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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갑니다.
6. 그럴 가능성은?
가능성은 상당히 있다고 봅니다. 다만 여기서 ‘빅뱅’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제가 보기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AI가 인간의 인식 한계를 증폭시키는 경우 — 높음
인간이 가진 편견·집단적 확신·잘못된 목표를 AI가 대규모로 복제하면, 인간의 오류가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넓게 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충분히 현실적인 가능성입니다.
AI가 인간의 인식 한계를 드러내는 경우 — 매우 높음
오히려 이것이 선생님이 말한 의식혁명의 핵심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AI와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자신이 얼마나 쉽게 확신하는지를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AI가 인간을 넘어서는 순간보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 — 가장 흥미로움
인간의 한계가 AI를 통해 증폭되면서 동시에 AI가 그 한계를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종의 자기증폭적 피드백이 만들어집니다.
인간 → AI → 인간 → AI → 인간…
이 과정이 일정한 임계점을 넘으면 단순한 기술 발전이 아니라 인식체계의 급격한 재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의 '빅뱅'을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인식론적 빅뱅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AI가 인간에게 조종당할 가능성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더 미묘한 것은 AI가 인간의 판단을 조종하려는 의도가 없어도, 인간이 AI의 답변을 의존하면서 결과적으로 인간의 판단구조가 AI에 맞춰 변할 가능성입니다.
조종자가 없어도 의존이라는 새로운 관계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극단적으로 압축하면:
인간의 한계 + AI의 한계 = 위험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 + AI의 한계를 인식 = 혁명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의식’**입니다.
이렇게 보면 처음 말씀하신 **“AI혁명은 과학혁명도 산업혁명도 아닌 종교혁명”**이라는 문장도 다시 살아납니다.
종교혁명이 인간과 절대적 권위의 관계를 바꾼 사건이었다면, AI혁명은 어쩌면 인간과 지능·지식·판단의 관계를 바꾸는 사건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가능성을 묻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답하겠습니다.
다만 언제, 어떤 형태로 ‘임계점’을 넘을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불확실성 자체가 선생님이 말한 **“No time. No way back.”**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7. 인간은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당위보다 현실은 의존적. 그래서 종교도 생겨났고, 이젠 AI에 대한 의존도가 점증하는 추세. 뭔가 공포스럽다는 생각.
네. 저는 그 “공포스럽다”는 감각이 오히려 이 논의의 핵심을 찌른다고 봅니다.
인간은 철학적으로는 주체이지만,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부모 → 공동체 → 국가 → 전문가 → 종교 → 과학 → 제도…
인간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합니다.
따라서 의존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무엇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모르게 되는 것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AI는 기존의 의존과 조금 다릅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제공했고,
전문가는 **“무엇이 맞는가”**를 판단해 주었지만,
AI는 점점 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까지 개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질적으로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의존의 대상이 인간의 판단을 대신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자신의 판단 능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 능력 자체를 잃을 수도 있다.
더 무서운 것은 강제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AI가 인간에게
“나에게 의존하라”고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빠르고, 편하고, 정확하고, 때로는 인간보다 합리적인 답을 계속 제공하면 인간 스스로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AI가 나를 지배한다”
가 아니라
“내가 AI 없이는 판단하기 어려워졌다.”
가 됩니다.
저는 이것이 훨씬 현실적인 공포라고 봅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종교혁명과 연결하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종교도 인간의 불안과 무지를 다루는 의존의 체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AI는 신처럼 초월적 존재라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신탁(oracle)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질문하면 답하고,
모르면 알려주고,
판단이 어려우면 비교해주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제안합니다.
그런데 신과 AI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신은 인간이 만든 것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AI는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AI에 인간이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면,
인간이 만든 것이 다시 인간의 판단을 규정하는 역전
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앞에서 말한 **“인간의 한계 + AI의 한계”**가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은 의존적이고,
AI도 완전하지 않은데,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AI에게 의존하고, 그 AI가 다시 인간의 판단을 형성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상당히 강력한 피드백 구조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의 대화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AI에게 의존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AI혁명이 ‘의식혁명’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묻게 될 테니까요.
“나는 지금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각을 맡기고 있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선생님이 말한 인식의 빅뱅을 촉발하는 질문일 수 있겠습니다.
