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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묵상글 (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 일치와 친교를 원한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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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1.04 05:20
- 일치와 친교를 원한다면
오늘 독서는 필리피 교회 신자들에게 하는 바오로의 간절한 권고인데
내일 듣게 될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의 서문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일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듣게 될 텐데
그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고,
그렇기에 이 공동체는 가장 완벽한 일치와 친교를 사는 공동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치와 친교를 사는 공동체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이점에 주목합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라고 하는 점
다시 말해서 ‘하라’가 아니라 ‘받으라’라고 하는 점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하였다면
이것은 인간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인간적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라고 하니
이는 위로와 격려를 인간에게 받기보다 그리스도에게서 받으라는 것이고,
혹 인간의 위로와 격려를 받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라는 뜻이 됩니다.
위로와 격려를 우리가 서로 나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압니다.
위로와 격려를 인간에게서 받으려고 하면 받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받더라도 그 위로와 격려는 충분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로와 격려를 인간에게서 충분히 받지 못할 때
구차하게 계속 인간에게 매달리지 말고 즉시 주님께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옛날 제가 관구장 할 때 공부 때문이나 선교 때문에 외국에 있는 형제를 방문하면
혼자 있는 형제들이 둘이 있는 형제들보다 더 잘 지내곤 했는데 그것은
그가 의지할 사람이 없기에 힘들 때마다 주님께 위로와 격려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둘이 있는 형제들은 위로와 격려를 서로 받으려고 했는데,
둘 다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고, 서로 받으려고만 했기에
서로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었으며 그래서 서로 미워했지요.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서’를 얘기한 바오로는 ‘성령 안에서’를 얘기합니다.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쉽게 얘기해서 계 모임 같은 친교에 머물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성령 안에서 친교와 사랑을 나눠야 완전한 일치의 공동체를 이루지
계 모임 같은 친교와 사랑을 나누면 끼리끼리의 공동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셋째로 겸손할 것을 얘기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겸손한 마음, 이것이 내일 우리가 보게 될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친교와 일치를 살게 하는 우리 인간 편의 덕목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장 노력해야 할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 곧 가난한 자기를 아는 겸손에 늘 머물려고 노력한다면
그것도 그리스도의 겸손을 닮으려고 무진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노력에 상응하는 보답을 은총으로 주실 것입니다.
사실 겸손은 모든 덕의 기초 덕이고 사랑은 완성의 덕입니다.
겸손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덕도 쌓을 수 없습니다.
겸손이 없으면 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은, 시작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친교와 일치도 근본으로부터 불가능하게 됨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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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건축가는 건물을 만들지만, 완성 후에는 집주인에게 열쇠를 내주고 떠납니다. 요리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만, 정작 그는 제때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기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만들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잘 쓰지 않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수많은 직업이 바로 이런 모순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남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과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누구 때문에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분이 있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만나는 손님 때문에 힘들다고, 그래서 이제는 자기 일이 싫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리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던 어느 청년이 어느 유명 식당에 취직했습니다. 이 식당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서 성장하겠다고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선배 요리사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했습니다. 신입이라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선배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이 청년을 혼냈습니다. 결국 이 청년은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요리 자체가 싫어졌다고 합니다.
충분히 이 청년의 행동이 이해됩니다. 그런데 먼저 모든 일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싫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사람이 싫다는 생각이 들 때, 자기가 사랑하던 일조차도 싫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사람이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합니다. 더구나 우리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사랑에서 시작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실마리가 잡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원래 이런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뿐이 아니라 사람들이 초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특히 소외받는 사람도 따뜻한 손길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들에게 보답받지는 못하겠지만, 하느님께 보답받는다고 하시지요.
