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3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마태오 9,27-31
부모에게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가 세상에 나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먼 사람 둘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믿음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다는 것도 있지만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것도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 곧 능력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믿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시면 알아서 다 해 주셔야지 굳이 당신의 능력을 믿고 청하는 이들에게만 은총을 주실까요?
이는 능력 있는 분의 특징입니다.
바로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되 흔들리지 않도록 경계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에덴동산을 내어주시되 선악과는 바치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없으면 넌 죽어. 그래서 다 해주냐? 물론. 그러나 내가 하느님임을 잊지 마. 네가 선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에게 선악과 하나는 좀 바쳐줄래?”입니다.
만약 부모가 다 내어주기만 하되 부모로서의 권위와 경계를 알려주지 않으면 어떨까요?
사람 사이에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큰일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경계 없이 침범할 수도 있고 또 나도 그렇게 침범당해도 되는 줄 압니다.
『벼랑 끝, 상담』에 ‘시누이로 인한 피해망상’이란 사례가 있습니다.
남편이 위로 누나가 5명, 여동생이 1명 있는데 아내는 시누이들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여깁니다.
특별히 큰 시누이는 돈이 많은 사람인데 결혼할 때 도움도 받았기에 거의 엄마뻘 되는 시누이에게 이루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살았습니다.
시누이들은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물 먹은 동생의 아내를 무시하고 깔보고 핍박했습니다.
더군다나 남편이 몇 년 동안 외국으로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에 아내는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도 못하고
꾹 참다가 결국 조현병 증상까지 온 것입니다.
시누이들도 물론 문제지만 피해자도 문제입니다.
큰 시누이가 들어와서 낡은 옷들을 자기 맘대로 꺼내 버리고 자기가 좋은 옷 사준다고 나가서는 마음에 들지도 않는 것들만 사주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누이의 횡포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시누이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시어머니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함께 살면서 묵인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사람 사이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음을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딸들에게 무언가 항상 못 해 준 것이 많다는 생각에 선을 설정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미안한 마음은 자신과 자녀와의 경계선을 허물고 자신은 자녀에게 너무 집착하고 자녀는 부모의 영역까지 침범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불완전한 부모는 있어도 불완전하게 사랑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면 못 가르쳤다고, 딸만 많이 낳았다고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미안해하는 마음이 자녀들을 망칩니다.
부모는 에덴동산의 주인과 같습니다.
이미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자녀가 만약 선을 넘으려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온유하고 자비롭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어야 할까요? 능력 있는 부모라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들어주지 않아도 이미 주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능력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기분 나쁘더라도 겸손하게 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 그것을 꼭 해 주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녀를 돕지 않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독립시키는 것이지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어떨까요?
‘EBS 육아교육’에서 ‘의존형 아이를 만드는 엄마들의 심리에 대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단어들로 문장 만들기를 하는 것인데, 미국 엄마들은 아이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일이니 아이들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한국 엄마들은 자주 간섭을 합니다.
아이들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인데 엄마들이 관여합니다.
어떤 아이들이 자존감이 큰아이로 성장할까요?
당연히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그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어준 미국 어머니의 자녀들일 것입니다.
우리 부모는 아이들에게 다 내어주고도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이들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교육해 주어 세상에 내보내면 할 일은 다 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자녀들이 ‘혜택’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해야지, 해주면 해 줄수록 더 요구하고 되고 그러면 교만해져서 아무리 많이 해줘도 부모에게 불만을 품게 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불만을 품으면 그것은 부모 탓입니다. 자녀의 교만을 너무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처럼 부모의 능력을 믿고 부모에게 겸손하게 청할 때만 들어주어야 합니다.
남들은 눈이 다 보이는데 자신만 안 보여서 하느님께 불만을 품는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은총을 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었으면 고마워해야 하는데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청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마십시오.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아무리 많이 해줘도 결국 그 자녀는 부모까지 잡아먹게 됩니다.
휘둘리지 않는 힘도 자존감입니다.
그런 자존감 있는 부모에게 자존감 있는 자녀가 태어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미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녀가 사람과 하느님, 그리고 사람 사이에도 질서와 경계가 존재함을 배우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의 경계를 존중하시며 사셨습니다.
부모에게서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는 세상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3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태오 9,27-31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서 이루어지는 구원
근동지방의 거지들은 끈질기고 집요하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짓궂기도 했지만 엄청 성가시게 달라붙었습니다.