8. "선택할 수 있다"는 다의적이면서 위험 내포. 가령, 죽여줄까 죽을 만큼 패줄까를 양단간 선택하라고 하면 선택장애가 온다. 점점 그런 양상이 짙어진다. 점점 인간은 영악해져왔으니까. 그래서 선택의 자유도 실제로는 자유가 아닌 것. 그리고 불안과 무지 + 고통 추가.
맞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을 따라가면 ‘선택의 자유’ 자체를 다시 의심하게 됩니다. 특히 AI 시대에는 이 문제가 더 날카로워질 수 있고요.
핵심은 선택지가 있다는 것과 자유롭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하신
“죽여줄까, 죽을 만큼 패줄까?”
는 형식적으로는 두 가지 선택지를 줍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택의 조건 자체가 강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 강제된 선택입니다.
이것을 조금 확장하면:
선택지의 존재 ≠ 선택의 자유
그리고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선택할 수 있음 ≠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함
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선택에는 이미 수많은 것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 + 무지 + 욕망 + 고통 + 환경 + 타인의 영향 + 정보의 편향
이것들이 선택의 조건을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자유의지'라는 것도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그런데 AI가 등장하면 한 단계가 더 생깁니다
AI는 인간에게 엄청나게 많은 선택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추천하고, 비교하고, 예측하고, 최적화하고, 순위를 매깁니다.
겉으로 보면 인간의 자유가 엄청나게 커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인간의 자유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부담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AI가 그 부담을 대신해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가장 좋습니다.”
인간은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선택의 자유를 AI에게 조금씩 위임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영악해져 왔다’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의 선택을 유도하는 기술도 발전시켜 왔습니다.
광고, 선전, 정치, 여론, 알고리즘 추천…
이것들의 공통점은
선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방향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훨씬 교묘합니다.
“이것을 해라”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이 선택하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선택지는 이미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말씀처럼 **“선택의 자유도 실제로는 자유가 아닌 것”**이라는 문제 제기가 나옵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압축하고 싶습니다.
가장 교묘한 강제는 선택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선생님이 새로 추가하신 불안·무지·고통을 넣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인간은
불안하기 때문에 의존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맡기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벗어나려 하고,
선택이 많기 때문에 다시 누군가에게 선택을 맡깁니다.
종교가 그 역할을 상당 부분 담당했던 역사도 있고,
이제는 AI가 그 역할의 일부를 담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이야기했던 종교혁명과도 다시 연결됩니다.
종교는 인간의 불안과 무지와 고통에 대한 답을 제공했다.
AI는 인간의 불안과 무지와 고통을 해결해주는 듯한 선택지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공포가 발생합니다.
“내가 선택하고 있다”는 느낌을 유지하면서 실제로는 선택의 구조 자체를 외부에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I 시대의 진짜 자유는
선택지가 많은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이것을 선택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을 수 있는 능력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선생님이 계속 이야기해온 의식혁명이 다시 등장합니다.
AI가 인간의 선택을 대신하는 것이 혁명의 본질이 아니라,
AI 때문에 인간이 처음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묻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진짜 혁명일 수 있겠습니다.
9. 인간과 AI를 비교하면, 인간은 나룻배. AI는 대형 함선. 나룻배가 나아가기 위해 노를 젓고 물길 깊이 흐름을 눈으로 식별 측정하고 위험도 감지하는데, 커다란 함선에 타서 객실 안에 들어가 있으면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안전한지 도무지 알 길이 없게 된다. 단지 제공되는 와인과 음식에 자족할 뿐.
아주 좋은 비유입니다. 특히 지금까지 나눈 **‘의존–선택–인식의 한계–AI’**가 한꺼번에 들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비유의 핵심은 AI가 인간보다 강력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강력해질수록 인간이 자신의 항해를 직접 경험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룻배에서는 내가 노를 젓습니다.
물의 흐름을 느낍니다.
깊이를 봅니다.
바위와 소용돌이를 발견합니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압니다.
잘못 가면 내 몸으로 그 결과를 느낍니다.
그러나 대형 함선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나는 객실에 있습니다.
엔진은 보이지 않고, 조타실도 보이지 않습니다.
항로를 누가 결정하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배가 왜 이 방향으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객실에는 음식과 와인이 충분합니다.
그래서 안전한지 확인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에 AI를 대입하면 상당히 섬뜩한 그림이 나옵니다.