우리 삶에서도 나를 반대하는 사람 때문에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미워할수록 하느님께 받는 보답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큰 보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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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조금 헐렁하면 어떠냐 서툰 인생길 익숙해질 그날까지 묵묵히 뚜벅뚜벅 부지런히 가보자 멋지고 아름다운 내 삶과 인생을 위해(김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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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2-13)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곧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초대의 대상으로 제시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신앙행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고통 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주었다.”(마태 25,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새로운 복음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이다.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분명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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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14,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입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그리웠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성녀 소화데레사는 “나는 무엇이든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아무런 손해도 볼 수 없고, 또 남을 위해 치른 수고는 언제나 한결 좋게 하느님께서 내게 갚아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고 그들을 위한 행동은 보속이고 회개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섬김의 삶으로 나설 때입니다.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것보다 전적으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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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알다"라는 동사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알다"라는 말은 ‘사물의 본질을 이해한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것이 아름다움이 관련된 감정이나 개념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아름"은 "너그러움" 또는 "품격"을 의미하는 옛말로, 넓고 포용력이 있는 아름다움을 뜻했다고 합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아름답다"라는 말은 외형적, 내면적으로 훌륭하고 고귀한 것에 대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주로 자연경관, 사람의 외모, 마음씨 등 다양한 상황에서 긍정적이고 감동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름다움은 시각적 요소에 국한되지 않고, 마음의 따뜻함이나 인격의 훌륭함과 같은 내적인 측면도 강조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 "아름답다"라는 말은 단순한 외형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사람의 마음과 본질을 표현하는 의미로도 발전한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면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 많이 노력합니다. 성형, 피부, 보톡스, 화장품, 운동, 다이어트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꾸는 방법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내면의 모습이 아름다웠던 사람, 지난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김민기 선생님의 ‘아름다운 사람’의 가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꽃, 별, 구름, 개여울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천진한 아이의 웃음,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 하루 일 마치고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이 이상 더 아름다운 모습은 없을 겁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사제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의 글에 진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묵주 반지도, 시계도 끼거나, 차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묵주 반지나 시계를 선물해도 도로 주면서 대신 기도할 때, 시계를 볼 때 사제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손에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영해 줄 때, 반지나 시계가 먼저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온전히 성체를 먼저 볼 수 있도록 시계나 반지를 착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신부님이 미사를 정성껏 집전하시니 좋습니다.’라고 말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부족함에도 미사를 정성껏 집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오늘 드리는 미사가 생의 마지막 미사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미사를 집전한다고 합니다. 오늘 드리는 미사가 부모님의 장례미사라는 마음으로 미사를 집전한다고 합니다. 성사의 사효성(事效性)이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사제가 봉헌하는 미사는 비록 사제의 인품이나, 사제의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성사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성사가 된다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아름다운 사람의 삶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좀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으므로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하객들에게 축의금을 받으면서 그 축의금을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들에게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부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세계의 인구가 80억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많은 어린이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많은 장애인이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많은 병자가 고통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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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복음서를 읽다 보면 바리사이들이 주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 바리사이들의 경제적인 면이 어떠했는지 알 순 없지만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을 정도는 됐던 것 같습니다.
오늘도 한 바리사이가 주님을 초대합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뿐만 아니라 다른 바리사이들도 초대받아 왔던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주님은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말씀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초대할 때 다시 갚을 수 있는 이들을 초대하지 말고 갚을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초대를 받았던 이들에 대한 보답이 부활 때에 의인들에 의해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 때에 의인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인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복음에서 말하는 의인, 즉 의로운 사람은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 속의 의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바로 하늘나라 자체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에게 하늘나라를 보답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사이가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 그리고 소외된 자들에게 사랑을 베푼다면 말입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 또한 우리에게 잘 해주는 이들, 우리가 베푼 것보다 더 큰 것을 돌려줄 수 있는 이들에게만 사랑을 베풀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그대여! 그대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쌍한 이들에게 베푼다면 그대는 하늘나라를 선물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의인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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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들에게 위로를.....
언젠가 밖의 일을 보고 다시 이곳 강화도로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를 켰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멋진 곡들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희망과 위로를 주는 곡들입니다. 몇 곡이 흐르고, 라디오 디제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모든 리더를 위로하는 날입니다.
리더는 늘 외롭거든요.
리더는 이해받지 못할 때가 많거든요.
가장도, 사장님도, 이끌어가는 모든 리더들도….
모두에게 인정받고 이해받는 결정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리더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제각각 다르기에 모두에게 인정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외로움이 찾아듭니다.
모든 리더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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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의 여정
“주님 중심의 이타적 사랑의 삶”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131,3)
노벨문학상 작가 한강에 대한 간소한 삶에 대한 소개에서 성숙한 일면의 모습을 만납니다.
“그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술도 안마시고, 커피도 끊었고, 여행도 거의 않는다. 좋아하는 이들과 대화하고, 동네를 산책하고, 차를 마신다. 그의 삶이 더 좋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의 삶이 흥미롭고, 행복하고, 가치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에도 견주지 않고, 존재 증명을 위해 애쓰지 않는 삶, 과잉의 시대에 갇힌 우리는 간소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택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저항이 되지 않을까?”
삶은, 행복은 선택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성화의 여정을 택하여 하루하루 본질적 깊이의 단순한 삶을 사는 것도 지혜이자 행복입니다. 옛 어른의 지혜입니다. 마음공부는 성인공부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마음공부란 본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방향을 나은 쪽으로 돌리려는 노력이다.”<다산>
이래서 성화의 여정에 결적적 도움이 되는 마음공부입니다.
“욕심이 적다면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더라도 잃는 것이 적고, 욕심이 많다면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더라도 보존됨이 적다.”<맹자>
무욕의 지혜입니다. 욕심은 부단히 진리추구의 청정욕으로 전환시킴이 지혜입니다.
