13; 빌3:17
읽을말씀: 행26:24-29
주제말씀: 행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첫째, 비전의 사람은 예수께 미친 사람입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행26;24,25)
비전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예수님께 미친 사람입니다. 즉 미쳐도 주를 위해 미치고 정신이 온전해도 주를 위해 그리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고후5:13)
어째서입니까? 비전의 길은 속된 말로 ‘예수님께 미치지 않으면’ 갈 수 없으며,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무지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7년을 며칠 같이 여길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29:20)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부탁하시면서 오직 무엇만을 그것도 세 번씩이나 확인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지의 여부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물론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미쳐야 한다는 말은 곧 우리가 광신도(狂信徒)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 가정도 팽개치고 직장도 그만두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 바울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그의 변증을 들은 베스도에게 무슨 말까지 들었습니까? 미쳤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24절)
물론 바울이 실제로 미친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25절)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바울의 모습은 흡사 미친 사람과 같았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 미쳤고 그 복음에 미쳐서 여기까지 로마 전역을 휩쓸고 다닌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만일 미쳤어도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고후5:13 상)
그러고 보니 바울의 다메섹 도상 이후의 삶은 온통 예수님께 미친 삶이었고 예수님께 바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물불 가리지 않고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가 비록 사지(死地)요 사형장(死刑場)일지라도 말입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21:13 하)
바울은 후일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의해 순교의 제물이 되었는데, 전승에 의하면 그가 참수를 당할 때 “예수, 예수, 예수”하고 세 번 외쳤다고 합니다. 그가 얼마나 예수님께 미쳤었고 또 예수님을 사랑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비전의 사람은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비전의 길은 ‘예수님께 미치지 않으면’ 갈 수 없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무지 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비전의 길은 예수님께 미치지 않으면 도무지 갈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님께 제대로 미치고 있습니까?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둘째, 비전의 사람은 확신의 사람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행26:29)
비전의 사람은 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확신의 사람입니다. 어떤 확신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확신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29절)
왜 이 같은 확신이 필요합니까? 만일 이 같은 확신이 없다면 누구에게도 자신의 비전을 소개하거나 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비전을 먼저 받은 내가 확신이 없는데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이 비전을 함께 이루자고 제안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제안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동기부여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재건 비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어찌 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통해 함께 이 비전을 이루자고 독려할 수 있었겠으며,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느2:17)
선지자 학개나 스가랴가 성전 재건 비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어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 재개를 촉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스5:1,2)
비전의 사람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변명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까? 다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입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29절 하)
어떻게 그리 말할 수 있었습니까? 단순히 막연한 자신감의 표출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에 대한 바울의 확신과 자부심 때문이었으며, 자신의 비전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자신처럼 예수님을 믿고 비전의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습니까? 비전의 사람은 확신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 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빌3:17)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비전의 사람은 곧 확신의 사람임을 깨닫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비전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확신했다면 이 같은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권면해서 함께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