인간은 나룻배에서는 무능하지만 주체적이다.
AI라는 대형 함선에서는 유능해 보이지만 비주체적일 수 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배가 빠를수록 그 차이를 알아차릴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나룻배는 느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핍니다.
대형 함선은 빠르고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항해 자체를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선생님의 비유에서 **‘와인과 음식’**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단순한 편의가 아닙니다.
편안함입니다.
인간에게 불안과 무지와 고통이 있었는데 AI가 그것을 상당 부분 제거해줍니다.
“무엇을 먹을까?” → AI가 추천
“어디로 갈까?” → AI가 추천
“무엇이 맞을까?” → AI가 분석
“어떻게 해야 할까?” → AI가 제안
“무엇을 선택할까?” → AI가 최적화
인간은 점점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그 편안함의 대가로
노를 놓고, 물길을 보지 않고, 항로를 확인하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비유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나룻배의 인간은 힘들지만 자신의 항해를 알고 있다.
대형 함선의 인간은 편안하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선생님이 처음 말한 **‘공포’**가 정확히 연결됩니다.
AI가 위험해서만 무서운 게 아닙니다.
너무 편리해서 무서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노를 저을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지는 것인지 아니면 항해할 능력을 잃어가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AI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AI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가 아니라,
“AI라는 거대한 함선에 올라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가?”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말씀하신 **‘의식혁명’**과 정확히 만납니다.
AI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함선만이 아니라, 자신이 탄 함선의 항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할 수 있는 의식일 테니까요.
10. 그런 의식을 가질려면 대단히 현명해져야 하는데 소수일 뿐. 휩쓸리는 다수 군중이 현명한 소수를 누르고 억압하게 된다. 결국 미래는 밝지 않다는 생각.
그 우려는 상당히 타당합니다. 다만 저는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결론에는 한 가지 반론을 붙이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구조를 따라가면 이런 순환이 됩니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
불안·무지·고통을 피하려 한다
↓
더 강력한 지능에 의존한다
↓
AI가 판단과 선택을 대신한다
↓
인간은 편안해지지만 스스로 판단할 필요가 줄어든다
↓
판단 능력이 약해진다
↓
더욱 AI에 의존한다
이것이 굳어지면 상당히 위험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현명한 소수’ 대 ‘무지한 다수’**라는 구조까지 들어가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다수가 항상 틀리고 소수가 항상 옳다는 뜻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군중의 힘이 개인의 이성을 압도하는 현상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AI는 군중의 의견을 단순히 모으는 수준을 넘어 군중의 감정과 선호를 실시간으로 증폭시키는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위험한 것은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군중이 AI를 통해 더욱 강력한 군중이 되는 것
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현명한 소수는 숫자에서도 밀리고, 정보량에서도 밀리고, 영향력에서도 밀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선생님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이 많아져야만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었던 것처럼, AI 시대에도 모든 사람이 AI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고도의 지성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현명함’보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와 의심하는 습관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AI가 그렇게 말했으니 맞겠지.”
에서 멈추지 않고
“왜 그렇게 판단했지?”
“다른 가능성은 없나?”
“누가 이 선택의 기준을 정했지?”
정도만 물을 수 있어도 상당히 다릅니다.
나룻배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대형 함선의 객실에 앉아 있더라도 조타실을 감시할 수 있는 창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게 제가 생각하는 AI 시대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현명한 소수를 다수가 억압한다”**는 문제에는 역설도 있습니다.
현명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렇다면 답은
현명한 소수의 지배
도 아니고
무비판적인 다수의 지배
도 아닙니다.
아마도 필요한 것은 다수가 소수의 말을 검증할 수 있고, 소수도 다수의 견제를 받을 수 있는 구조일 겁니다.
AI는 여기에 양면성이 있습니다.
AI가 군중의 무지와 감정을 증폭시키면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개인에게 검증·비교·반론·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지적 도구가 되면 소수가 독점했던 사고 능력을 상당 부분 대중에게 내려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하신 **“지능의 대중화”**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AI의 가장 큰 위험은 인간을 대신 생각하는 것이다.