오늘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평신도 시절 22세 교황청의 강력한 신임을 받았으며 교황이 된 비오 4세 삼촌은 그를 밀라노 대교구장으로 임명합니다. 교황 비오 4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지닌 그는 강력한 교황 후보직을 내려놓고 밀라노의 대주교로서 주교문장의 "겸손(humilitas)"이란 말마디 그대로 겸손히 그의 책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교회차원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했으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진정한 종교개혁과 쇄신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주교좌 성당안에 있던 화려한 무덤들과 부유한 장식품들, 깃발 등을 사치로 규정하여 철폐함으로 성당 내부를 간소화했으며, 당시 교회가 무질서하고 세속화된 이유가 성직자들의 무지와 무능에 기인함을 깨달아 훌륭한 성직자들의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합니다.
주술과 이단과의 싸움에 온힘을 다하면서 교회를 수호했고, 말년에는 밀라노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귀족들이 흑사병을 피해 모두 도망쳤을 때도 끝까지 밀라노에 남아 병자들을 보호하고 치유하는데 온힘을 다했고 밀라노도 평온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보로메오는 오랜 극기와 과로로 소진되어 1584년 11월3일 밀라노에서 46세로 선종합니다.
“주님, 저는 여기 대령했나이다.”
주교님이 선종하기전 마지막 남긴 임종어입니다. 평생을 주님 앞에서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제 요즘 애송하는 단풍물든 장엄한 불암산을 보며 쓴,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짧은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언제 어디서든 사랑의 주님앞에서의 행복한 삶이면 참 좋겠습니다. 보로메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1610년 11월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성됨으로 그의 성덕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입증됩니다.
오늘 복음이나 독서 말씀도 주님 중심의 이타적 삶을 추구하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서로 주고받는 유유상종의 세속화된 이기적 삶이 아닌 온전히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아낌없이 나누는 이타적 아가페 삶을 살라 하십니다. 보로메오 성인도 이런 사랑으로 사목했음을 봅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말그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발적 이타적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도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누며, 같은 마음, 같은 사랑을 지니고, 서로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는 사랑의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권고입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2,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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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초대>
너의 것을
초대하였더니
너의 것을
가진
너마저도
오지 않더니
너를
초대하니
당신 닮게
널 빚으신
하느님께서
함께 오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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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식사에 초대받은 가난한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한 데 대한 백 배의 보상을 이승에서 언제 받겠습니까? 그 보상은 하느님께서 하시던 모든 일에서 쉬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이렛날, 곧 나라의 때에 주어질 것입니다. 그날이야말로 의인들의 참된 안식일, 지상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되며 하느님께서 차려 주신 온갖 맛난 음식으로 배불리 먹는 날입니다.
-이레네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우리의 하느님 담론이 하느님을 빠뜨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엑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을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엑카르트의 이 말은 피조물을 깎아내린 것도 아니고, 앞에서 행한 열 개의 설교를 부정한 것도 아니다. 엑카르트는 (존재는 하느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는) 단언신학의 전통과 (존재는 하느님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는) 부정신학의 전통 사이에서 그네를 뛴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이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엑카르트는 침묵을 권한다.
”사람이 하느님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은 내적 풍요의 지혜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러니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하여 마구 지껄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느님에 대하여 지껄이는 만큼, 여러분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흠이 없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에 대하여 떠들어 대지 마십시오. (272)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2테살 2,1-12 종말의 표징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가 그분께 모이게 될 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먼저 배교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무법자가 나타나야 합니다. 멸망하게 되어 있는 그자는
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과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들에 맞서 자신을 그보다 더 높이 들어 올립니다. 그리하여 신으로 자처하며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 잡고 앉습니다.
내가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이 일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금은 어떤 것이 그자를 저지하고 있지만, 그자는 자기 때가 되면 나타날 것입니다.
사실 그 무법의 신비는 이미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저지하는 어떤 이가 물러나야 합니다.
