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戰爭不知何時死(전쟁불지하시사)-전쟁나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
現下不存飮食物(현하부존음식물)-당장 먹을 것이 없어진다
當場發病不治療(당장발병불치료)-당장 병이 나도 치료를 못 받는다
治安秩序崩壞也(치안질서붕괴야)-사회치안 질서는 무너지고
不義惡意亂横行(불의악의난횡행)-불의와 악의가 판을 친다.
此是战争不幸也(차시전쟁불행야)-이것이 전쟁이고 불행이다
농월(弄月)
70년이 지나도 남아있는 슬픔, 대니 보이(Danny Boy) !
며칠 있으면 한국전쟁이 일어난 6.25다.
이제 전국민중에서 70년이 지난 6.25한국전쟁을 몸으로 겪은 사람은 5000만
국민 중에서 얼마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들까지
“6.25한국전쟁은 남한이 북한을 침범한 전쟁”으로 잘못 알고 있는 학생이 많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한말이 아닐까 !
※격세지감(隔世之感)-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필자의 고향 진주 변두리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확실한 기억은 모르지만 아마 1950년 7월~8월사이 날씨가 매우 더울 때였다.
집집마다 피난준비 미숫가루(보리 볶은 가루)를 만든다고 야단이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국민학교)1학년 때 였다.
학교 근처에 있는 친구가 와서 선생님이
“반장은 집이 멀어서 연락이 안 되니 부반장너를 오라고 한다”하였다.
반장은 학교에서 약 30리 떨어진 시골에 살았다
필자가 부반장이었다(필자는 1학년부터 6년까지 부반장만 했다)
나도 어수선한 피난 준비하느라 가지 않았다.
(아마 선생님의 말씀은 어긴 것은 처음이라 행각한다)
다음날 피투성이가 된 미군들을 실은 트럭이 영어로 뭐라고 손짓을 하면서
어디론가 달려간다.
어른들의 피난준비 행동이 더욱 빨라졌다.
-그 후 피난 중 중간 생략-
1.피난 중 바닷가 도랫몰 오리방천이라는 곳에 피난민이 모였다.
바닷물이 들고 날 때에 게를 잡고 있었다.
그때 정오쯤 B29 한 대가 날아 간뒤에 몇분 이다가 호주기(양쪽날개에 가스통 같은
것이 달린 폭격기) 4대가 와서 무차별 기관총 사격을 하였다.
오리방천은 순식간에 피비린내 나는 아비지옥(阿鼻地獄)이 되었다.
(도랫몰 동네는 지금도 같은 날 제사가 백집이 넘는다)
※아비지옥(阿鼻地獄)-불교에서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지옥(地獄)에서 받는 형벌로
살가죽을 벗겨 불 속에 넣고 쇠매(鐵鷹)가 눈을 파먹는 고통
필자가 앉아있는 맞은편에서 감자껍질을 벗기던 아주머니가 비행기 기관총을 맞아
전신이 찢기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바닷물로 빠졌다
어떤 사람은 창자가 빠져 나온 것을 손으로 잡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바닷가 방죽은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있고 피가 줄줄 흘러 내렸다.
둑에 메여있던 소들이 이리저리 뛰고 죽었다.
필자는 그냥 정신이 나가 멍하게 비행기 폭격 속에 앉아 있었다.
마음은 어디로 숨어야 하는데 몸이 꼼짝 달싹 말을 듣지 않았다.
기관총에 맞아 바위가 깨어지고 흙이 날렸다.
지옥이었다.
다행이 필자 가족은 무사하여 그 지옥 속에서 다시 만났다.
2.또 여러곳을 피난하다가 어쩌다가 가족과 헤어졌다.
식량이 떨어져 어머님과 필자가 작은아버지 집에 식량을 얻으러 갔다가 고동개라는
산자락에서 비행기 폭격을 받았다. 작은 소나무 밑에서 어머님이 나를 꼭 껴안고
엎드렸다. 한 참후 비행기 기관총 소리가 들리지 않자 우리는 살아 있었다.
발걸음이 어디로 가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3.피난 일수가 얼마나 흘렀는지 기억 없지만 아버님이 집으로 가자고 했다.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동네가 있는 앞들에 왔을 때 들 가운데를 흐르는 당내 개울에서 비행기 폭격을
만났다. 가족이 전부 개울 뚝아래 물속 돌 사이와 풀사이에 숨었다.
또 다행히 살아남았다.
4.며칠 후에 북한 인민군이 진주를 점령하였다.
말을 탄 인민군 기마병도 보였다.
필자의 집에도 인민군이 와서 밥을 해 내라고 명령했다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면서 한 인민군이 다발총을 만지다 오발해서 깜짝 놀랐다.
다음날 인민군은 동네를 떠나면서 장정들을 끌고 갔다.
장정들에게 인민군 배낭등 짐을 지였다.
이웃집 친구 아버지도 끌려갔다가 밤에 도망을 쳐 와서 다행히 살았다.
인민군 치안대(남한 사람으로 인민군 앞잡이)들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집집마다 사람을 불러내어 방공호를 파고 김일성 노래를 가르쳤다.
뒤에 들으니 치안대들은 인민군이 후퇴할 때 전부 북으로 갔다고 한다.