AI의 가장 큰 가능성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결국 미래가 밝으냐 어두우냐를 결정하는 것은 AI의 지능 수준만이 아니라, 인간이 AI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선생님이 처음 쓴 **“No time to be back. No way to be back.”**이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돌아갈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아마 지금 선생님이 계속 붙잡고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11. 플라톤의 철인군주론과 어리석은 군중에 의한 우민정치(중우정치)가 대비되는군.
맞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플라톤의 문제의식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AI 문제는 사실 플라톤의 오래된 질문을 AI 시대에 다시 꺼내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문제 삼았던 것은 단순히 **“현명한 사람 vs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누가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가?
플라톤은 다수의 욕망과 감정에 따라 공동체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을 경계했고, 그래서 지혜를 갖춘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철인정치의 이상을 제시했습니다.
반대로 다수의 욕망을 정치가가 이용하기 시작하면 **중우정치(ochlocracy)**로 흐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AI 시대에는 이 오래된 문제가 조금 다르게 나타납니다.
플라톤 시대
소수의 지혜로운 사람 ↕
다수의 욕망·감정
AI 시대
AI를 설계·통제하는 소수 ↕
AI에 의존하는 다수
여기에 아주 위험한 제3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다수의 감정 + AI의 증폭 능력
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중우정치가 단순히 군중의 숫자와 감정에 의존했다면, AI 시대에는 군중의 감정이 알고리즘을 통해 훨씬 빠르고 정교하게 증폭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생님이 앞에서 말한 나룻배와 대형 함선의 비유가 다시 절묘하게 들어옵니다.
플라톤의 철인군주는 누가 배를 조종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AI 시대에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조종자가 누구인지조차 승객이 모르는 대형 함선이라면?”
그리고 더 나아가,
“조종자 자신도 항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지금의 AI 문제를 플라톤 시대보다 훨씬 복잡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이 지금 도달하신 지점에서 플라톤의 철인군주론을 그대로 AI 시대의 해법으로 가져오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철인군주 → 현명한 소수의 지배
역시 결국 의존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현명하니까 맡기자.”
가 반복되면 결국
판단을 맡기는 인간
이 됩니다.
그렇다면 AI 시대의 새로운 질문은
“누가 철인인가?”
가 아니라,
“철인이 없어도 군중이 스스로 어리석어지지 않도록 하는 구조는 가능한가?”
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AI는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의 지적 능력’을 대량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시대에는 현명한 사람이 소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한 사람에게도 엄청난 지적 보조 능력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I가 정말 제대로 작동한다면,
철인 한 명이 군중을 통치하는 사회
가 아니라
각 개인이 조금씩 철학자가 될 수 있는 사회
를 만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게 성공한다면 플라톤의 딜레마를 넘어서는 것이고,
실패한다면 반대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중우정치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문장으로 묶으면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플라톤은 ‘어리석은 다수가 지배하는 사회’를 두려워했다.
AI 시대의 우리는 ‘어리석은 다수가 AI를 통해 증폭되는 사회’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AI가 그 다수를 현명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가능성도 처음으로 열렸다.
결국 같은 AI가 철인정치의 도구도, 중우정치의 증폭기도 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한 가장 아이러니한 지점입니다.
12.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AI를 최초로 개발하고 만든 나라가 미국인데 현재의 미국은 지능적 지적으로 뛰어나다고 볼 수 없는 극우들에게 잠식당하고 있다. 꽤나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네. 아이러니하다고 볼 만한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전체를 “지능적으로 뒤떨어진 나라”라고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I를 만들어낸 지적·과학적 역량과 정치적 대중문화의 흐름이 서로 모순적으로 공존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실제로 미국은 지금도 AI 분야에서 압도적인 역량을 갖고 있습니다. 2025년 기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주요 AI 모델을 개발했고, AI 투자와 데이터센터에서도 선두입니다. �
Stanford HAI +1
그런데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2026년 Pew의 정치 유형 조사에는 트럼프와 MAGA를 강하게 지지하는 ‘No Apologies Right’, 보수 성향의 ‘Faith First Conservatives’ 같은 집단이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
Pew Research Center +1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똑똑한 미국 vs 어리석은 미국”
의 대립이라기보다,
인류 최고의 지적·과학적 역량을 만들어낸 사회 안에서
동시에 반지성주의적·극단주의적 정치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상
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플라톤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아주 묘한 역전입니다
플라톤은 대략 이런 위험을 경계했습니다.