그러면 그 무법자가 나타날 터이지만,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입김으로 그자를 멸하시고 당신 재림의 광채로 그자를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그 무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작용으로, 그는 온갖 힘을 가지고 거짓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며,
멸망할 자들을 상대로 온갖 불의한 속임수를 쓸 것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여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을 속이는 힘을 보내시어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 자들이 모두 심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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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오래전 성악가 김청자님은 정년퇴임을 하고 아프리카 말라위로 떠났습니다. 그곳의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아이들을 돌보고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음악적인 탈렌트를 바탕으로 그들에게 봉사하며 인생 2막을 시작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뿌린 결실과도 같은 「루수빌로 희망 밴드」를 이끌고 귀국해서 음악회를 열었다고 하더군요. 그때 인터뷰에서 그녀는 담담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가장 많이 받은 자가 가장 많이 나누어야 하는 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저는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기에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사랑을 얻기 위해 달려온 길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완전하고도 영원한 사랑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마음도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영혼인 듯싶어서 부러움마저 듭니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그녀는 실행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우리의 초대를 받고, 그 보답으로 우리를 다시 초대할 수 없겠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들에게 베푼 모든 것은 그들을 대신해서 의인들이, 아니 하느님께서 훗날에 보답해 주신다고 암시하십니다. 사실 우리네 삶의 경험으로 볼 때, 보답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게 축복이고 행복이라고 봅니다. 예전 베트남에서 양성지도자로 생활할 때, 제가 살았던 수도원 인근의 심신 장애우들을 매년 성탄 때 초대해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함께 식사했었죠. 가난한 이들을 초대한다는 것은 많은 음식이나 선물을 준비하고 초대하는 것도 좋지만, 닫힌 문을 열어 집을 개방하고 들어오고 싶었던 수도원의 손님으로 초대받았다는 사실과 수도자들과 함께 미사도 봉헌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주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고자 하는 저희 수도자들의 따뜻한 마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나눔으로 정작 큰 기쁨과 행복은 초대받고 환대받은 그들보다 오히려 베푼 저희 자신들이 더 행복했습니다. 그들이 느꼈을 가장 큰 기쁨은 자신들이 받은 음식이나 선물보다 자신들을 하나의 인격으로 인정해 주고, 자신들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함께 공감해 주려는 저희의 마음이었으리라 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이 저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어떤 사람을 초대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초대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은 사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정치적이다, 고 말하더군요. 그러기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행위의 이면에는 허기진 이해득실을 동반한다고 말입니다. 이 경우 초대는 향응이며 대접입니다. 이처럼, 대인관계에서 초대와 초대의 수락은 이러한 이해득실의 계산에 기초합니다. 이런 초대는 복음적 초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에서 기인한 초대는 아무런 계산도 없이,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의 사랑을 필요한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랑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거나 보답받기 위해서 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는 것이고 나누는 것이며, 베푸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나눔은 본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상적인 사랑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식탁에 초대한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되받기 위해서나 보답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저 공짜로 무상으로 베푼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의 정신이 우리들의 사랑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김청자 교수는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에게 나이 들어가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게 아름다운 삶이고 행복한 삶인가를 실제 자기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받은 것을 움켜 지지 않고 베풀 수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러기에 줄 수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아낌없이, 대가 없이 베푸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먹는 것이 남는다는 표현처럼 베푸는 것이 사실 인생에 남는 것입니다. 어차피 빈손으로 갈 인생살이 베풀면서 하늘에 보화를 쌓아둡시다. 그날에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맡기면서.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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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착한 목자는 겸손해야만 /
박윤식 [big-llight] 2024-11-03 ㅣNo.177295
오늘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이다. 성인은 1538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아로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쌓는 데 힘썼다. 1560년 외삼촌인 비오 4세 교황께서 평신도인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시자, 그는 뒤늦게 성직자 교육을 받고 1563년에 사제가 되었다.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성인은 밀라노의 대주교로서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584년에 선종한 그를, 1610년 바오로 5세 교황께서 시성하셨다.
”나는 착한 목자다. 이렇게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에, 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면 아예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이리저리 물어 가고, 끝내는 양 떼마저 사방에 다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만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비유를 분명하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양들을 앞장서 간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안다. 그러나 낯선 이에게는 멀리 달아난다. 낯선 이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오면 구원 받고 풀밭도 찾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가롤로 보로메오 성인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지역에서 암브로시오 성인과 함께 크게 공경을 받고 있다. 성인이 활동하던 때 교회 밖으로는 프로테스탄트가 부흥하고 있었고, 교회 안으로는 부패와 불의가 넘쳐나는 상황이었다. 이때 성인은 밀라노 주교로서 트리엔트 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교회 개혁에 앞장섰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무질서하고 나태해진 것이 무지하고 게으른 성직자 때문이라고 생각해, 성직자의 윤리와 생활 태도를 개선하고자 온 힘을 쏟았다.
