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인디고=전윤선 집필위원] 여행자에게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이다. 계절의 나침판 따라 길을 나서면 기적 같은 풍경에 전율이 느껴지고 인생의 허기를 채운다. 엘피판에서 음악이 흐르면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노래만 들어도 가슴 뛰던 시절은 그리움으로 그려진다. 계절조차 쉽게 결정을 못 내린 듯 겨울과 봄 사이를 오간다. 봄이 뒤따라오는 풍경에 시간도 겨울을 지나고 여행자는 수호신에게 안전을 부탁하며 발길을 내디딘다.
어느새 봄이 턱밑에 와 있다. 숨 가쁘게 지나온 시간에 또다시 한 계절이 지나가고 정양늪은 봄으로 가득하다. 꽁무니를 빼고 있는 겨울은 곧 봄에 점령당할 것 같다. 겨울 철새들은 몸집을 한껏 늘려 떠날 채비를 하고, 텃새는 혹한을 이겨낸 자신에게 햇볕 한 줌을 선물한다. 여행도 계절성이 있다. 계절에 맞는 여행은 시절인연으로 이어진다. 이맘때 볼 수 있는 철새 여행지로 안성맞춤인 정양 늪은 무장애 여행지로 안성맞춤이다. 정양늪은 후빙기 이후 해수면의 상승과 낙동강 본류의 퇴적으로 생겨났다. 황강의 지류인 하천의 배후습지여서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은 늪이다.
정양늪은 복원 사업으로 되살아났다. 복원 전, 황강의 수량과 수위 감소로 육지화되었고 인위적인 매립으로 수질 악화가 가속되면서 습지로서의 기능이 점점 상실되었다. 그러던 중 합천군에서는 정양늪 생태공원 조성사업을 3단계로 나누어 추진했다. 그 결과 생물 다양성의 보고이자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이어주는 생명의 터전으로 다시 태어났다.
자연도 지속적으로 가꾸어야 생태계가 건강하게 보전된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는 인간에게 재앙으로 되돌아온다. 정양늪에는 어류와 조류, 다양한 포유류와 식물이 살고 있다. 멸종위기 야생동물이자 천연기념물인 수달을 비롯해 모래주사, 큰기러기, 말똥가리, 금개구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희귀 동식물 서식지로 생물학적·생태학적 보존가치가 높은 습지여서 사계절 관찰 가능한 체험·관찰형 여행지로 매력적인 곳이다.
게다가 계절마다 찾아오는 철새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늦가을에 찾아와 겨울을 나고 봄이 오는 길목에 고향을 찾아 떠나는 철새들의 낙원, 정양늪은 고니, 왜가리, 기러기까지 다양하다. 깜짝 놀란 건 엄청 큰 고니이다. 고니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고 정양늪을 찾아준 철새가 고맙기도 했다.
정양늪에는 철새가 좋아하는 먹이가 풍부하다. 늪을 오가며 자맥질도 하고 춤도 추는 철새들이 신기했다. 고니를 가까이서 보니 만화영화 “닐스의 모험”이 생각났다. 닐스의 모험은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 작가 셀마 라겔뢰프(1858~1940)가 지은 장편동화이다. 동화책으로도 읽었지만 만화 영화로 볼 때도 재밌었다. 지금도 가끔 닐스의 모험을 볼 때마다 동심으로 빠져든다. 허구헌 날 부모 말을 안 듣고 농장의 동물을 괴롭히는 말썽꾸러기 닐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요정을 괴롭힌 탓에 마법에 걸려 엄지손가락만 하게 작아지면서 모험이 시작된다. 작아진 닐스는 동물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고 집에서 키우던 거위 모르텐과 함께 기러기 떼를 따라 새들의 낙원 “라플란드”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촉진제이다. 닐스의 모험도 그렇고,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도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를 여행하다가 불합리한 제도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혁명가가 됐다.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여행을 통해 삶을 통찰하고 평등을 위해 앞장서는 선구자가 된다. 닐스의 모험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여행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연의 소중함과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서 동물과 자연을 사랑하는 소년이 되었다는 해피 엔딩이다. 무장애 여행도 닐스의 모험처럼 때로는 모험에 가깝다. 접근성 미비로 온갖 장벽에 부딪히기도 한다. 무장애 여행은 점에서 선으로 이어지는 여행의 권리이자, ‘같이’의 가치다.
잘 다져진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흙의 질감이 휠체어 바퀴를 통해 온몸에 그대로 전달된다. 오감으로 전해지는 고요함을 찬찬히 둘러보며 눈 맞춤할 게 많은 정양늪은 그리움으로 다시 피어난다. 찰나를 깨우며 하루하루가 봄인 듯 그렇게 살고 싶다. 정양늪에서 시작한 꽃들의 전쟁 선포는 지금부터 북쪽으로 진격한다, 사람들은 꽃들의 포화 속에서 행복한 포로가 되고 봄을 찾아 나선다.
조금 걷다 보니 철새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평화롭게 쉬고 있는 고니도 있고, 밥을 먹는 철새도 있다. 사람이든 철새든 먹을거리가 있어야 정착도 하고 머물기도 한다. 정양늪은 철새들 사이에서도 소문난 기착지다. 천적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도 있고 먹거리도 풍부해서다. 사람의 간섭을 최대한 피할 수 있게 늪 둘레에 무장애 데크길을 내고 전망대도 설치했다. 그렇게 조성된 정양 습지는 철새들의 낙원이 됐다. 계절마다 철새를 보러 오는 여행객도 늘고 있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 등 관광 취약계층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어 무장애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정양늪에는 생태 학습관도 있다. 3층 건물의 생태 학습관은 정양습지를 체험하고 관찰할 수 있도록 층마다 다양하게 꾸며져 있다. 3층 전망대는 정양늪을 볼 수 있는 망원경과 휴게실도 마련돼 있다. 2층도 볼거리가 풍성하다. 금개구리 모형은 학습관을 찾는 관람객에게 인기 있다. 금개구리는 한국고유종이면서 멸종위기 야생생물로 지정된 보호종이다. 정양늪은 금개구리가 살아가기에도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정양늪에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삶이 감미로운 건, 내 생각에 달렸다는 것을 의도치 않게 발견한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세상의 소음을 잠시 차단하고, 디지털 거리두기로 삶에 쉼표를 찍어본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자리에 비로소 소소한 자유와 행복이 채워진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만난 오늘이 인생의 봄날이고, 창밖의 계절도 마침 봄을 맞고 있다.
무장애 여행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