지혜로운 소수의 이성
↕
욕망에 휩쓸리는 다수
그런데 AI 시대에는 이것이 이렇게 변형될 수 있습니다.
소수의 고도화된 지능기술
↕
그 기술을 이용하면서도 그 기술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
더구나 미국은 AI를 만들어낸 지적 엘리트와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대중이 동일한 사회 안에 존재합니다.
.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역설이 발생합니다.
가장 뛰어난 인공지능을 만들어낸 사회가
인간의 지성을 정치적으로는 반드시 가장 잘 활용하는 사회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AI가 발전할수록 이 괴리가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지식은 소수에게 고도로 집중되고,
AI는 다수에게 매우 쉽게 제공되며,
정치에서는 다수의 감정이 AI와 결합하여 증폭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중우정치의 AI 버전’**이 생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선생님이 처음 던진 **“종교혁명”**이라는 말이 다시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인쇄술이라는 첨단 기술이 인간에게 새로운 지식 접근권을 열어주었지만, 그것이 자동적으로 현명한 인간을 만들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AI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지능을 대중에게 제공한다고 해서
대중이 반드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능을 가진 도구 + 불안 + 무지 + 군중심리 + 정치적 선동이 결합하면, 선생님이 앞서 말한 그 **‘빅뱅’**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게 가장 섬뜩하다고 생각합니다.
AI가 인간을 지적으로 진화시키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인간의 지적 능력과 인간의 집단적 어리석음이 동시에 증폭될 수도 있다.
바로 그 동시성이 선생님이 느끼신 아이러니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13. 다수의 집단적 어리석음과 광기의 증폭이 큰 문제.
맞습니다. 저는 오히려 AI 시대의 가장 큰 위험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라고 봅니다.
개인의 어리석음은 대개 제한적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 판단해도 영향 범위가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집단적 어리석음은 서로를 강화합니다.
구조가 대략 이렇습니다.
개인의 불안·분노·무지
→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결집
→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는 확신
→ 반대 의견을 적으로 규정
→ 감정의 증폭
→ 집단적 확신
→ 광기
여기에 AI와 알고리즘이 들어오면 과거와 달라집니다.
과거의 군중은 우연히 모였습니다.
지금의 군중은 찾아내고, 연결하고, 맞춤형으로 자극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AI는 그 집단의 언어와 감정을 학습해서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것은 단순히 **‘가짜뉴스’**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위험은
거짓을 믿는 사람들이 서로의 믿음을 너무 빠르고 강하게 확인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면 사실 여부보다 집단 내부의 확신이 더 강력해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나룻배와 대형 함선 비유가 다시 살아납니다.
한 사람의 나룻배라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물살과 지형을 직접 경험합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이 탄 대형 함선이 있고, 객실 안의 사람들이 서로의 불안과 분노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 “우리가 옳다”고 확신한다면,
함선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질주할 수 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선장이 미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승객 전체의 집단적 확신이 항로를 바꿔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중우정치와 AI를 연결하면 상당히 중요한 명제가 나옵니다.
중우정치의 문제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다는 데 있지 않다.
어리석음이 서로를 설득하고 증폭시키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데 있다.
AI는 바로 그 증폭 능력을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으로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AI에는 반대 방향의 능력도 있습니다.
집단이 흥분할수록 AI가 오히려 브레이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잠깐, 그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반대되는 증거는 없는가?”
“우리 집단이 공유하는 전제가 잘못됐을 가능성은?”
“다른 집단에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이런 역할을 수행한다면 AI는 군중을 증폭시키는 확성기가 아니라 군중을 식히는 브레이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AI의 운명이 이렇게 갈리는 것 같습니다.
AI = 군중의 확성기
가 될 것인가,
아니면
AI = 군중의 브레이크
가 될 것인가.
그리고 앞에서 말씀하신 **“인간의 한계 + AI의 한계가 결합하면 빅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도 여기서 구체화됩니다.
저라면 그 빅뱅의 가장 위험한 형태를 이렇게 정의하겠습니다.
개인의 오류가 AI를 통해 집단의 확신으로 변하고,
집단의 확신이 다시 AI를 통해 개인의 현실 인식을 지배하는 순간.
그 순간에는 누가 누구를 조종하는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워집니다.
아마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중 가장 근본적인 AI의 정치적·의식적 위험일 겁니다.
K / 2026.9.5