성인의 과감하고 엄격한 방식의 개혁은 당대 권력자들과 교회 내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 들에게 반발을 샀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개혁을 실행하여 교회의 쇄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주교 문장을 “Humilitas”(겸손)로 삼을 정도로 이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겸손함을 인정하고 존경할 정도였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실행하는 이는 겸손해야 한다. 겸손하지 않은 이의 말과 행동은 주위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가롤로 성인은 세상에 올바른 신앙과 윤리적 생활을 선포해야 하는 교회가 그 무엇보다 더 겸손해야 함을 설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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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헛된 것과 되돌아 올 것들에서 / 연중 제31주간 월요일(루카 14,12-14)스크랩 인쇄
박윤식 [big-llight] 2024-11-03 ㅣNo.177294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희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잔치를 베풀 때는 다만 가난한 이, 다리 저는 이,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자신을 좋아하는 이나 더 나은 이를 식사 등에 초대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반대 말씀을 하신다. 잔치에 초대하여 식사할 때에는 가난한 이, 장애인들을 더 초대하라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은 현세에서는 호의나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이들이라나. 예수님은 그들이 보답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대신 세상종말 그때에 꼭 갚으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신단다.
사회가 빈부의 격차가 더 양극화될수록 가난한 이, 약자들에 대한 손길은 예전보다는 더 필요할 게다. 요즈음 기부가 다소 좀 늘었다지만, 여전히 인색하단다. 조건 없는 사랑이라지만, 그렇게 희생하는 일은 드물다. 누군가를 도울 때, 같은 물질적인 대가를 바라는 게 일종의 거래이리라. 언젠가 그가 도와 줄 것이란 전제가 숨어 있기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후일을 도모하는 이러한 거래 형태의 선행은,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언급하신다.
사실 주변의 버려진 그런 이들을 무시하지 않는 것 자체가 어쩜 돕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 자체가 초대하는 행위일 게다. 조금 낫다고, 조금 높은 위치에 있다고 쉽게 무시하려 들지만, 그래서는 결코 안 된다. 무시하면 그 당하는 이는 금방 느끼게 되어 있을 테니까. 어떤 경우에도 자존심 상하게 해선 안 된다. 그게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사는 지혜이다. 그들이 보답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보답하신다니까. 은총이 그와도 함께하기에.
성령이 함께하는 교회는 친한 이들만이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부유하고 학식과 지위를 가진 이들만이 특별 대접받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 초대받고 아픔과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이 더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는 공동체의 자리여야 할게다. 우리가 이를 실천하는 데 얼마나 주저하고 굼뜨며, 오히려 변명 거리를 찾기에 급급한지! 이에 가끔은 부끄러움이 앞선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계명인 무조건적 사랑실천에 철저히 뿌리박힌 종교이다. 하느님은 무한한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이웃과 친교를 나누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신앙인이다. 자기 것 돌보는 만큼이나 남의 것 돌보는 일은,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되돌려 드리는 일이리라. 자신에게 보상을 가져다주는 이들만 친구나 이웃으로 삼지를 말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를 이웃으로 삼고 그들을 식탁에 초대하고자 실천하자.
이처럼 우리가 아무것도 요구할 것이 없는 이들의 목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먼저 더 배려하고 보살피려는 삶을 살자.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으뜸 가르침이다. 예수님 가르침도 그렇게 하는 자만이 의인들이 부활할 때 보상을 받는단다. 그러나 내 능력을 과시해 훗날 보답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면, 우리가 예수님의 참 제자라 할 수가? 베푼 건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훗날 언젠가는 다시 받을 것을 것임을 분명히 기억하자. 지상의 것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만, 지상서 나눈 것은 죽음과 함께 반드시 되돌아옴을 되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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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가롤로 보로메오 성인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지역에서 암브로시오 성인과 함께 크게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성인이 활동하던 때 교회 밖으로는 프로테스탄트가 부흥하고 있었고, 교회 안으로는 부패와 불의가 넘쳐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가롤로 성인은 밀라노 주교로서 트리엔트 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교회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교회를 쇄신하고자 민감한 문제들도 두려움 없이 다루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무질서하고 나태해진 것이 무지하고 게으른 성직자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성직자의 윤리와 생활 태도를 개선하고자 힘썼습니다.
성직자 교육을 위하여 신학교를 세우고, 평신도들의 교리 교육을 위해서도 애를 썼습니다.
또한 교구와 본당 운영에 대한 행정 체계를 재조직하고 사목 방문을 정례화하였습니다.
과감하고 엄격한 방식의 개혁은 당대 권력자들과 교회 내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 들에게 반발을 샀습니다.
이러한 반발에도 흔들림 없이 개혁을 실행하여 교회의 쇄신을 이룰 수 있게 한 덕목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그는 주교 문장을 “Humilitas”(겸손)로 삼을 정도로 이 덕목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겸손함을 인정하고 존경할 정도였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행하는 이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가롤로 성인은 세상에 올바른 신앙과 윤리적 생활을 선포해야 하는 교회가 그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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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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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할 때
보답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진 선을 베풀 때
그것을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말하는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표현된 행복은
예수님께서 참행복을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한데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때만큼이나
행복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베푼 선을 그가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보답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행복은
그것을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베푼 선을 하느님께 돌려받는다면
사람에게 돌려받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돌려받으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느님께 보답을 받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보답해 주신다고 했을 때는
내가 베푼 것 이상으로 받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사람들에게 10개를 주었을 때
하느님께 10개 이상, 예를 들면 100개를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하느님의 보상은
물질적인 것을 넘어
하느님 자체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그분과 함께 사는 기쁨
즉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선을 베풀면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을 베풀 때
그 선은 이미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미 하느님과 관계가 맺어져 있고
선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은
그 관계가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고
나눔을 통해
내가 하느님의 나라에 있음이 드러납니다.