그 후 폭격기 굉음의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어린마음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필자가 겪은 6.25이야기는 책을 쓸만큼 처참하다.
6.25 전쟁 사망자 수
국인사망 175000명 미군포함
민간인 사망 350000명
북으로 납치 85000명
전쟁고아 미망인 헤아릴 수 없음
북한군 중공군 사망자 별도
2013. 6.25 가요무대에서 김동건 아나운서 발표한 내용이다.
필자의 장형(長兄)도 1950년경에 서울에 계셨는데 6.25전쟁으로 소식이
끊어져 95세에 돌아가신 어머님의 가슴에 평생 한숨의 한을 남겼다.
어쩌다 밤중이나 새벽에 눈을 뜨면 어머님이 홀로 앉아 깊은 숨을 내쉬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절기마다 장독대에 흰 사기대접에 맑은 정화수를 얹어놓고 합장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하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묘지나 기념비로 기억하고 있지만 노래로도 많이 남긴다.
한국의 트로트 가요 중에는 6.25 한국전쟁을 노래한 가요가 많다.
굳세어라 금순아 !
함경도 사나이 !
단장의 미아리 고개 !
이별의 부산정거장 !
등등~~~~
전쟁이 낳은 노래는 민족상잔(民族相殘)을 겪은 우리나라는 물론 전쟁을 겪은
지구위 여러 나라에 많다.
20세기를 울린 전쟁 노래 중 하나로 “Danny Boy”를 지목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대니 보이는 일찍이 우리나라에도 “아 목동아”를 제목으로 테너 현제명이 불렀다.
이 노래를 미국의 색소폰 연주자 실 오스틴(Sil Austin)이 연주한 “Danny Boy”가
6.25전쟁 직후 한국에 상륙하여 남쪽사회를를 강타했다.
아마 나이 많은 사람들은 가슴속을 후비는 색소폰의 애원하는 듯 눈물흘리는 듯
구성진 “Danny Boy”를 기억할 것이다.
이 노래는 오랫동안 대영제국과 피비린내 나는 독립 전쟁의 역사를 지닌
북아일랜드 지방의 민요로서 “Londonderry Air” 에서 출발했다고 전한다.
※런던데리 에어(Londonderry)-북아일랜드에 있는 우리나라의 군(郡)정도의
작은 마을.
이 곡이 시작되던 19세기 중반 여러 개의 가사(歌詞) 버전이 있는데
그중에서 영국의 변호사이며 작사가인 프레더릭 웨덜리(Frederic Weatherly1848~1929)의 노랫말이 “Danny Boy”를 대표한다고 한다.
전쟁터로 끌려 나가 돌아오지 못한 아들을 그리워하는 애끓는 부모의 심정(心情)을 담은 이 노랫말은 전쟁으로 자식을 잃는 전 세계 부모들의 마음을 처절하게
대변한다.
“Danny Boy”는 번역과 가수에 따라 여러 버전(version)이 있다
그 중에 잘 알려진 가사를 정리하여 본다.
대니 보이 영문과 가사 풀이
Oh Danny boy, the pipes, the pipes are calling
From glen to glen, and down the mountain side
The summer's gone, and all the flowers are dying
'tis you, 'tis you must go and I must bide.
But come you back when summer's in the meadow
Or when the valley's hushed and white with snow
'tis I'll be there in sunshine or in shadow
Oh Danny boy, oh Danny boy, I love you so.
아,목동들의 피리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오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여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아, 목동아 아, 목동아 내 사랑아
Danny Boy 원문
Oh Danny boy, the pipes, the pipes are calling
From glen to glen, and down the mountain side
The summer's gone, and all the roses falling
It's you, it's you must go and I must bide.
But come here back when summer's in the meadow
Or when the valley's hushed and white with snow
Yes I'll be here in sunshine or in shadow
Oh Danny boy, oh Danny boy, I love you so.
And if you come, when all the flowers are dying
And I am dead, as dead I well may be
You'll come and find the place where I am lying
And kneel and say an "Ave" there for me.
And I shall hear, tho' soft you tread above me
And all my grave will warmer, sweeter be
For you will bend and tell me that you love me
And I shall sleep in peace until you come to me.
대니 보이
아, 목동들의 피리소리 울리네
산골짜기에도, 산기슭에도
여름은 지나가고, 꽃들도 다 지니
너는 떠나야만 하고, 나는 남아야 하네
하지만 여름이 되어 초원이 푸르러지거나
계곡에 눈 덮힐때 쯤이면 돌아오려무나
화장한 날이나 흐린 날에도 난 여기 있을거야.
아,목동아 난 너를 사랑한단다.
네가 돌아왔을때, 꽃도 지고
나마저도 죽었다면
나 누운 곳에 찾아와
날 위해서 돌아왔다고 말해다오.
네가 아무리 조용히 와도 난 알 수 있지.
나 묻힌 이곳 포근해지리니.
너의 사랑한다는 속삭임에
우리 다시 만나는 그 날 까지 난 편히 잠들 수 있을 거야.
TV에서는 6.25를 기념하여 옷을 화려하게 입은 가수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얼굴에는 별별 표정을 지은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지만 6.25를 실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6.25 참상을 실감하겠는가 !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