그들로 인해 행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심각한 것이었고, 귀찮기에 어쩔 수 없이 빨리 돈 좀 집어주고
그 자리를 벗어나곤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소경 역시 구걸로 연명했던 거지였는데, 줄곧 예수님 일행을 따라 다니면서
구걸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청하는 구걸은 다른 거지들의 구걸과는 질적으로 달랐는데, ‘구원’을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티나 속담에 ‘소경처럼 외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아주 크게 외친다’
‘창피하게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는 것입니다.
두 소경은 줄기차게 따라다니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더욱 괴로웠던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고된 여정에 지친 예수님께서 좀 쉬시려고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이 두 소경은 그 집 안까지 따라 들어와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이 두 소경에게 예수님의 측근들은 화도 엄청 냈을 것입니다.
그러지 말라고 여러 차례 경고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훨씬 완강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다가온 일생일대의 기회, 마지막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녕 한 번 새 삶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한번 눈을 떠서 광명의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 두 소경의 간절한 염원을 예수님께서 눈여겨보십니다.
무엇보다도 꼭 이루어지리라 믿고 목숨 걸고 달려드는 두 소경의 단순하지만 확고한 신앙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마침내 그들의 오랜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새 삶을 선물로 주십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는 이 두 소경 말고도 수많은 다른 소경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님께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행동이 따라주지 않았던 소경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저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며 그냥 지나쳐 버린 소경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소경은 간절히 원했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진실로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믿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새 삶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오늘 두 소경이 치유되는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당신 백성들을 향해 베푸시는 자비와 은총의 표현은 너무나 각별하고, 은혜로운 것이라는 사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든 사람을 살려놓고 보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초대하셨습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 건져내주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병고에 허덕이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 병고에서 해방시켜주려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만나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서 생명의 길로 되돌리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분은 정녕 생명의 하느님이셨습니다.
더욱 은혜로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총, 자비, 구원은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내 눈앞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청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라보는 눈앞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즉각적인 구원체험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다른 예언자나 지도자들처럼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좀 기다려보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예약부터 하십시다.
일주일 후에 만납시다, 라고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서, 바로 내 안에서 나를 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식스토 로드리게스는 2집 앨범까지 내고서 홀연히 사라지게 되고, 그의 열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팬 2명이 수소문하여 그를 찾아 나서는 내용입니다.
가수 로드리게스는 미국에서 인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단 6장만 팔릴 정도였지요. 그런데 우연히 그의 노래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 못지않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노래는 정치적 부패에 맞서던 이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지요.
이렇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사는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인기를 전혀 몰랐습니다. 저조한 음반 판매로 소속사와 계약 해지가 되었고 가수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그가 라이브 무대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신비적인 가수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음반을 발매한 미국에서는 그 어떤 인기도 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전혀 다른 공간에서는 엄청난 인기와 모든 이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
이 세상 안에서는 꼴찌의 삶이겠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이나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실 것입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을 뒤따라가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자비의 청을 목청 높이 외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앞을 볼 수 없어서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잘 확인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이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통해 커다란 자비를 얻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소경을 눈뜨게 해 주셨는데 그 조건으로 당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묻습니다. 믿음이 구원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대목이었습니다.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오늘의 명언: 백 살 가까이 나이가 드니까 나 자신과 내 소유를 위해 살았던 것은 다 없어져요. 남을 위해 살았던 갓만이 보람으로 남습니다(김형석).
라이벌 의식.
어느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처음에 조그맣게 시작했던 병원이지만, 입소문이 나서 계속 확장해서 꽤 큰 규모의 병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장은 몇 명의 의사를 채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다행히 새로 뽑은 의사들은 모두 성실했고, 환자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며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당연히 병원은 더 유명해졌고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몇몇 환자들이 원장님께 의사를 정말로 잘 뽑았다면서 새로 뽑은 의사들이 잘하고 있는 점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장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 의사들을 하나둘씩 해고했습니다. 환자들의 사랑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자기만 받아야 할 관심과 사랑이 동료 의사들에게 나눠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병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좋은 의사는 사라지고 원장에게만 아부하는 불친절한 의사만 남았습니다. 병원은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원장의 라이벌 의식 때문입니다. 굳이 갖지 않아도 될 라이벌 의식으로 힘든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과의 경쟁의식을 피해야 합니다. 그보다 나와 함께 할 협조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