오늘 하루도 선의 나눔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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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같이 식사합시다!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제 어린 시절 걸인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추운 겨울 다리 밑 같은 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깡통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 좀 주이소!’라고 외쳤습니다. 재수가 좋아 마음씨 좋은 마나님을 만나면 밥과 반찬을 좀 얻어서 대충 요기를 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분들에게 가장 기쁜 날은 혼례 날이나 회갑, 칠순 잔칫날이나 아니면 상이 난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 잔치의 주인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오가는 행인들이나 걸인들에게도 넉넉한 한 상을 차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인들은 나름 달력을 하나 만들어 이 마을 저 마을 잔칫날을 미리 메모해서 허기를 달래곤 했습니다.
식사 한끼 함께 나눈다는 것, 별것 아닌 듯 하지만 엄청난 위미를 지닙니다. 식사를 아무하고나 하지 않습니다. 주로 가족들과 함께 합니다. 살짝 범위를 넓히면 친지들, 친구들, 동료들과 마음 편히 하는 것이 식사입니다.
유다 전통 안에서 식사(食事)에는 아주 큰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잔치나 축제 때에는 ‘ㄷ’자 모양의 식탁이 준비되었고, 3면에는 의자가 놓였습니다. 비어있는 공간으로는 종들이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포크나 나이프같은 식사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음식을 먹었기에,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식사 전후 기도는 필수였습니다. 별도의 개인 접시는 준비되지 않고, 큰 그릇에 빵이나 요리가 담겨나오면,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스프나 국은 빵에 적셔 먹었습니다.
잔치집에서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큰 친밀함과 친교의 표현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의 잔치상에 이왕이면 귀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을 초대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복음 14장 13~14절)
사실 과거 유다인들에게 있어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냉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될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규정으로 인해, 당시 장애인들이 받았던 싱처와 고통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지체장애인들은 꿈란 공동체에 편입될 수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 청각장애인들은 성전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초세기 교회 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바오로 사도께서 크게 분노하신 흔적이 서간 안에 남아있습니다. 코린토 교회 신자들의 경우, 만찬 식탁에서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벌어졌습니다. 폭식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굶주린 채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코린토 전서 11장 20~22절)
잔치집 식탁에서 벌어지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직접 보신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초대를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사심없는 봉사를 실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베풀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심없는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큰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라는 은혜로운 선물이 상급으로 부여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피안(彼岸)에서의 보상을 기대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이 부단히 이 세상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에 고정시키라고 당부하십니다.
지상의 권세는 하느님의 때가 오면 약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의 약함은 하느님의 때가 오면 그분의 힘에 의해 큰 권능으로 바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나약하고 부족해보이는 사람들이 내적,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훨씬 부유한 능력자 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을 강하게 해주시고, 신앙의 빛은 그들에게 참 지혜를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저도 요즘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운영하는 피정 센터가 가장 환대하고 극진히 모셔야 할 첫 번째 VIP 손님들은 과연 어떤 분들이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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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선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랑과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바로 당신이 공생활 중에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하셨듯이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하신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팔을 벌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에 대한 보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모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형제애로 서로 나누며 살아가라 하신다. 나눔을 통하여 그 사람은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되며, 하느님께서는 더욱 풍성히 갚아주실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이 세상에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이 있는가? 거의 없다. 이 지상의 삶에서 쌓아두고 감추어 둔 것은,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시에 인연을 마감하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따라, 그분이 그것을 나에게 맡겨주신 뜻에 따라서 올바로 관리하고 주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잘 사용하게 되면, 그래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눈 것은 나의 죽음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모든 것이 나를 반기며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할 것이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매 순간 깨어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것은 아주 작은 사건이나,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에서조차 우리는 그것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을, 나의 시간을 그들과 나눔으로써 더 큰 성숙을, 기쁨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사랑과 봉사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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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음이 있다면 선행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갚을 수 없으므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보답할 수 없다면 당신께서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하지 않고는 배기지 않습니다.
선행이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에게 칭찬받지 못했다면 부모는 10배로 더 칭찬해 줍니다.
우리가 선행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자선 활동은 그의 거대한 부와 성공에서 비롯된 ‘책임감 있는 부의 사용’이라는 원칙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19세기 미국 철강산업을 이끌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는 결국 역사상 가장 큰 자선 활동 중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평생의 재산을 교육, 예술, 도서관 건립, 과학 연구 등에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자선 활동으로는 미국 전역에 약 2,500개의 공공 도서관을 설립한 것과 카네기 멜런 대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을 세운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자선 활동이 단순히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한 수단이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여러 건물과 기관을 설립하며 이를 통해 스스로를 기억되게 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카네기 홀(Carengie Hall), 카네기 재단 등의 이름에서 보듯이 그의 자선 사업은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남기려는 목적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카네기의 자선 활동은 한편으로 그가 축적한 부의 이면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카네기는 대규모 철강 회사인 카네기 스틸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을 극도로 착취했습니다.
그가 철강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희생이었는데, 그는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과 긴 노동 시간을 강요하며, 심지어 무력으로 파업을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가 쌓은 부가 진정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자선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카네기는 평생 수십억 달러를 기부했지만, 그의 자선 활동은 여전히 자기 명성 추구와 도덕적 갈등이라는 논란을 안고 있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자선가’와 ‘냉혹한 자본가’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공한 기업가들이 제일 존경하는 롤모델로 꼽을 때 앤드류 카네기보다는 찰스 피니(Charles ‘Chuck’ Feeney)가 많습니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자신들이 기부하게 된 롤모델로 주저 없이 척 피니를 듭니다.
피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며, 그의 삶과
자선 활동은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병원 간호사로, 이웃과 주변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고 항상 남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행동은 어린 피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자신의 부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신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남을 도울 때 가톨릭 신자답게
자신이 한 행동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어린 피니가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다운 선행은 드러내는 게 아니야. 그러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잖아.”
피니는 성인이 된 후 듀티 프리 쇼퍼스 그룹(Duty Free Shoppers Group)을 공동 창립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를 과시하지 않고, 철저히 검소한 삶을 살며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기(Giving While Living)’라는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하기 위해 1982년 애틀랜틱 필랜스로피스(The Atlantic Philanthropies)를 설립하고, 교육, 과학, 의료 분야에 약 80억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피니의 기부는 대부분 익명으로 이루어졌고, 1997년 우연히 나라에서 감사받게 되면서
드러났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집과 차도 없었습니다.
집도 임대 주택이었으며 시계도 2만 원짜리, 비행기도 이코노미석만 탔습니다.
그가 이렇게 살면서 행복했을까요? 피니는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면 행복하고,
그렇지 않다면 불행하다.”라고 말하며, 타인을 돕는 것이 자신의 행복의 원천임을 강조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럽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굳이 자선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부러라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어머니가 보고 계시고 하느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플 때 부모는 그 아픈 자녀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도 보상받지 못한 선행에 대해 직접 당신이 나서서 성령을 주십니다.
이 맛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선행을 알림으로써 성령의 보상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됨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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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편 가르기와 차별 대우는 ‘큰 죄’입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ㄴ-14).”
1)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참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신앙인은 편 가르기를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편 가르기’ 라는 문제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을 엄하게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러분이 교회 모임을 가질 때에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에 분파도 있어야 참된 이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한데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17-22).”
부자들끼리만 어울려서 배불리 먹고, 가난한 이들은 배고픈 상태로 소외된다면, 그것은 공동체도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라는 말씀은, 그들‘만’ 부르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보답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베풀지 마라. 보답을 받을 생각으로 베풀지 마라.”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는, 그들‘도’ 초대하라는 뜻입니다.
굳이 순서를 따진다면, “소외계층 사람들을 ‘먼저’
초대하여라.”, 또는 “함께 초대하여라.”입니다.
<‘나중에’는 결코 아닙니다.>
내가 부유한 이웃들과 가난한 이웃들을 ‘함께’ 초대해서, 나의 집에서 그들이 모두 함께 어울리고, 함께 기뻐하게 된다면?
그러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나의 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는 부유한 사람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어떤 차별이나 소외 같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3)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는, “그들은 너에게 보답할 수 없겠지만, 너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소외계층 사람들을 초대한 일은 ‘의로운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로운 일’을 실행한 사람들은 의인들이고,
의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일 하나만으로 의인이라고 인정받는 것은 아니고, 진짜 의인이라면 평소에 늘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4.8-9).”
사랑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고 실천하기’입니다.
내가 차별을 당하고 소외당하는 입장에 있다면?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모습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한 마음과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의 모습인가?
베푸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형식적으로 조금 하고 나서, 자기들은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뿌듯해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지는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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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4,12-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유다인들의 전통 안에서 식사(食事)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 서로 특별한 친교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내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식사 자리에 고귀한 사람,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을 초대하여 그와 가까워지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깜짝 놀랄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니... 참으로 놀랍고도 신선한 사고방식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give and take”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지다 못해 그렇게 하는걸 당연한 일로 여기지요. ‘내가 너에게 이만큼 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이만큼 주어야 한다’며 조금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함께 해봐야 이득 될 것이 없어보이는 사람과는 아예 관계 자체를 맺으려고 들지 않기도 합니다. 내가 투자한 노력과 시간의 양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관계도 식사도 가능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재물과 물질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인간관계 마저도 ‘거래’로 전락해버린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give and take”는 누구라도 실행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그런 삶의 방식은 우리 구원에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못하지요. 하느님 나라에서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보답이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누고 베푸는 모든 것은 원래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소유이니 보답을 받아도 내가 아니라 그분께서 받으셔야 하는 겁니다. ‘집사’인 우리가 아무리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고 한들 자기 것으로 베푼게 아니기에 다른 이들 앞에서 생색낼 이유도, 자기 행동에 대한 보상을 당연한 듯 하느님께 요구할 권리도 없지요. 우리에게는 그저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실히 일한 것 자체가 영광이 되고 보상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충실하게 수행한 착하고 성실한 종에게 더 충만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보답이라는 말도, 대가라는 말도 다 우리 인생의 사전에서 지워버려야겠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으시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는데, 우리가 뭐라고 하찮은 선행에 대가를 바라겠습니까? 지금은 그저 하느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데에만 전념합시다. 하느님께서 세상 종말의 순간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실 구원의 잔치를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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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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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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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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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아침을 여는 묵상
11월 3일 오후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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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삶
<2024.11.4> 아침을 여는 묵상 (딤전 2:8~15절)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삶❞
❚ 성도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을 전파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나타내며 살아야 합니까?
➲ 공동체에 거룩함을 나타내야 합니다(8절).
바울은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남자와 여자의 태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두에서 남자 성도의 기도 자세에 대한 지침이 주어집니다. 특별히 남자들에게 하는 권면은 분노와 다툼 없이 하라는 것이며, 손을 들어 경건하게 기도하기를 바란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으로 모이는 곳에서는 남자들이 대표로 기도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익하고 공연한 논쟁으로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일은 삼가며 오직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일만이 공동체를 위하여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은 도덕적으로 순결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더러운 세속적인 것들과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거짓된 가르침과 이단자들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보다 남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도덕적으로 정결한 삶을 사는 가운데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손을 들어 기도하는 자세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 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거룩함을 공동체에 나타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공동체에 선행으로 나타내야 합니다(9~10절).
바울은 남자들의 분노와 다툼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의 여자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단정한 옷을 입고 소박함과 정절로 자기를 단장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보이려고 머리에 요란한 장식을 달거나 보석과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고, 오히려 선한 일을 해서 아름다움을 가꾸어 가라고 명합니다. 신앙의 정절뿐 아니라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순결함과 성실함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은 화장이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이 아니라 그들의 착한 행실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선행은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하는 성령의 열매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마땅한 결과입니다.
여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교회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유대교와 비교할 때 훨씬 진보된 여성의 지위를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교회에 나올 때 무엇보다도 소박함과 정절로 자신을 단장하고 진실함으로 선행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나 외모보다는 내면의 진실함과 능력을 요구합니다. 나아가 겸손과 섬김, 선행과 사랑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선 자로서 마땅한 겸손과 섬김의 삶을 통해 우리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공동체에 겸손함을 나타내야 합니다(11~15절).
바울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여성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가르치지 말고... 오직 조용할지니라...’(11~12절)라고 말합니다. 여자들에게 굉장히 불합리하게 들리는 언사를 사용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여성 사역자들이 있었는데, 그 여성 사역자들은 사역자들다운 삶보다는 화려한 옷을 입고, 겉으로만 치장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넘어가 속임을 당하고 미혹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영을 받았다고 하며 이방 종교의 여사제들처럼 황홀경에 빠져 남자들에게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거나 지배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신전에서 몸을 파는 사제들을 연상케 했습니다. ‘해산’은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며, 선한 행동을 통하여 공동체의 덕을 이루는 일을 말합니다. 즉, 무지하고 교만한 마음은 공동체를 파괴하지만 건전하고 겸손한 마음은 공동체의 질서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해산을 통하여 여자들이 이 땅에 생명을 내듯이 선한 행실로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는 세상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지만, 또한 세상 사람들과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속에서 구별된 삶 그렇지만 그들을 위하여 선행을 실천하는 겸손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궁극적으로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이 십자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힘쓰므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다투는 일에 헛된 힘을 빼지 말고, 모든 사람이 십자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힘써 전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 마땅한 겸손과 섬김의 삶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딤전 2:8~1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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